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s Big crown D.26
한 시대의 풍경과 사연을 담고 있는 시계에는 타임머신 기능이 있습니다.
그 시계를 손목에 얹는 순간 그 시대의 이야기 속으로 강제 소환되는 것입니다.
1930년대 스위스 공군의 훈련기였던 드와틴(Dewoitine) D.26을 기념하고, 아직도 비행 가능한 역사적인 기체 HB-RAG(기체번호 286)의 유지 보존을 후원하기 위해 제작된 오리스 빅 크라운 D.26도 그런 시계들 중 하나입니다.
이 시계는 파일럿이 비행 중 즉각적으로 시간을 판독할 수 있도록 다이얼과 대비되는 선명한 아라비아 인덱스를 채택하고, 장갑 낀 손으로도 조작이 쉬운 오버사이즈 크라운을 장착하여 1938년 출시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대서양 건너편에서 1940년에 등장한 미군 육군항공대의 A-11과 다이얼 구성이나 코인 베젤의 인상이 묘하게 닮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운이 감돌던 1930년대 후반의 풍경을 담고 있는 이 시계를 출발점 삼아 영세중립국이자 시계의 고향인 스위스가 어떻게 인류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을 견뎌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대공황(1929~1939)이 덮치며 전 세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패전의 멍에를 쓴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증오와 '레벤스라움(Lebensraum, 게르만족의 생활권)'이라는 영토 확장 사상이 급속하게 확산되었습니다.
이 분노를 등에 업고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위험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불과 20년 전 끔찍한 전쟁을 경험했던 유럽인들은 감히 그를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일부를 나치 독일에 넘겨주는 뮌헨 협정(1938)을 체결하며, 그들이 원하는바를 주고 평화를 얻었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서 자금 흐름을 꿰뚫고 있던 스위스는 달랐습니다.
독일의 군사비 지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감지한 스위스는 1930년대 중반부터 국방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무기와 탄약을 비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산 훈련기 D.26으로 파일럿을 양성하는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독일로부터 Bf109 전투기 50대를 도입하여 공군력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릅니다.
폴란드를 집어삼킨 독일은 곧바로 프랑스로 총구를 돌립니다.
당시 독일 군부는 프랑스 국경의 철옹성 '마지노선'을 우회하기 위해 중립국인 스위스를 통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험준한 알프스 대신 북쪽의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낫질 작전(Operation Sickle Cut)'을 선택했고, 단 6주 만에 파리를 함락시킵니다.
이제 스위스는 추축국(독일, 이탈리아)의 점령지에 완전히 포위된 섬이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스위스를 "유럽의 얼굴에 난 여드름"이라 부르며 경멸했고, 9~12개 사단을 투입해 3~6일 만에 스위스를 점령하는 타넨바움 작전(Operation Tannenbaum)을 수립합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지도를 보면 추축국 점령지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처럼 남은 스위스가 어색하기만 한데, 독일은 왜 이곳을 그대로 두었을까요?
스위스는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주변국들로부터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유럽의 전략적 요충지를 어느 한 강대국이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열강들의 합의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스위스의 생존은 단순히 조약 종이 한 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스위스 자체의 '고슴도치(철저한 무장)'와 '꿀단지(대체 불가능한 효용)'라는 두 가지 냉철한 생존 전략 덕분이었습니다.
1. 고슴도치 전략
나치가 프랑스를 유린하던 1940년 5월, 스위스는 총동원령을 내려 당시 인구 420만 명 중 20%에 달하는 85만 명을 무장시켰습니다.
스위스군은 독일이 침공할 경우 북부의 주요 도시를 포기하고 험준한 알프스 산맥 깊숙이 들어가 항전하는 레뒤(Réduit, 요새) 전략을 수립해두었습니다.
