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필요하고 내가 하고싶은 일

by 젠테

지난주 어느 밤에 특별한 일기를 썼다. 일기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했다.

'다시 바닥부터 생각해 보자. 서울이든 베를린이든, 비자나, 거취나, 연봉, 소비 수준, 주위 사람들의 판단이나 인정, 사회적 명성 같은 것들을 다 떼어놓고 본다면, 나는 새로운 일을 처음부터 배워서 해보고 싶은가?'


우습게도 이 두 문장이 기존의 내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독일에 와서도 나는 여전히 그런 것들에 매여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것들에 매여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작년 3월부터 42베를린에서 C를 배우기 시작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의 퇴사와 독일행에 명분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영업을 하면서 '하드스킬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을 꽤 오래간 하기도 했고, 작금의 AI시대에 프로그래밍 지식을 배워두면 앞으로 어디에든 쓸 일이 있겠지 싶었다.


그런데 프로그래밍은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꽤 오랫동안 짬짬이 파이썬이나 스위프트를 공부할 만큼 나름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건 차치하고, 그 어려움을 해결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나 열정 따위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반년쯤 솔로 프로젝트를 열댓 개쯤 해가며 점점 프로그래밍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던 시점에, 첫 듀오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듀오 프로젝트는 나름대로 값진 경험이었다. 협업이 아주 잘 되는 좋은 파트너를 만났을 뿐 아니라, 한동안 잊고 있었던 '책임감'이 부활해 누구보다 열심히 프로젝트에 임했다. 덕분에 친구들은 두세 달씩 걸리는 프로젝트를 한 달 반 만에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 C에 흥미를 잃었다..




42에서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면서, 지난해 여름부터 프리랜서로 두 개 브랜드의 미국 진출 전략/브랜딩 일을 해왔다. 솔직히 말하면, C보다 이 일이 더 재미있었다. 몇 년 간 일주일에 수십 개의 미팅을 하고 수백 개의 메일을 보내며 사람과 하는 일에 잔뜩 질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또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그 안에서 최선을 찾는 일에 매료되다니.


다행히 클라이언트들이 나를 아주 좋게 봐주신 덕에 지난달에는 프리랜서 주제에 미국으로 출장까지 다녀왔다. 참 운이 좋기도 하지. 좀 더 장기적으로 일을 함께 하기를 제안받기도 했다. 미국으로 와서 이런저런 일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혼란스러웠지만 그만큼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여러 가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의 변화로 인해 그 제안은 나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고민의 과정에서 배운 건,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재고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이 실패로 이어져도 배움에 감사하고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그렇게 작년부터 붙잡고 있던 두 가지의 옵션 - 열심히 공부해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것과 프리랜서/개인사업자에 도전하는 것 - 이 모두 선택지에서 제외되고 나니 애써 누르고 있던 불안감이 나를 덮쳤다. 유로-원 환율이 1500원을 넘어가는 이 시점에 한국에서 벌어놓은 돈을 유럽에서 까먹으며 1년을 산 데다, 앞으로 뭘 하며 돈을 벌고 싶은지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자연스럽게 '차라리 빨리 취업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흘러갔다. 이력서를 보완하고, 독일 회사들이 채용 공고를 올린다는 플랫폼을 찾아 가입해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한 서른 곳쯤 넣었을까? 절망적이게도 이제까지 회신이 온 모든 회사에서 서류 탈락했다.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보기엔 자격 요건에 나만큼 잘 부합하는 사람도 없는데? 최소한 면접은 보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공고에서까지 모조리 거절당했다. 이력서의 형식이 문제일까? 독일어 자격증이 없어서인가? 독일에서의 업무 경력이 없어서? 링크드인 피드가 방치되어 있어서? 커버레터가 부족해서? 오만가지 생각을 했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모든 게 최선의 버전이었다. 그럼에도 안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중요한 건, 직급도 연봉도 회사의 위치나 비전이나 나의 직무 그 어떤 것도 손해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손해 보고 싶지 않았던 이유를 며칠 전의 일기를 통해 깨달았다.


나는 그 일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심지어 무언가를 손해 보면서까지 그 일을 하기는 더욱이 싫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다. 소위 100세 시대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평생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일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냥 지금이 그 시기일 뿐이라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런데 그 일에 도전하기 두렵다. 왜 두려운데? 새로운 것을 배워서 신입부터 시작하기 싫다. 왜 싫은데? 글쎄. 왜 싫지?


다시 바닥부터 생각해 보자.

서울이든 베를린이든, 비자나, 거취나, 연봉, 소비 수준, 주위 사람들의 판단이나 인정, 사회적 명성 같은 것들을 다 떼어놓고 본다면, 나는 새로운 일을 처음부터 배워서 해보고 싶은가?






이 단순한 전제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지난 몇 달간 내가 해온 고민은 결국 이 결론에 다다르기 위함이었구나.





요즈음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내고 있다. 이 마음을 길게 간직할 수 있기를, 일기를 쓰던 그 밤과, 오롯이 나의 시선으로 나를 들여다본 경험을 두고두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기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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