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1부) : 아이크 vs 롬멜

Heuer ref.2447NT & Zenith ref.1581

by Zeit


프롤로그 : 하늘의 허락


서기 208년 겨울, 양쯔강 남쪽 적벽. 유비와 손권의 5만 연합군은 조조의 25만 대군을 화공으로 격파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한겨울의 강바람은 아군에게 불리한 북서풍만 불고 있었습니다.


연합군 사령관 주유는 "모든 준비는 갖추어졌으나, 오직 동남풍이 불지 않는구나"라며 탄식합니다.


이때 제갈공명이 "동짓날부터 3일 동안 거센 남동풍을 빌려오겠으니 공격을 준비하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칠성단에 올라 기도를 합니다.

약속한 날이 되자 기적처럼 동남풍이 불었고, 연합군은 조조의 함대를 불살라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며 승리합니다.


그로부터 1,700여 년이 흐른 1944년 6월. 연합군 최고사령부(SHAEF)가 위치한 영국 사우스윅 하우스(Southwick House).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a.k.a. 아이크(Ike))는 주유와 똑같은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을 앞두고 있었지만, 영불해협에는 여름에 보기 드문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합군이 영불해협을 건너는 것은 하늘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기예보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독일을 막아내는 사이, 서유럽에 제2전선을 형성하여 독일을 협공하려는 이 거대한 계획은 1943년 카사블랑카 회담과 테헤란 회담을 거쳐 1944년 6월로 결정되었습니다.

드디어 D-day로 설정된 1944년 6월 5일. 16만 명의 병력, 7천여 척의 함정, 1만 2천여 기의 항공기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출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계획을 완성할 마지막 퍼즐 조각은 오직 '타이밍'뿐이었습니다.


공수부대 투입을 위해서는 보름달이 뜨고 바람이 약해야 했으며, 상륙부대는 해안의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썰물에서 밀물로 바뀌는 시점에 진입해야 했습니다.


이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는 날은 6월 중 단 6일(5~7일, 19~21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6월 4일 새벽, 아이젠하워는 침통한 표정으로 작전 연기를 지시합니다.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의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송선에 갇혀 뱃멀미에 시달리던 병사들은 "날씨에 상관없이 출동하자!"고 아우성쳤지만, 바다는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사우스윅 하우스에서는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미군 기상팀은 "통계적으로 6월 5일은 맑을 확률이 높다"며 강행을 주장했지만, 영국군 기상장교 제임스 스타그 대령은 "강력한 저기압이 영불해협을 강타할 것"이라며 결사반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6월 4일의 폭풍우는 영국팀의 분석이 옳았음을 증명했습니다.


만약 통계만 믿고 상륙을 강행했다면, 1281년 태풍으로 괴멸했던 여몽연합군의 비극이 노르망디 앞바다에서 재현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대서양 방벽 너머의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은 미군 기상팀과 같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연합군이 '만조, 새벽, 맑은 날씨'에만 올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독일군 기상대는 "이런 악천후 속 상륙은 자살행위"라고 보고했고, 안심한 롬멜은 6월4일 아침에 날씨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아내의 50번째 생일을 챙기기 위해 독일로 휴가를 떠나버립니다.


그는 독일군의 서쪽 기상 관측망이 무너져 날씨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작은 창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상장교 스타그는 기적 같은 데이터를 포착합니다.


폭풍우 전선 뒤쪽에 '일시적인 고기압의 틈'이 존재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6월 5일 새벽 4시 15분,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가운데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스타그는 확신에 차 보고했습니다.


"내일(6일) 아침부터 약 36시간 동안, 폭풍이 일시적으로 잦아들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이 짧은 '틈(Small Window)'을 놓치면 다음 기회는 2주 뒤인 6월 19일뿐이었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날은 더 큰 폭풍이 찾아왔습니다.


즉, 6월 6일이 아니면 1944년의 상륙은 불가능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습니다.


15만 명의 목숨과 유럽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긴 침묵 끝에 그는 역사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좋아, 갑시다 (OK, let's go).“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시계: Heuer Ref.2447NT


오랜 기간 아이젠하워 장군이 전쟁 중 착용한 시계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이 있었지만, 1946년 청문회 사진 등을 정밀 분석한 결과 그가 오버로드 작전 당시 착용한 시계는 1943년산 호이어(Heuer) Ref.2447NT 크로노그래프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호이어는 포격 시간, 항공기 비행, 부대 이동 등 촌각을 다투는 전장에서 장교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크로노그래프 명가였습니다.


사령관인 아이젠하워가 직접 시간을 측정할 일은 별로 없었겠지만, 수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병력의 시간을 통제해야 했던 그의 상황과 의지가 Ref.2447NT를 선택하게 했을 것 같습니다.

이 역사적인 시계는 훗날 1963년 출시되는 Heuer Carrera Ref.2447로 레퍼런스 넘버가 계승되었으며, 1996년에는 Heuer Carrera Ref.CS3111로 재발행되었습니다.



롬멜의 반격


아이젠하워가 호이어 크로노그래프를 보며 "가자(Let's go)"를 외치던 그 시각, 에르빈 롬멜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독일 울름의 자택에 있었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그는 급히 차를 돌려 노르망디로 복귀했지만, 연합군은 이미 해변을 장악한 뒤였습니다.


하지만 '사막의 여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롬멜이 지휘하는 B집단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강력한 반격을 시작했고, 전선은 노르망디의 미로 같은 산림지대인 '보카주(Bocage)'에서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연합군은 독일군보다 3배 많은 병력, 10배 많은 탱크, 20배 많은 항공기를 쏟아붓고도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여우사냥


팽팽하던 균형이 깨진 것은 거창한 작전이 아닌,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1944년 7월 17일, 전선을 시찰하던 롬멜의 전용차가 연합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아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머리에 중상을 입은 롬멜은 인근 리바로(Livarot)의 작은 교회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습니다.