이를 위해 알프스 곳곳에 암반을 뚫어 대포와 벙커, 심지어 전투기 격납고까지 2만개 이상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독일과 이탈리아를 잇는 알프스의 주요 터널과 다리에 폭약을 설치해, 침공 시 유럽의 물류 동맥을 끊어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독일군도 통상적인 전투라면 스위스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지만, 이들이 알프스로 후퇴하여 저항하면 막대한 병력이 게릴라전에 발목이 묶일 것이고, 동맹인 이탈리아와의 연결이 끊어져 전략적인 이익이 사라진다고 계산했습니다.
2. 꿀단지 전략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마르크화를 비롯한 교전국 화폐의 가치가 급락할 때 스위스프랑은 금태환을 유지하며 국제 결제의 기준 통화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막대한 석유와 희귀 자원이 필요했던 독일은 이를 판매하는 중립국들이 마르크화 수취를 거부하자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결국 독일은 보유한 금과 예술품 등 각종 자산을 스위스 금융시스템을 통해 스위스프랑으로 환전해야만 필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나치 독일은 점령지를 무자비하게 약탈했습니다. 훗날 연합군이 독일 점령 후 발견한 메르커스(Merkers) 소금광산에서는 금괴 7천 자루와 각종 예술품은 물론, 수용소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은 금반지와 금이빨까지 발견되어 충격을 주었습니다. 스위스는 이러한 약탈 자산을 세탁하고 환전해 주는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스위스 은행의 강력한 비밀주의 역시 침공을 막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루이 14세 시절부터 관습적으로 이어오던 고객 비밀 보호는 1934년 은행법 개정을 통해 징역형이 가능한 법적 의무로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독일 나치가 유대인들의 은닉 자산을 색출하려 압박한 데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패전 후 자산 몰수를 우려한 나치 고위층들이 오히려 이 비밀주의를 믿고 막대한 자금을 스위스에 예치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독일 지도부가 자신들의 은퇴 자금을 보호하기 위해 스위스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제기됩니다.
금융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독보적인 정밀 공업 기술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시계 산업에서 파생된 정교한 기술력은 공작기계, 항공기용 기관포, 정밀 신관, 군용 트럭, 그리고 독일 전차와 항공기에 필수적인 볼 베어링 생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독일 입장에서는 스위스를 파괴하고 점령하는 것보다, 온전한 중립국으로 남겨두어 군수물자 생산 기지로 활용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훨씬 큰 이득이었습니다.
사진은 1941년 호이어 크로노그래프 광고입니다.
일방적인 상업광고와 달리 스위스 장교들이 시간을 동기화하는 장면이 눈에 띕니다.
아무래도 당시 동원령이 내려진 분위기에서 예비군 소비자들을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크로노그래프는 적 포병의 섬광과 소리의 시간차를 바탕으로 실시하는 대포병 사격처럼 시간을 정교하게 사용하는 복잡한 전쟁에서 필수적인 장비였습니다.
하지만 크로노그래프를 직접 무기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무기는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88mm Flak 대공포입니다.
미군 제8공군 통계에 따르면 독일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항공기는 4,274대였던데 반해 대공포에 의한 격추는 약 5,380대였습니다.
연합군의 전략폭격기를 요격하는 Flak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포탄이 정확한 고도에서 터지도록 제어하는 시계태엽신관(Mechanical Time Fuzes)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는 기계식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와 작동원리가 비슷합니다.
발사 순간의 엄청난 중력가속도(약 20,000G)와 회전력을 견디며 정확히 작동하는 태엽 장치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스위스 시계 공장들뿐이었습니다.
B-17 폭격기 한 대를 격추하는 데 평균 16,000발의 대공포탄이 소모되었다고 하니, 스위스는 전쟁 기간 수억 개의 '일회용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신관)'를 독일에 판매한 셈입니다.
때문에 스위스의 시계브랜드들은 전쟁기간 중 시계보다는 신관부품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독일이 군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크로노그래프의 수출을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대공포에 전자부품을 활용한 VT(Variable Time)신관을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시계태엽신관은 공중폭발탄, 조명탄 등 여러곳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영국은 다양한 경로를 이용하여 이들을 확보했습니다.
