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라는 거짓된 믿음

by 글레디에디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영화화한 <방황하는 칼날>은 또래들에게 중학생 딸을 잃은 아버지가 그 또래들에게 법의 심판이 아닌 아버지의 심판을 내리는 소설이다. 주제 의식은 강렬했다. 제목 또한 굉장하다. 칼을 쥔 사람의 칼날이 방황한다니, 묘하게 시적이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사적 복수를 시작한다. 이 나라의 ‘법’과 '공권력'이 피해자의 아버지를 추격하며 가해자를 온 힘을 다해 보호한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을 간략히 말하자면 그렇다. 익숙하지만 낯설다.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말이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의 만듦새는 차치하고 영화가 말하는 주제 자체가 묵직하다.


최근, 아니 오래전부터 형사미성년자의 범죄 처벌 수위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케케묵은 논란이고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이런 논의와 요구가 계속되는 까닭은 학교 폭력이 보다 잔인하게, 보다 악랄하게, 그리고 보다 어린 이들의 범죄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형사미성년자이기에 처벌의 수위가 낮다는 것을 안다. 뿐만 아니라 악독하고 비열한 생각에 자신들의 행위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SNS 스타가 되는 거 아니야’ 등의 반문이 반증하듯 죄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른들을 통해 배운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식이 그들에게까지 전이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에게 딱히 낯선 이질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몇 해 전 서울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생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고작 한 달짜리 교생이었다. 녀석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지냈다. 나름 담임 역할까지 도맡아 했는데, 어느 날 현장학습이 끝난 후 학급에서 힘 좀 쓴다는 녀석들하고 같이 퇴근을 했다. 편의점 앞에서 녀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녀석들과 내 앞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당시 난 퇴근 후의 술 약속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불현듯 내 앞에 있던 두 놈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쌍욕과 더불어 ‘어떤’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자칫 그것은 범죄로도 연관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먹던 아이스크림을 멈추고 녀석들을 빤히 쳐다봤다. 문득 녀석들이 참으로 이질적으로 보였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이 들었다. 그 찰나 녀석들은 ‘샘, 저희 이제 그만 가볼게요. 내일 봬요. 아이스크림 잘 먹었어요’라고 말하며 휑하니 뒤돌아 자신들의 갈 길을 갔다. 나는 녀석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진짜 교사였다면, 혹 선생이었다면 어떤 말을 해줘야 했을까.


그 후에도 나는 녀석들과 일주일의 시간을 함께 더 보냈다. 그 시간 동안 난 녀석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설마’ 그냥 생각 없이 말한 거겠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 후 난 애당초 없었던 존재 인양 그 학교를 떠났다.


그들과 나의 만남은 짧고 강렬하지도 않았다. 그들 쪽에서도, 내 쪽에서도. 서로에게 딱히 기억에 남을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어차피 난 정식 교사가 아니라 그저 학점을 따로 온 교생일 뿐이었다. 그들에게도 난 선생도 아니었고 그냥 한 달 놀러 온, 모르는 타인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나를 종종 괴롭힌다. 녀석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알 수 없는 죄의식이 지속적으로 나를 찾아온다. 내가 ‘미필적 고의’로 일어날 범죄를, 일어날 문제를 방조한 것인가 하는 죄의식 말이다.


칼을 쓰기 전에는 반드시 징조가 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있다. 부산 여중생 사건이든, 강릉 여중생 사건이든, 혹 그 어떤 형사미성년자 사건이든 간에 항상 징조는 있었다. 피해자들에게도 징후가 있을 것이다. 가해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학교 현장에 몸담고 있는 이들도 이를 묵시적으로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큰 일이야 생기겠어’라는 판단 하에 눈 감았는지 모른다. 혹 부모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마찬가지다. 주변 친구들과 피해자와 가해자의 선, 후배 등 그 모두들 징후를 보고 눈 감았을지 모른다. 내 일이 아니니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마치 그때의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형사미성년자들의 연령을 낮추고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하고 그에 걸맞은 법적 처벌을 하는 것, 그것도 다시 일어날지 모를 처절하고 비참한 이 사건의 예방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 어떤 예방책이 될 수 없다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생각해왔을 것이다. 그 사이 현상은 더 악화되었고, 구조는 더 강화되었다.


때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 언론에 보도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어떤 예방책과 답이 있을까 스스로에게도 반문해본다. 솔직히 나도 모른다. 답은 없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예방책이 있었다면, 나보다 머리가 좋고 학교 현장을 잘 아는 이들이 벌써 내놓고 시행했을 것이다. 이럴 때면 미천하고 비천한 내가 참 싫다. 그래도 한 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부끄럽게도 징조나 징후를 똑바로 보고 말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때의 내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았듯 저마다 징조나 징후를 본 사람들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만약,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그러지 않았다면 일어날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까. 결과는 모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법 과거 완료다. 흔히들 쉽게 말한다. 나 또한 쉬이 말한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그렇다. 이 사회에서 설마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황천길로 보내 놓고도 여전히 죄책감을 모른다. 내가 그 설마였고, 이 사회가 그 설마의 결과물이며, 당신이 그 설마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전히 ‘설마’ 때문에 방황하는 칼날이 목표를 모른 채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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