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2부): 그날의 시계들

Dirty Dozen, A-11, Vertex

by Zeit



“셰르부르 르아브르(Cherbourg-Havre, 노르망디 해변) 지역에 대한 우리의 상륙작전은 만족할만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저는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만약 이 시도에 대해 어떠한 비난이나 잘못을 묻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저 혼자만의 것입니다”


이 메모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아이젠하워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1944년 6월5일 밤에 작성한 공식 성명서 초안입니다.


다행히 발표되지 않았지만, 작전의 성공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942년 디에프 상륙작전(Operation Jubilee)의 처참한 실패를 기억하는 연합군 수뇌부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상륙부대가 해안에 갇혀 독일군의 포격과 반격에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도입된 작전이 공수부대를 상륙 작전 구역의 양 날개(서쪽과 동쪽)에 먼저 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명확했습니다. "해안에 갇힌 아군의 길을 열고, 적의 증원을 차단하라."



□ 공수부대의 역할과 임무


서쪽을 맡은 미군 제82·101공수사단의 임무는 유타(Utah) 해변의 빗장을 푸는 것이었으며 작전명은 Operation Boston(82nd) & Albany(101st)입니다.

가장 서쪽인 유타 해변은 롬멜이 만든 인공 늪지대로 인해 내륙 진입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곳에 상륙하는 미 제4보병사단이 늪지대에 고립되어 학살당하지 않으려면, 늪 사이로 난 4개의 좁은 제방도로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제101공수사단은 제방도로의 출구를 확보하고, 제82공수사단은 교통 요충지인 생메르 에글리즈(Ste. Mere Eglise)를 선점하여 해변으로 달려올 독일 지원 병력의 길목을 차단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동쪽을 맡은 영국 제6공수사단의 임무는 전차군단의 진입을 막는 것이며, 작전명은 Operation Tonga입니다.

가장 동쪽인 소드(Sword) 해변은 독일 기갑사단과의 거리가 가까워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연합군의 진격로가 될 캉(Caen) 운하의 ‘페가수스 다리’는 온전하게 탈취하고, 반대로 동쪽 외곽의 다리들은 폭파하여 독일 전차부대의 진입을 막아야 했습니다.


동시에 상륙 선단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메르빌 포대를 상륙 개시 전까지 무력화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 모든 임무에는 조수의 때에 맞춰 설정된 'H-hour(상륙 개시 시간) 이전'이라는 절대적인 데드라인이 걸려 있었습니다.


약속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16만 명의 연합군이 해변에서 갈려나갈 운명이었기에, 지휘관부터 사병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시간을 알려줄 시계는 필수 장비였습니다.



□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2001)>의 묘사처럼, 현실은 계획과 달랐습니다.

쏟아지는 대공포화와 짙은 구름으로 인해 미 공수부대원들은 계획된 지점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롬멜이 공수부대 저지를 위해 침수시켜 둔 인공 늪지에 무거운 군장을 멘 대원들이 떨어지며, 수백 명이 착지 즉시 익사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날 투입된 약 13,000명의 공수부대원 중 2,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즉석에서 소규모 팀을 꾸려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윈터스 중위가 이끄는 부대원들이 브레쿠르 마뇨르(Brécourt Manor)에서 독일군 포대를 격파하며 유타 해변의 출구를 열어젖혔듯, 그들은 '계획'이 아닌 '임기응변'으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동부 전선의 영국군 상황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맞이한 건 글라이더 착륙을 방해하기 위해 들판에 박아놓은 기둥들, 일명 '롬멜의 아스파라거스(Rommelspargel)'였습니다.

수많은 글라이더가 파괴되고 병력은 분산되었지만,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1962)>처럼 영국군은 극적인 성과를 거둡니다.

존 하워드 소령이 이끄는 글라이더 부대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목표물인 페가수스 다리 인근에 소리 없이 착륙, 단 10분 만에 다리를 점령하고 "Ham and Jam(임무 완수)"을 타전했습니다.