당시 그를 치료했던 약사 M. 레센(M. Lessen)은 그 긴박했던 순간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독일 군인들이 '롬멜'의 이름을 웅성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장교들은 보안 때문인지 그의 신분을 숨기려 애쓰는 눈치였죠. 나는 환자를 오크 테이블 위에 눕히고 붕대를 감았습니다. 급한 대로 승용차 좌석을 뜯어내 매트리스처럼 깔고 그를 베르나이 병원으로 이송시켰습니다."


현재 캉 기념관(Caen Memorial)에는 당시 롬멜이 누웠던 그 테이블이 보관되어 있으며, "7월 17일, 에르빈 롬멜 원수가 이 테이블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동판이 그날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라진 원수의 시계


롬멜이 떠난 후, 약사 레센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물건 하나를 발견합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환자의 손목에서 풀어둔 시계였습니다.

"다음 날 한 장교가 다시 찾아와 '원수의 시계'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어제 그 환자가 진짜 롬멜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죠. 장교는 롬멜은 무사하지만, 운전병은 사망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과연 그 시계는 무엇이었을까요? 1943년 이전 사진에서 롬멜의 시계가 소매 끝으로 얼핏 보이긴 하지만, 정확한 모델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황과 독일군의 보급 체계를 고려할 때, 전문가들은 그 시계가 제니스(Zenith)의 DH ref.1581이었을 가능성을 높게 봅니다.



독일군의 시계: Dienstuhr (DH)


당시 독일군은 'B-Uhren(관측 시계)'으로 유명하지만, 일반 병사와 장교들에게도 'Dienstuhr(복무용 시계)'라는 명칭으로 시계를 대량 보급했습니다.


육군은 뒷백에 DH(Dienstuhr Heer), 공군은 회화적인 로고나 약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독일군은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등으로 전선이 급격하게 넓어지면서 시계가 대량으로 필요해지자 자국 기업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기업까지 포함해 약 92개 업체와 계약을 맺어 1942년부터 시계를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롬멜과 같은 고위 장교에게는 튼튼하고 정확한 고급 브랜드가 지급되었는데, 주로 제니스(Zenith), 론진(Longines), 독사(Doxa) 등이었습니다.


이 시계들은 33~35mm 케이스, 검은색 다이얼, 야광 인덱스, 스몰 세컨드 등 전장에 적합한 실용적인 디자인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영국군이 제작한 '더티 더즌(W.W.W.)'의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독일군에 시계를 납품한 92개 업체 명단에 IWC, 오메가(Omega), 론진(Longines), 레마니아(Lemania) 등 연합군에게 '더티 더즌'을 만들어준 6개 브랜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발키리(Valkyrie)


사고 이후 롬멜이 전선에서 이탈하자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연합군은 롬멜 부재 한 달 만에 캉을 점령하고, 8월 25일 파리를 해방시키며 오버로드 작전을 성공으로 이끕니다.

그 사이, 독일 내부에서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인 '작전명 발키리'가 실패로 돌아갑니다.


수사 과정에서 롬멜이 쿠데타 세력과 연관되었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환멸을 느끼고 연합군과의 휴전을 주장했던 그를, 히틀러는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국민 영웅인 롬멜을 함부로 처형할 수 없었기에 히틀러는 1944년 10월 14일, 롬멜에게 잔인한 선택지를 보냅니다.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가족까지 몰살당할 것인가, 명예롭게 자살하고 국장을 치를 것인가.“

롬멜은 가족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집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세워진 메르세데스 차량 안에서 청산가리를 삼킵니다.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고, 사인은 '전상에 의한 심장마비'로 조작되었습니다.



에필로그 : 재능보다 어려운 것


전쟁이 끝난 뒤, 아이젠하워는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훗날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이 됩니다.


하지만 전쟁 전까지만 해도 그는 무려 16년 동안 승진을 못한 만년 소령이었고, 그중 7년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참모로서 행정과 조율 업무를 도맡던, 전형적인 ‘책상앞 군인'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전쟁 발발로 그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연합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지만, 그가 상대해야 했던 인물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처칠의 고집, 몽고메리의 오만, 패튼의 광기, 드골의 강한 자존심. 게다가 적은 다름 아닌 히틀러였습니다.


안과 밖이 모두 전쟁터인 상황에서, 실전 지휘 경험조차 거의 없었던 아이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미국 대통령이 되어 한국전쟁을 매듭지었고, 냉전의 긴장 속에서도 균형을 유지하며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의 탁월한 ‘인품’에 있었습니다. 인자한 미소와 차분한 태도, 인내심과 신중함, 그리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조정 능력.


그와 함께 일했던 영국의 앨런 브룩 장군은 아이젠하워를 ”전략적 사고나 전술 기획, 지도력이 뛰어난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복잡한 문제를 조율하는 데 있어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의 조정 능력 덕분에 연합군의 협동이 가능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재능은 찬란했으나 끝내 융화되지 못했던 롬멜과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롬멜은 전술적 천재에다 부하들이 목숨 바쳐 따르게 하는 지도력을 갖췄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보급 현실을 무시한 독단적 진격으로 수뇌부와 끊임없이 충돌했고, 노르망디 방어 전략을 둘러싸고도 서부전선 사령부와 대립하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습니다.


젊었을 때는 롬멜의 천재성이 멋있어 보였는데, 나이가 들수록 아이크처럼 하는게 더 어렵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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