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시계 크로노미터 (1부) : 경도이야기

Hamilton Chronometer & Navy Pioneer

by Zeit

Intro


여기, 2012년 해밀턴 창립 120주년을 기념해 한정판으로 발매된 '카키 네이비 파이오니어(Khaki Navy Pioneer)'가 있습니다.

전용 케이스 홀더를 결합하면 손목시계도 되고 탁상시계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시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는 항해용 짐벌(Gimbal) 케이스 안입니다.


이 모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이 사용했던 '해밀턴 마린 크로노미터 모델 21(Hamilton Marine Chronometer Model 21)'을 오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시계를 출발점으로, 약 300년 전 ‘마린 크로노미터’가 탄생하던 순간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던 대서양전투(Battle of the Atlantic)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려 합니다.


경도문제


나침반의 등장으로 인류는 육지가 보이지 않는 대양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18세기까지도 바다는 여전히 '죽음의 미로'였습니다.


망망대해에서 자신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은 곧 조난과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위치를 안다는 것은 지구라는 거대한 구체 위에서 가로(위도)와 세로(경도)의 좌표를 찍는 일입니다.


다행히 남북의 위치를 나타내는 위도(Latitude)는 북극성의 고도나 태양의 남중고도를 측정하면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경도(Longitude)였습니다.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서 위치를 나타내는 경도에는 하늘에 고정된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날레마(analemma) 현상이 보여주듯, 기울어진 자전축과 공전의 영향으로 태양의 위치는 매일 달라졌고, 지구의 자전 때문에 별들 또한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론 자체는 이미 1530년,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젬마 프리시우스(Gemma Frisius)에 의해 정립되어 있었습니다.


지구는 24시간 동안 360도를 회전하므로 1시간에 15도씩 이동합니다. 따라서 ‘출발지의 정확한 시간’과 ‘현재 위치의 시간’의 차이만 알면 경도를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론은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정확한 시간을 유지할 시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회중시계는 하루에 10~15분씩 오차가 발생했으며, 몇 달씩 이어지는 항해에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적도의 습기와 극지방의 혹한을 통과하는 동안 윤활유는 굳거나 흘러내렸고, 금속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고철 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육지에서는 정밀했던 추시계조차 파도에 롤러코스터처럼 흔들리는 선박 위에서는 장식용 가구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선원들은 '위도 항법(Latitude Sailing)'이라는 원시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적지와 같은 위도에 도달한 뒤, 육지가 나타날 때까지 동쪽이나 서쪽으로 끝없이 항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바이킹들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콜럼버스 역시 이 방식으로 인도를 찾아 나섰다가 아메리카 대륙을 만나게 됩니다.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가 본격적으로 열린 15세기 이후, 황금과 향신료를 실은 수많은 배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해류에 떠밀려 길을 잃고 항해가 길어지면서 선원들은 괴혈병과 갈증, 기아에 시달렸고, 배 전체가 전멸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안개 속을 떠도는 유령선의 전설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경도를 알지 못해 만들어진 비극이었습니다.



경도문제를 해결한 시골 시계공


이 문제가 단순한 조난이 아닌 국가적 재난으로 인식된 계기는 1707년 '실리 제도 대참사'였습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영국 해군의 쇼벨 제독 함대가 안개 속에서 위치를 오판해 암초 지대로 돌진, 전함 4척이 침몰하고 약 2,000명의 수병이 수장된 사건입니다.


적군에게 패한 것도 아닌, 단지 '위치를 몰라서' 벌어진 이 참사는 영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영국 의회는 1714년 '경도법(Longitude Act)'을 제정하고, 이 난제를 해결하는 자에게 2만 파운드(현재 가치 약 80억 원)라는 막대한 상금을 걸었습니다.


조건은 서인도제도까지 6주 항해 후 경도 오차 30해리(56km, 시간 오차 2분) 이내. 하지만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아이작 뉴턴조차 "기계적인 시계로는 불가능하다"며 별을 관측하는 '하늘의 시계'에만 매달렸습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은 위대한 학자가 아닌, 시골 목수 출신의 천재 시계공 존 해리슨(John Harrison, 1693~1776)이었습니다.

그는 1735년 첫 번째 시계 H1을 시작으로, 30년에 걸친 집념 끝에 1761년, 마침내 회중시계 크기의 역작 H4를 완성합니다.


1761년 11월, 해리슨의 아들 윌리엄은 H4를 들고 자메이카행 배에 올랐습니다. 81일간의 항해 끝에 시계는 단 5초의 오차만을 보였습니다. 경도법이 요구한 기준을 완벽하게 통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트 천문학자들로 구성된 경도위원회(Board of Longitude)는 이 결과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연일 뿐"이라며 끊임없이 재검증을 요구했고, 해리슨을 괴롭혔습니다.