메르빌 포대 공격팀 역시 600명 중 150명만 집결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치열한 백병전 끝에 데드라인인 05:30을 30분 남긴 05:00에 포대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들은 모든 목표한 시간 내 임무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06:30 유타와 오마하 해변을 시작으로 16만 연합군의 대상륙이 시작되었습니다.



□ 미 공수부대의 시계 : A-11 Waterproof


제101공수사단 이지중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소품 하나하나에 대한 광적인 고증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여기에서 주인공인 윈터스 중위가 착용한 시계가 A-11입니다.

당시 일반 보병용으로 지급되는 크림색 다이얼에 캐시드럴 핸즈를 특징으로 하는 ORD(ORdnance Department, 미육군 병기국)시계가 있었지만,


공수부대는 정밀한 시간통제가 필요하여 육군항공대용으로 만든 A-11 약 3만개가 할당됐습니다.

A-11은 브랜드(Elgin, Waltham, Bulova)에 따라 디테일이 다르지만, 크게 방수(Waterproof) 모델과 방진(Dustproof) 모델로 나뉩니다.


물에 닿을 일이 적은 폭격기 승무원에게는 방진 모델이, 늪과 강을 건너야 하는 공수부대원에게는 방수 모델이 지급되었습니다. 노르망디의 습한 환경에서 방수가 되지 않는 시계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방수 성능은 오늘날의 생활방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생산 효율을 위해 방진 모델(2-Piece)은 단순한 구조였던 반면, 방수 모델(3-Piece)은 베젤과 케이스 백을 분리하고 고무 개스킷을 넣어 나사처럼 잠그는 방식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1945년 매뉴얼에 '코인 베젤'이 방진 모델의 특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윈터스 소령이 착용한 엘진(Elgin) Cal.539 모델은 코인 베젤을 가진 방수 케이스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전시 기록과 실제 생산품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영국군의 시계, A.T.P 또는 W.W.W


그렇다면 영국 제6공수사단의 손목에는 무엇이 채워져 있었을까요?

당시 영국군 표준 시계는 크림색 다이얼의 A.T.P.(Army Trade Pattern)였습니다.


전쟁 발발과 함께 민수용 모델을 급히 징발한 탓에, 이 시계들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방수(Waterproof)' 기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와 진흙, 습기가 가득한 야전에서 방수가 안 되는 시계는 금세 고장이 나거나, 라듐 야광 도료가 습기에 녹아 다이얼을 망가뜨리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노르망디는 강과 운하가 복잡하게 얽힌 데다 롬멜이 만든 인공 늪지까지 더해져 물을 피해 작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1분 1초가 생사를 가르는 전장에서 멈춰버린 시계는 단순한 고철이 아니라 작전 실패를 의미했습니다.

이에 영국 국방부(MoD)는 새로운 표준인 W.W.W. (Watch, Wrist, Waterproof) 규격을 확정하고 1943년, 12개 스위스 제조사에 긴급 생산을 주문합니다.


이것이 훗날 ‘더티 더즌(Dirty Dozen)’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군용 시계의 시작입니다.



□ 사건의 재구성 : 엇갈린 증언과 사라진 진실


여기서 시계 애호가들 사이의 오랜 공방이 시작됩니다.


핵심 쟁점은 ‘과연 1943년에 발주된 W.W.W. 시계들이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의 해변에 있었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난제로 남은 이유는 전쟁 기록의 태생적 불완전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1970년대 쿼츠 파동을 거치며 수많은 시계 브랜드와 그들의 아카이브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군용 시계의 바이블로 불리는 <British Military Timepieces(2009)>의 저자 콘라트 크니림(Konrad Knirim)은 단호하게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IWC, 오메가 등 제조사에 남아있는 ‘송장(Invoice)’의 날짜가 독일 항복 직후인 1945년 5월에서 12월 사이에 몰려 있다는 점을 결정적 증거, 즉 '알리바이'로 제시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매체가 이를 인용하며 “W.W.W.는 전후에 납품되었으며 2차 대전 실전에는 투입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브랜드 측에서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1972년 폐업 후 2016년 부활한 Vertex사는 창립자 가문의 기록을 근거로 “D-Day 이전에 이미 4,652개의 Vertex Cal.59가 영국군에 전달되었고, 종전 전까지 약 1만 5천 개가 납품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기념해 복각 모델을 출시했지만, 아쉽게도 D-day 참전여부에 대해서는 구전 기록 외에 주장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서류는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류를 쥔 쪽과 실물을 쥔 쪽의 진실 공방.


