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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c Jan 23. 2024

미국 유학 이야기

나는 흑인이 좀 두렵더라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글로 남깁니다.

가족과 함께한 1년 남짓한 2017년 전후의 미국 유학생활의 기억을 기록하는 것은 그 시간들의 소중함이 예상했던 대로라는 자기 확인과 앞으로 반복되기 힘들다는 아쉬움의 표현이라 생각해 봅니다.



미국의 식민지 시대 역사를 보여주는 생활박물관에서 부엌에 요리하는 백인 여성을 재현한 것은 사실 왜곡이라는 글이 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인들에게 가족의 정과 부엌에서 칠면조 요리를 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데 적어도 1800년대까지 과거에서는 맞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그것은 마치 유명 정치인 혹은 그보다 덜 유명한 정치인들이 연말에 요양원을 찾아 보호대상자를 발가벗겨서 사진을 찍고, 앞치마를 두르고 김장하는 곳에서 찍은 기념사진들이 많은 경우 부자연스러운 것과 흡사하다.

미국의 크고 작은 역사박물관, 특히 내가 잠시 있었던 남부지방(미국인이 말하는 남부는 지도를 놓고 나누어 남쪽이라기보다는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플랜테이션으로 부를 이룬 버지니아와 그 아래쪽 대부분을 가리킨다)의 박물관에서 종종 무엇인가 어둡고도 애잔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대부분 그들의 역사가 강제 이주되어 노예로 지내던 아프리카인 혹은 다른 지역에서 끌려온 흑인, 그리고 그들의 후손으로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인 흑인들의 고통과 한이 어떠한 형태로든 서려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국 유학시절 나는 아시아인으로서 '미국인'인 흑인들로부터 가끔  인종차별받는 느낌(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었리라)을 받았는데, 그것은 때로는 거친 말투(대부분 코커시언과 히스패닉의 말투는 영어라도 덜 거칠다), 아니면 나에게 물건을 던지거나 거칠게 전달하는 등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서부터였다.


물론 흑인 운전면허 시험관이 나와 아내를 비롯해 각자 자국에서 오랜 기간 운전 경험이 있는 인도인과 다른 아시안들을 실기 시험에서 반복해서 떨어뜨리는 것도 어느 정도 내게는 차별로 느껴졌다(나와 실기시험을 대기하던 중 대화를 나누었던 그들도 공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종 차별이라기보다 텃세 아니면 적어도 그들이 겪은 역사에서 체득된 거칠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고 위안했다.

듀크대학교가 있던 노스캐롤라이나와 미국 남부 지역 여행을 가끔 하면서 박물관을 방문하는 시간이 늘어나고(짧은 기간 동안 대학원 학위과정을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마치기 위해서 나는 주말에도 과제를 하느라 가족들을 돌 볼 여유가 부족했다. 가을부터는 논문에 집중하느라 가족들과 여행은 대부분 여름에 집중되었는데 아내와 갓 초등학교 아이들과 가장 안전하고 의미 있게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곳으로서 주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선택했다), 미국 역사에 관해 그리고 특히 미국 흑인들의 역사에 관해 더 알아가게 되면서 흑인인 미국인들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그것은 혐오나 공포를 동반하지는 않았는 데, 그래서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달리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이 커졌는 데, 그것은 그들의 고통과 분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고, 그들 세대가 아니더라도 부모 조부모 세대가 겪어 온 과거를 토대로 강하게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되도록 일종의 교육받은 그들의 몸짓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가 근대에 일본의 핍박 속에서 살아온 것과는 다르다고 할 것이, 여전히 다수인, 그들 직계 조부모들을 착취하고 지배했던 백인들 그리고 그 후손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미국인이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물론 이것은 정작 미국인들 사이에 옅어진 갈등을 이방인인 내가 좁은 이해의 폭으로 섣부르게 인식한 것일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을 생각하면서 뉴욕시 맨해튼의 빌딩과 LA의 화려함, 자유로움만 떠올린다면 그것은 제주도를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해변과 한라산만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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