결국 조지 3세 국왕이 직접 나서 실증을 해보고 "하늘에 맹세코, 자네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하겠네!"라고 호통을 친 후에야 해리슨은 상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위원회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습니다. H4는 배 한 척 값에 달하는 고가였고, 제작에 몇 년이 걸리는 물건이었기에 당시 영국이 운영하던 수천 척의 배에 보급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마린 크로노미터가 대중화된 것은 50년 뒤 존 아놀드(John Arnold)와 토마스 언쇼(Thomas Earnshaw) 같은 후대 제작자들이 양산 기술을 개발하고 나서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좀 흔들리는 배에서는 측정하기 어렵고,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천문학적 지식도 좀 있고, 복잡하고 계산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월거법(Lunar distance mathod)같이 하늘의 시계에 답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해리슨이 증명한 '가능성'은 후대 제작자들이 이룩한 '대중화'로 확산되어 대영제국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1분 오차 28km


그렇다면 실제 항해에서 위치는 어떻게 확인했을까요?

여기서 크로노미터의 영원한 짝꿍, 육분의(Sextant)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더해, 해리슨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경도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자 왕실 천문학자였던 네빌 매스켈린이 제작한 항해력(Nautical Almanac)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존 해리슨의 H4가 1759년에 완성되었고, 육분의는 그보다 2년 앞선 1757년에 발명되었습니다.


그리고 항해력은 8년 뒤인 1767년에 출간됩니다.


세 도구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등장하며, 인류의 항해 방식과 세계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도구들을 활용해 항해사는 다음과 같은 절차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출항 전, 크로노미터를 그리니치 표준시(GMT)에 정확히 맞춥니다.


망망대해에서 육분의로 태양을 관측하다가, 태양이 하루 중 가장 높이 떠오르는 순간, 즉 남중(현지 시간 정오)에 맞춰 “마크!”를 외칩니다.


그 순간 크로노미터가 가리키는 그리니치 시간을 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크로노미터가 오후 3시(15:00)를 가리키고 있다면, 현지 시간과의 시차는 3시간입니다.


지구는 1시간에 15도씩 자전하므로, 3시간 × 15도 = 45도.


즉, 배는 그리니치보다 시간이 늦은 서경 45도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뜻입니다.


태양이 정오가 아닌 시간에 관측되었을 경우에는 항해력을 참조해 계산을 보정했으며, 숙련된 항해사라면 약 10분 내에 경도를 산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두려운 적은 단 하나, 시계의 오차였습니다.


지구는 24시간에 한 바퀴, 즉 360도를 회전합니다. 다시 말해 1분 동안 지구는 0.25도를 움직입니다.


이 0.25도는 적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28km(15해리, 김포공항-올림픽공원 거리)에 해당합니다.


즉, 시계가 단 1분만 틀려도 내 위치는 지도 위에서 28km나 빗나가게 됩니다.


망망대해에서의 28km 오차는 목적지를 영영 지나치게 만들거나,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암초로 배를 이끌기에 충분합니다.


경도상이 그렇게까지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고, 항해사들이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크로노미터를 그토록 귀하게 모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영제국을 만든 크로노미터


제임스 쿡(Captain Cook) 선장은 해리슨의 H4를 복제한 K1을 들고 1768년부터 1779년까지 태평양을 정밀하게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영국은 1795년에 해양측량을 전담하는 수로국(Hydrographic Office)를 설치하고 전 세계에 탐사선을 보내 해안선을 측량한 결과 1880년대에 정밀 해도(Admiralty Chart)를 완성했습니다.

이들 탐사선 중에는 찰스다윈이 탑승한 비글호(HMS Beagle)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최신형 마린 크로노미터가 무려 22개나 실려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영국은 상선들이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바다위 고속도로와 내비게이션을 완성했고, 항해비용을 크게 절감하면서 세계 해상무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884년 국제자오선회의가 열릴 당시 세계 상선의 약 72%가 영국 해군성이 제작한 해도에 따라 항해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데이터 기득권'을 쥐게 되자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가 본초자오선(Prime Meridian)과 세계시간의 기준(GMT : Greenwich Mean Time)이 되는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참고로, 1884년에 결정된 본초자오선은 그리니치천문대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2015년 확인해보니 GPS상 경도0이 되는 선은 약 102m떨어진 공원 속 오솔길이라고 합니다.

이 후 세계는 영국이 만든 지도를 보고, 영국이 만든 항해로를 따라 무역을 하고 영국이 정한 시간(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인류역상 최대의 제국을 완성하게 됩니다.


결국 크로노미터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양을 지배하는 자만이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시대, 그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제국의 필수 장비'였습니다.


영국은 해리슨의 발명품을 통해 바다 위에서 자신들의 좌표를 가장 먼저 확정 지었고, 그 확신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부를 끌어모으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영국의 해상 패권도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국의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도 역시 '크로노미터'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대서양전투'에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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