2kg 이하의 소포를 개봉하지 않고 운송하는 점을 이용하기도 하고, 크로노그래프와 신관부품을 분리하여 일반 시계인것 처럼 위장해 독일 세관을 통과했습니다.
당시 독일세관은 규정상 시계수출 제한은 크로노그래프 같은 복잡한 기계에만 적용되었고 일반적인 타임온리 시계에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가 주요 수출품인 시계를 제3국에 수출하겠다는데 이를 막을 명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매달 수천 개의 크로노그래프가 영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크로노그래프 외에도 스위스 시계브랜드들은 영국과 독일 양쪽에 시계를 공급했습니다. 대표적으로 IWC같은 기업들은 독일에는 B-uhr를 납품하고 영국에는 W.W.W를 납품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립국으로서 양쪽에서 이익을 본 것이지만,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런 정밀기술산업의 수출은 중립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중요한 줄타기 수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중립국 스위스가 평화로웠던건 아닙니다.
오히려 스위스는 독일과 연합군 양쪽과 모두 교전하며 철저한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 직전, 독일 루프트바페 폭격기들이 197차례나 스위스 영공을 침범하자 스위스 공군은 즉각 요격에 나섰습니다. 쥐라상공에서 발생한 이 공중전에서 독일은 11대가 격추되었고 스위스는 3대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이어진 공중전에서 스위스는 독일에서 수입한 Bf109로 독일의 He111과 Bf110을 격추시켰습니다.
자기들이 판 전투기에 자국기가 격추당하자 히틀러는 격노했고, 앞에서 살펴봤듯 다양한 이유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스위스에 보복을 하기 위한 타넨바움 작전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일 주요 시설을 폭격하는 포인트블랭크작전이 한창이던 1943년 7월부터는 연합군 폭격기가 스위스 영공을 침범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스위스가 영국과 미국 폭격기를 대공포로 격추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또한 독일 폭격을 마친 폭격기가 전투손상을 입고 독일 대신 스위스에 비상착륙하는 경우도 많아져 전쟁기간동안 168대의 B-17과 B-24 폭격기를 압류하고 1,000명이 넘는 연합군 조종사들을 억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군과 스위스 공군사이의 공중전도 있었습니다.
손상된 B-17 폭격기가 스위스 영공에 들어오자 스위스 Bf-109 전투기가 나타나 연합군 폭격기를 압류하는 뒤벤도르프 공군기지로 유도했는데, 뒤따라온 미군 P-51 머스탱 전투기가 스위스 전투기를 공격하여 한 대를 격추하고 다른 한 대에 손상을 입힌 것입니다.
스위스인들에게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연합군이 스위스를 반복적으로 폭격했다는 점입니다.
1944년 4월에는 IWC 본사가 있는 독일 국경 인근의 샤프하우젠이 미군 B-24리버레이터 폭격기 50대의 폭격을 받아 40명이 사망하고 270명이 부상을 입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IWC 공장에는 폭탄이 서까래를 뚫고 들어왔지만 폭발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제네바, 바젤, 취리히 등의 도시를 전쟁기간 중 70여차려 폭격하여 84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오인폭격이었다고 했지만, 이러한 폭격 중 적어도 일부는 연합군 항공기를 공격한 스위스를 응징하고 추축국과의 경제 및 산업 협력을 중단하라는 경고를 보내기 위한 의도적인 공격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2차대전 중 영국과 독일 양쪽에서 발견되는 시계들을 보면서 '스위스가 전쟁이라는 재앙을 먹고사는 죽음의 상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니 철저한 무장 중립과 냉혹한 경제 논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과정의 산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는 오리스 D.26에서 1930년대 빈티지 파일럿 워치의 낭만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이야기가 덧씌워진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