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여행드로잉작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행드로잉작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그림으로 여행을 기록하는 사람’ 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여행 혹은 일상 속의 이야기나 떠오르는 감정들을 그림이라는 형태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작업 공간이 한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 직업의 큰 특징입니다. 때로는 길 위에서, 가끔은 좋아하는 카페 안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여행드로잉은 원하는 공간에서 내게 편안한 시간만큼 그리는 그림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많은 그림을 만납니다. 형태와 색채로 정보와 감정을 전달하는 모든 이미지를 ‘그림’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범위는 굉장히 넓어집니다. 거장들이 남긴 명화와 우리에게 친숙한 웹툰은 물론이거니와 영상 속에 삽입되는 CG나 도로의 표지판 같은 픽토그램도 이 거대한 장르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소수의 창작물을 다수가 소비하는 것이 그림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이었습니다. 명화를 보기 위해 미술관을 가고, 거리의 표지판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최근 이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담담한 일상을 그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거리에서 종종 목격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매력적인 여행자들의 소식을 온라인을 통해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비되지 않아도 되는 자신만의 기록을 즐겁게 만드는 이들이 최근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여행드로잉’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어반스케치’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서로 결이 조금 다른 단어이긴 하지만, 중요한 점은 누구나 창작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희망을 그들 스스로 발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자유롭게 그리는 즐거움에 흠뻑 빠진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와 동시에 여행드로잉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조금 슬픈 사실은 그림이 취미가 아닌 직업이 될 때, 현실이 마냥 즐겁고 따뜻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직업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종사를 통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 합니다. 생계의 해결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죠.
여행드로잉작가로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큰 성취감을 주는 작업은 단행본을 출간하는 것입니다. 여행의 단상을 담은 글과 그림을 묶어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과 「드로잉 제주」라는 두 권의 여행드로잉 에세이를 출간한 경험이 있습니다.
인내와 고통 없이 만들어지는 책이 어디있겠냐만은 여행드로잉 에세이는 출간에 더욱 많은 비용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취재를 위해 필요한 여행 경비를 마련해야 하며, 원고 안에 사진 대신 그림이 삽입되기 때문에 집필에 더 많은 수고로움을 필요로 합니다.
힘들게 만들어 낸 단행본이지만, 사실 출간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초라하기만 합니다. 저자는 도서 판매가의 약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인세로 받게 되는데, 장기간 이어진 출판시장의 위축으로 인해 인세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은 다수의 작가들에게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여행드로잉 에세이의 경우 출간 후 취재비조차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단기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으로는 외주 일러스트 혹은 잡지 등의 매체에 투고하여 받는 원고료가 있습니다. 외주 일러스트의 경우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프로젝트는 몹시 드문 편입니다. 시장에 형성된 일러스트 단가가 워낙 낮은 편이라 대부분의 작업은 생활에 실질적 도움이 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장기적이고 고정적인 수입원이 아니기 때문에 수익의 불규칙성으로 인한 불안감도 심각합니다.
거주의 불안정 역시 창작활동을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높은 임대료로 인해 독립된 작업 공간을 갖추기가 어려워졌고, 거주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주위의 작가들이 머물던 서울을 떠나 경기도 혹은 더 먼 지방으로 이주하기도 합니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전시를 할 수 있는 대안 공간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부담스러운 갤러리 대관료 역시 가난한 창작자를 움츠러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업 작가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려온 꿈이었습니다. 그 꿈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지금도 치열한 하루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일들을 만드는 작업에 뛰어든 결과 데뷔 초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협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다가오는 4월에는 여행사와 연계하여 ‘작가와 함께 떠나는 드로잉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참가자들과 함께 8일 동안 이탈리아를 둘러보며, 그 시간과 공간을 그림으로 기록할 예정입니다. 얼마 전에는 경상북도와 함께 영주 부석사의 가을을 알리는 홍보영상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부석사를 직접 찾아가 경내의 풍경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과정이 영상 콘텐츠 속에 삽입되었습니다. 여행드로잉의 특징인 현장성이 잘 드러난 협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작년에는 MBC 미니시리즈와 JTBC 16부작 드라마에 아트자문 및 그림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작업의 한계를 없애자,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일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술가가 되고자 하고, 그 중의 어떤 이들은 좌절 끝에 실패의 쓴 맛을 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전업 작가가 된 후 수많은 위기를 만났고, 지금도 여전히 살얼음 위를 걷는 느낌입니다. 걸어온 몇 년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아찔한 위기를 간신히 넘겼던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힘들고 위태로운 시기에 찾아와 준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한 몇 번의 좋은 기회가 있었기에 지금껏 버텨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전업 예술인이 예술을 전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예술가를 위한 작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위기의 원인을 본인의 비성실성에서 찾지 않았으면 합니다.
반성이 스스로에 대한 비관으로 이어지지 말았으면 합니다.
더 즐겁게 창작할 수 있을 내일이 올 거라 믿습니다.
※ 본 게시물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로 사는 세상' 캠페인의 일환으로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로 사는 세상' 캠페인이 궁금하시는 분은 인스타그램(@kawf_campaign)을 방문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