이는 마치 용의자가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는지를 다투는 치열한 법정 다툼과 같습니다.


크니림은 송장을 알리바이로 내세워 ‘부재(不在)’를 주장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은 서류보다 훨씬 많은 진실을 품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서류 너머에 존재하는 범인의 ‘유재(有在)’를 증명할 정황 증거들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ㅇ [범행동기] 방수.손목.시계.


범죄 수사의 첫 단추는 동기(Motive)입니다.


오버로드 작전이 확정된 것은 1943년 5월. 곧이어 6월부터 포인트블랭크 작전이, 7월부터는 상륙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기에 기존 주력 시계였던 ATP의 생산이 중단되고, 새로운 방수 시계 W.W.W.의 스펙이 결정되어 주문이 들어갔습니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요?


연합군은 이 거대한 도박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상륙 여건 조성을 위한 전략 폭격에만 B-17 폭격기 5천 대와 승무원 2만 6천 명을 갈아 넣을 정도로 물자와 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작전의 성공을 좌우할 '시간 동기화'의 핵심 장비에 소홀했을 리 없습니다.

거친 파도와 갯벌을 뚫고 해안에 닿아야 하는 병사들에게 방수 기능 없는 시계는 무용지물입니다.


군 수뇌부는 노르망디라는 거대한 수중 전장을 분석하며 '방수(Waterproof)'가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필 그 시점에 시계의 이름(W.W.W.)에까지 'Waterproof'를 못 박을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ㅇ [범행 기회] 봉쇄망의 구멍


두 번째 쟁점은 기회(Opportunity), 즉 납품 가능성입니다.


크니림의 주장은 “나치가 스위스를 포위했기에 물자 이동이 불가능했다”는 전제에 기초합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연합군의 첩보와 물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크니림 자신의 저서에서도 언급했듯, 영국은 탄약, 항공기, 레이더 제작에 필수적인 공업용 보석, 마이크로 볼베어링 등 스위스산 정밀 부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나치의 봉쇄망을 뚫고 스위스와 영국을 오가는 '대인겔드 작전(Operation Danegeld)' 같은 비밀 공수 작전이 실재했습니다.

엄격히 통제받는 전략물자도 대량으로 들여왔는데, 부피가 작고 은닉이 쉬운 ‘손목시계’를 2년 동안이나 들여오지 못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더군다나 크로노그래프가 아닌 3핸즈 손목시계에 대한 통관은 자유로운 편이었고, D-day에 필요한 초도 물량 정도는 외교 행낭이나 제3국을 경유하는 스머글링(Smuggling) 루트를 통해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물류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ㅇ [정황증거] 사라진 2년의 공백


세 번째는 논리적 모순, 즉 시계열적 오류입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그해 9월이면 프랑스 내 스위스 접경 지역이 해방되어 무역 장벽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더군다나 W.W.W.는 기존 ATP의 단순한 방수 개량형일 뿐, 생산 난이도가 높아서 제작지연을 초래할만한 오버 테크놀로지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한창인 1943년에 주문한 군수품이 2년 동안이나 납품되지 않고 있는데 군이 이를 방치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전쟁이 다 끝나고 나서야 쓸모도 없어진 15만 개의 시계를 한꺼번에 납품받았다는 주장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타임라인상 명백한 모순입니다.



