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속껍질)까기인간으로 거듭나다!
나는 아주 극단적인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 하나에 푹 빠지면 주변에서 부르는 내 이름도 못 듣는다. 주로 일이나 공부를 할 때 그렇다. 반면 그 외의 것들을 할 때에는 집중력이 정말로 바닥이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면 몸이 근질거린다고 해야 할까?
그 근질거림은 보통 손끝에서 온다. 다른 감각들이 이미 상응하는 자극에 노출되고 있어도 손끝은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찾는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거나, 지하철에서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핸드폰 게임을 하는 식이다. 정말이지 손끝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데 대상을 찾지 못할 때는 손톱을 뜯기도 한다.
멀티태스킹을 지양하고 싶어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던 때도 있었지만, 분산된 집중력만으로도 평균 이상으로 흐름을 쫓아가는 지능(?) 덕에 곤경에 처한 적이 없었고, 곤경에 처한 적이 없다 보니 버릇을 고치기란 더 어렵기만 한 일이다.
반대로, 지속적으로 손끝에 자극이 있는 일들에는 무서우리만큼 빠져드는 편이다. 아마도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릴 일이 많았기에 회사에서도 무아지경으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이유로 나의 다양하고 '얕은' 취미들은 대부분 손을 많이 쓰는 종류의 것들이다. 레고, 조립, 퍼즐, 뜨개, 요리, 컬러링 등등. 그런데 독일로 이사를 오면서 문제가 한 가지 생겼다. 지금 베를린에서는 아인첼짐머(einzelzimmer, 한국의 '원룸')에서 살고 있다 보니 짐을 늘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고 있다. 레고, 퍼즐, 뜨개실 등을 원하는 만큼 살 수 없다는 뜻이다. 해서 이번 겨울, 2미터에 달하는 목도리를 떠서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보내주면서 나름의 윈-윈을 했지만, 레고나 퍼즐 따위의 것들은 사서 한 번 맞추고 다시 팔기에는 가성비가 너무나 떨어지고 귀찮은 일이다.
그러던 차에 최근 아주 재미난 취미를 찾게 되었다.
내 애인은 요리사이다. 베를린에서는 가공된 식료품을 전혀 사지 않고 모든 재료를 직접 다듬어 요리하는 다이닝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소스에 밤을 잘게 부수어 넣는 요리가 있는데, 얼마전 어느날 밤이 다 떨어졌고 식재료 소싱 업체에서 앞으로 며칠간 밤을 갖다줄 수 없다고 했단다. 설상가상으로 대체품으로 쓰려했던 마카다미아까지 똑 떨어진 덕에, 쉐프들이 다같이 둘러앉아 호두를 삶아 충분히 불려 껍데기를 까기 시작했다. 호두까기 인형으로 부수는 딱딱한 껍질이 아닌, 호두 살에 딱 붙어있는 짙은 색의 속껍질을 작은 칼로 살살 떼어낸 것이다.
여러 영화나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보아 상상할 수 있듯, 주방은 전쟁터다. 그런 곳에서 다같이 그 작은 호두를 골똘히 쳐다보며 속껍질을 까고 있는 장면이라니. 애인 왈, 그 자리에 있던 동료들이 '호두 몇 번 더 까다가는 부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심지어 애인은 남아있는 호두를 찰랑거리는 물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 호두 속껍질까기가 나의 새로운 취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애인이 가져온 불은 호두를 세시간에 걸쳐 다듬은 후에 나는 호두까기에 반하고 말았다.
그 날 이후, 나는 마트에서 홀린듯 호두 한 봉지를 집어 물에 넣어두고는 틈틈이 호두를 깐다. 호두의 떫은 맛을 좋아하지 않던 나였는데, 쌓여가는 호두를 얼른 먹어치워야 또 호두를 깔 수 있으니 하루에도 몇 알씩 먹고 있는 이 상황이 우습다(positive).
호두 속껍질 까기의 장점.
1. 호두를 여러번에 걸쳐 짧게 삶은 후 물에 담가두면 아주 영양가 넘치는 오일이 손에 배어나온다. 물에 손이 퉁퉁 불기보다는 피부 속까지 영양감이 가득 찬 느낌이 든다.
2. 집에 남는 결과물이 없다. 예쁘게 깐 호두를 오븐에 구워 그릭요거트에 넣어먹고, 호두강정을 해먹고, 호두파이를 만들어 먹고 나면 짐이 남지 않는다. 불필요한 쓰레기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너무나 만족스럽다.
3. 근질근질한 내 손가락의 니즈를 완벽하게 충족한다. 연약한 호두살이 바스러지지 않을만큼만 약하게 힘을 주고는 호두의 주름 사이사이에 껴있는 껍데기를 살살 벗겨낼 때의 엄청난 집중력과 쾌감이란..
내 몸 이곳저곳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편안해하는지를 샅샅이 살펴보고 알아간다는 것은 기쁜 일이구나. 손을 열심히 움직여야 하는 일을 내 다음 업으로 선택한 것도 아주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엔 나에 대해 또 무엇을 알게될까?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나 자신으로 향하는 것이 나에게 큰 만족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