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와 편견, 그 어느 사이에 위치한 시선
아이는 어느덧 5학년이 되었다.
아빠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그 자리에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한 눈망울에 눈물만 펑펑 쏟아내던 아이는 그 사이 부쩍 자라 엄마만큼 커졌다. 이제는 엄마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며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던가, 컴퓨터를 고쳐주기도 하고 모르는 핸드폰의 기능을 알려주기도 해서 매번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소년이 되었다. 내 정신하나 온전히 붙들고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힘들어 동굴에 나를 가뒀던 그 세월, 교육적인 측면에선 거의 방목에 가까운 상태에 놓여있던 아이는 올해 초 처음으로 사교육의 세계에 발을 디뎌놓았다.
나는 그간 아이의 교육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학원 선생님의 눈초리가 있을세라 미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5학년이 되도록 알파벳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아이는 대견하고 고맙게도 공부에 있어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잔뜩 긴장한 내가 조심스레 통화버튼을 누를 때면 매번 잘하고 있다는 칭찬과 공부에 재능이 많고 머리가 영특하다는 칭찬일색이라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한참을 흐뭇한 마음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이들을 혼자 키우기 시작하면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이고 걱정이었던 점은 육아를 하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난제들을 나와 같은 눈높이와 심경에서 의논하고 결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성인의 부재로 인해, 단독으로 결정하는 사안들에 실수가 많지는 않을까라는 점이었다. 늘 결정을 내리는 데는 확신이 부족해 전전긍긍했고, 아이가 잘못을 할 때면 나의 양육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나 후회가 밀려왔다. 할머니와 외삼촌은 그 역할을 해주기엔 거리상의 한계가 있었고, 자주 보는 내 친구들은 노출 상의 한계가 있었다. 설사 나와 같이 고민을 해준다 하더라도 단순히 ‘아이의 교육’을 넘어선 ‘양육’은 집안의 분위기와 일상의 사소한 대화, 재정사정과 아이와 부모의 심리상태 등, 수없이 많은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행동으로, 아이와 나의 특정 일면이나 시기를 관찰하거나, 나에게 전달받는 정보만으로 만 판단하는 사람들은 ‘양육’에 있어서 공동 의사결정의 주체에 대한 나의 갈증을 해소하기엔 부족했다.
최근 머릿속에 박혀 신발에 붙어 끈적이는 껌처럼 나를 짜증 나게 했던 사건은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아이가 다니는 학원에서 상담을 받고 온 아이 친구 엄마가 전달해준 학원 선생님의 말 한마디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쾌감이 들어 종일 찝찝한 기분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다녔다. 선생님은 그 엄마에게 내 아이에 대한 언급을 하며 똑똑한 아이인데 뭔가 눈빛이 공허하고 속이 비어있는 느낌이 든다는 말을 전했는데 처음에는 그 말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 나를 짜증 나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뭔가에 집중하면 멍한 채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다른 생각에 빠지면 주위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자기 세계가 강해 사차원이란 얘기를 가끔 듣곤 했다. 아이의 이런 특성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서 이해되었지만, 끝엔 약간의 분노가 밀려왔다.
첫째는, 진지한 관찰에서 오는 선생님의 우려라면 다른 아이의 엄마가 아닌 나에게 직접 상의를 하였음이 옳고, 둘째는 사회와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아이가 성장 하면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변화와 개인적인 특성을 모두 아빠의 부재와 결부시키려 드는 우려와 동정이라는 탈을 쓴 오지랖으로 아이가 느낄 수 있는 상실감이었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4년 사이 정말 콩나물처럼 매일 변화했고 성장했다. 그 과정에는 분명 엄마인 내가 ‘정말 내 아들이란 말인가. 실화냐’라는 감탄을 내뱉게 하는 영특함과 다정함 같은 긍정적인 변화도 있는 반면, 게임에 눈을 뜨면서 거짓말을 시작한다던가, 뭔가에 심하게 몰두하며 주변에 무관심해지고, 학습에 대한 칭찬에 빈번한 노출로 상대를 무의식 중에 얕보는 기고만장함 같은 부정적인 변화도 분명히 있다.
좀 더 이상적인 부모는 있지만, 완벽한 부모가 없는 것처럼 아이도 부모의 기대에 좀 더 부응하는 아이가 있을지언정 완벽한 아이는 없다. 단지 부모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성장 속에서 부정적인 변화를 성장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완벽한’ 어른이 아닌 공감과 배려를 아는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나의 경험을 나누고 나의 실패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실을 겪은 가정에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편견과 오지랖을 우려와 관심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부정적인 상황을 (심지어 나조차도 더 이상 지금의 상황을 조금 쉽지 않은 상황으로 여길 뿐 더 이상 부정적인 상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머릿속에 종이에 찍혀 나오는 양식처럼 틀에 박아놓고, 조금만 눈에 띄는 모습을 감지할 때면 관심이란 이름으로 오지랖을 범한다. 편견에 가득 쌓인 견해에 우려라는 정당화를 씌운다.
어른인 나조차도 눈빛이 사연 있게 생겼다는 언급이나 역시 슬픔이 있어 보인다는 말에 충분히 많은 상처와 분노를 겪었다. 나는 그저 그 순간 배가 고파 짜증이 났을 뿐이고, 피곤한 그 순간 웃고 싶지 않았을 뿐, 주로 많이 웃고, 장난이 심하고 기본적으로 매우 행복한 사람인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나를 꼭 닮은 아이는 집중할 때면 멍한 표정을 짓고, 대형견처럼 천진하고, 웃는 보조개가 너무나 예쁜, 엄마와 수다 떠는 것을 아직은 가장 좋아하는 행복한 아이이다.
진정 관심과 책임을 가진 어른이라면 아이가 성장하면서 겪는 많은 변화를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과 결부시키지 않도록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분명 부족하기 짝이 없는 초보 엄마이고, 아주 많이 철이 없는 망아지고, 서툼과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기고만장한 엄마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엄마이기 전에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고, 사랑을 넘치게 받아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고, 적어도 아이에게 그 사랑과 행복을 전해주는 것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는 씩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만큼 웃긴 엄마는 없다.
알겠냐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