ㅇ [증거의 재해석] 사후 정산 시스템


그렇다면 크니림이 제시한 1945년의 송장은 무엇일까요?


당시의 금융 시스템을 고려하면 이 서류는 '물건 도착 알림'이 아닌, '밀린 외상 청구서'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전쟁 중 영국과 스위스는 직접적인 현금 송금이 불가능했기에, '청산 계정(Clearing Account)' 시스템을 이용했습니다.


물건은 비밀리에 먼저 받고, 대금은 장부상에만 기록해 두었다가, 종전 후 금융 봉쇄가 풀리면 일괄 정산하는 방식입니다.


즉, 1945년 5월~12월의 송장들은 시계가 그때 도착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1944년부터 이미 병사들의 손목 위에서 전장을 누비던 시계 값을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청구한 행정 처리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서류가 아니라 서류가 작성된 '맥락'에 답이 숨어 있습니다.



□ 결론 : WWW는 D-day에 노르망디에 있었을 수 밖에 없고 있어야 했다


지금까지 확인한 증거와 정황을 토대로, 80년 전 사라진 그날의 진실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43년, 연합군 수뇌부는 오버로드 작전을 점검하던 중 치명적인 문제를 발견합니다.


기존의 비방수 시계(ATP)로는 거친 바다를 건너야 하는 상륙작전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영국군은 즉시 ATP 생산을 중단하고, '방수(Waterproof)'를 핵심으로 한 새로운 규격, W.W.W.를 발주합니다.

계약은 전쟁 중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선납품 후정산' 방식이 적용되었습니다.


W.W.W.는 고도의 신기술이 필요한 시계가 아니었기에 1944년 초 제작이 완료되었고, 나치의 봉쇄망을 뚫는 비밀 공수 작전과 제3국 우회수출 등을 통해 영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그 급박했던 초도 물량 8천여 개는 가장 먼저 적진에 투입될 '제6공수사단'의 8천여명의 손목에 채워졌을 것입니다.

1944년6월의 D-day가 성공하고 9월에 유럽의 수송로가 열리자, 주문했던 15만 개의 시계들이 순차적으로 납품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영국군은 비로소 "전쟁이 끝났으니 그동안 외상으로 받은 물건값을 정산하겠다"고 통보합니다.


크니림 박사가 발견한 1945년의 서류들은 시계가 그때 도착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스위스 브랜드들이 제출한 '밀린 대금 청구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을까요?


1970년대 시계 산업을 덮친 '쿼츠 파동' 때문입니다.


당시 납품에 참여했던 12개 브랜드(Dirty Dozen) 중 8개는 파산하거나 합병되어 공중분해 되었고, 남은 4개조차 브랜드와 지적재산권이나 거래되는 혼란 속에서 30년 전의 낡은 납품 기록들은 오래된 장비들과 함께 주저함 없이 폐기 처분되었습니다. (Zenith의 엘프리메로 폐기과정을 아시는 분은 이해를 하실겁니다.)


2000년대 들어 다시 군용 시계에 대한 관심이 부활했을 때, 우리 손에 남은 것은 1945년에 발행된 '청구서' 몇 장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서류만을 보고 "시계는 전쟁이 끝나고 왔다"고 오판했던 것입니다.

비록 W.W.W.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병사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스모킹 건(결정적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보입니다.


당시의 사진들은 인물보다는 전반적인 상황을 담는데 치중해있고, 그나마 남아있는 공수부대원들의 사진은 손목을 꼭 가리고 있는게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야간에 시계반사광이 노출되지 않도록 훈련한 결과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계라는 사물과 서류 한 장에 국한된 시각을 벗어나, 전쟁의 긴박했던 맥락을 들여다보면 결론은 자명합니다.

W.W.W.가 탄생해야만 했던 이유도, 그 시계가 존재해야만 했던 시간이나 장소도, 결국은 '노르망디'일 수밖에 없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노르망디 상륙작전(1부) : 아이크 vs 롬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