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였습니다.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가 갑자기 풀린 일이 있었습니다. 우연한 사건이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 문제를 꿈에서 푼 듯한 기시감을 느끼면서였습니다. 당연히 정확한 답이나 풀이과정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에 해법이 존재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믿음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지독하기만 했던 문제가 거짓말처럼 풀렸습니다.
많은 영역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을 겪어 왔습니다. 인생의 여러 문제에서도 결과에 대한 믿음은 필수적일 때가 많습니다. 부를 쌓고 유지하는 데에서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미래를 낙관하는 선언이 모두를 결승선에 데려다준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 없이는 결과를 얻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친구이고, 당신은 저보다 더 존경받는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저한테 정확히 자랑하신 적은 없지만, 대략 한 2033~58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에는 그렇게 됩니다. 당신은 왜 진작 이런 책을 쓰지 않았냐며 자주 저를 원망했습니다. 제가 이뤄둔 게 없었더라도 논리적으로 명백한 사실을 알려줬더라면 좋았을 거라고요. 그래서 저는 2025년으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제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아무 것도 아닌' 독자에게 "우리는 결국 부자가 된다"고 하는 건 분명 미친 소리로 들릴 것이란 걸 저도 압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도 분명히 풀이가 존재한다고 상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당신과 제가 닫힌 엔딩으로 가는 그 경로 위에 이미 있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해법은 상상하는 대로 펼쳐지기도 합니다. 기시감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풀이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부유해지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너무 확실해서 ‘완료형’으로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의심스러운 해피 엔딩
왼쪽부터 모니시 파브라이, 릭 게린, 찰리 멍거 (출처, 모니시 파브라이)
워런 버핏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투자자 중 한 명입니다. 그에게는 비슷할 정도로 현명한 동료이자 스승인 찰리 멍거가 있었습니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회장과 부회장을 맡은 그 둘은 잘 알려진 부자들입니다. 그런데 릭 게린은(Rick Guerin, 1929–2020 ) 훨씬 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역시 버핏과 멍거만큼 똑똑했고, 셋은 커리어를 항상 함께 했었는데도요. 릭 게린은 부채를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1974년의 극심한 약세장에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버크셔 해서웨이 지분을 모두 버핏에게 넘겨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끝났습니다. 버핏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찰리와 저는 늘 우리가 믿기지 않을 만큼의 부자가 될 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서두르지 않았어요. 결국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릭 역시 우리 못지않게 똑똑했지만 그는 서둘렀던 거지요.
부자가 되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버핏은 마치 미래에서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합니다. 그만한 낙관을 갖지 못했던 사람은 서둘렀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겠지만, 부를 쌓는 길에서 서두르는 건 치명적인 실수가 됩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굳건한 확신 말고도 준비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냉정한 현실 인식입니다.
스톡데일 대령은(James Bond Stockdale, 1923-2005) 아마도 미군 장교로서는 가장 유명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베트남전에서 그는 대공포에 격추돼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리고 증오의 폭행과 고문으로 점철된 8년의 포로생활을 견디고 결국 살아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톡데일에게 생존 비결을 물었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풀려날 거라고 믿은 동료들은 죽었습니다. 오는 부활절이면 돌아갈 거라고 믿은 동료들도 죽었습니다. 틀림없이 풀려나긴 하겠지만,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저는 각오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부릅니다. 낙관주의를 유지하는 것과 회의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A가 B를 강제하지도 않고 B가 A를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믿음과 각오가 모두 필요하다는 통찰은 생존 이야기 여러 건에서 거듭 드러납니다.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스톡데일
1972년 10월, 칠레로 가던 우루과이 비행기가 안데스 산맥에 추락했습니다. 극단적인 추위와 배고픔이 생존자들을 시험에 빠뜨렸습니다. 수색구조가 끝났다는 소식이 라디오를 통해 알려지자 사람들은 더 버티지 못했습니다. 페르난도는 달랐습니다.
서쪽으로 걸어가면 칠레가 나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는 잊지 않았습니다. 혼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럭비선수인 친구와 함께 떠납니다. 희생자들의 살점으로 15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준비합니다. 떠난 지 10일 만에 개울가에서 기어코 칠레 사람을 만납니다. 이들의 구조요청으로 16명이 귀환하는 데 성공합니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사샤 브라우스는 일종의 직업 군인입니다. 그녀는 비무장 상태에서 임무에 투입됩니다. 한 마을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으로부터 소녀를 구출해 내는데요. 거인의 추격이 계속되자 사샤는 자신이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곤 소녀에게 말해 줍니다.
“내 말 잘 들어. 괜찮으니까 이 길을 달려가. 약해도 괜찮아. 널 구해줄 사람은 반드시 있어. 금방은 못 만날지도 몰라. 그래도 만날 때까지 달려.” 현실이 생각과는 다를 가능성. 어쩌면 사샤가 사냥꾼 출신인 덕분에 체득한 교훈일지 모릅니다. 이런 장치가 빠진 희망은 별로 힘이 없습니다. 순진해서 더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미래의 자아가 나에게 해주고 싶을 말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저도 재미있게 봤습니다. 과거로 간 시간여행에서 재벌가 손자가 된 주인공에게는 미래가 모두 역사입니다. 대선 결과를 맞히고, 분당에 넓은 땅을 사고, 외환위기에서 달러를 보유하고, 영화 「타이타닉」의 흥행과 월드컵 4강 신화에도 배팅합니다. 그러면서 시청자들도 다들 비슷한 상상에 젖곤 했습니다.
미래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묻고 싶은 말은 뻔합니다. 삼성전자는 얼마까지 오를까, AI의 1등은 누가 될까, 기억나는 로또 당첨번호 등등. 입장을 바꿔 봅시다. 현재의 우리가 과거의 자신에게 가서 해주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닐지 모릅니다. 아마도, 미래의 자아가 현재로 와서 해주고 싶은 말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저에게는 열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습니다. 제가 6학년일 때 태어났지요. 당연히 동생은 제가 아니지만, 그 녀석을 보면 제 과거를 만나는 기분입니다. 동생 덕분에 저는 '해주고 싶은 말' 시뮬레이션을 27년이나 하고 있습니다. 저는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기회나 기술(재테크)보다 더 중요한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것 봐봐, 넌 결국 멋지게 해냈어.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스토리였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도 믿어 줘. 힘들어도 끝까지, 내게로 와 줘.
아마 미래의 자신에게 듣게 될 예언도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행입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처럼 중요한 세계관은 더없이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이라는 화두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템입니다.
경제적으로 생존하지 못하면 부자는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부자가 된다는 건 끝까지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심장박동 역할을 하는 것이 복리입니다. 손익이 붙은 투자금이 다시 정맥혈처럼 투입되며 닫힌 회로를 만듭니다. 그런데 과다출혈이 위험하듯, 재투자할 결과가 사라지면 안됩니다. 릭 게린처럼 0이 된 자산에는 아무리 심장박동이 곱해져도 소용없습니다. 부자가 되는 건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더 나은 생존'은 없습니다.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조바심을 내거나 좌절하는 이들은 복리를 멈춥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이 탈락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자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자만,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서로 독립적인 두 가지 태도를 가리킵니다. 부를 쌓는 것과 관련해서도 미래를 향한 낙관과 냉정한 현실 인식이 모두 필요합니다. 다음 글에서 그 중 첫번째의 기술적 근거를 다루려고 합니다. ETF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