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예린이 부칠 편지의 주소지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백예린 본인이 밝힌 대로 이 앨범은 2015년 < Frank >부터 시작된 홀로서기의 기록이다. 박지민과의 듀엣 피프틴앤드(15&)의 틴에이지 발라드 대신, 홀로 기타를 잡고 밴드를 꾸려 만들어나간 습작이다. 이 18개의 기록을 가요계 흔치 않은 더블 앨범, 그것도 대부분이 영어 노랫말인 채로 공개할 수 있었던 건 음악 페스티벌과 유튜브 영상을 통해 꾸준히 재생산된 'Square (2017)'와 작년 < Our Love Is Great >의 성과가 생각 이상으로 놀라웠던 덕이다.
각 사이드의 대표 격 트랙 'Popo (How deep is your love)'와 'Square (2017)'를 통해 백예린이 동경하는 음악 세계를 확인한다. 전자는 'Our love is great'을 만든 꿈결 같은 알앤비고 후자는 1980년대 뉴웨이브의 색채로 더 밝아진 선 굵은 모던 록이다. 일찍이 < Frank >와 'Bye bye my blue'로 세련되고도 힘 있는 목소리를 들려준 바 있었는데, 여기에 2017년 오아시스의 'Champaign supernova'를 커버하며 드러낸 록에 대한 열정을 더했다. 어느 장르에도 어색함 없이 녹아드는 범용성은 백예린이 동세대 싱어송라이터들보다 앞서 나가는 핵심이다.
대형 기획사에서의 < Our Love Is Great >이 이와 같은 백예린의 스타일을 보다 범대중적으로 압축한 결과물이었다면, < Every letter I sent you. >는 추출 전 위 언급한 두 축을 기본으로 삼아 약간의 변주를 더해가던 성장의 과정을 거름망 없이 그대로 펼쳐 보인다. 곡 수가 많음에도 앨범 단위로 튀는 지점 없이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우주를 건너'부터 큰 고민 없이 반복하는 코드 진행과 단조로운 가사 내용은 개별 곡의 구분을 어렵게 한다. 짜임새는 준수하나 결정적 한 방이 없다.
'Can i b u'와 'Berlin' 같은 간결한 알앤비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배경 음악으로만 기능하고 'Bunny'와 같은 속도감 있는 트랙도 핵심을 찌르는 대신 겉을 맴돈다. 래퍼 루피(Loopy)가 프랭크 오션의 'Super rich kids'와 닮은 'Point'에서 목소리를 더해봐도 쉽사리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를 돌려 듣게 만드는 'Popo', 브릿팝의 영향이 짙은 '0310',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추억하는 연작 'Amy', 'True lover'에서 단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미 존재하는 결과물을 바탕으로 본인의 이름을 새겨 넣으려니 특별함을 만들기가 어렵다.
평범한 일상과 닮은 무던한 앨범이지만 역으로 이런 구성이 빛나는 몇 트랙에 더욱 환한 빛을 비춘다. 앨범 후반부 청량한 에너지의 'Square (2017)'가 선사하는 해방감은 이른 아침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볕처럼 밝다. 영어 가사 속 유일한 한글 노랫말의 '다툼' 역시 해석본을 펼칠 필요 없이 여린 감성을 확인할 수 있다. 더 많이 보여주고, 더 많이 들려주고 싶었던 아티스트의 열망과 달리 앨범은 몇몇 곡으로 각인된다. 덜어냄의 미덕이 필요한 부분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 수 있다. 글 서두의 표현대로 '습작'이라 하면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정규작'으로는 열렬한 반응에 비해 인상적인 결과물은 아니다. 수련의 기간을 통해 본인의 문법을 일부 확립했고 이것이 새로움을 찾는 젊은 음악 팬들의 굳건한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성과다. 동시에 과거 기록을 모두 소비한 후의 완연한 새 출발과 앨범 단위의 완성도를 고민하게 됐다. 이제 백예린이 부칠 편지의 주소지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