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테일러 스위프트 : 미스 아메리카나'
미국을 대표하는 팝스타를 딱 한 명만 대자면 테일러 스위프트다.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있지만 제36회 선댄스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테일러 스위프트 : 미스 아메리카나’ 제목처럼 ‘미스 아메리카나’ 호칭과 어울리는 슈퍼스타를 꼽긴 어렵다.
2005년 15살 소녀로 팝 시장에 데뷔한 이래 15년 동안 테일러는 컨트리 소녀에서 싱어송라이터로, 휘황찬란한 팝스타에서 다시금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피아노 앞에 앉으며 거대하고도 선명한 궤적을 그려왔다. 10개의 그래미 어워드 트로피, 4,200만 장의 실물 앨범 판매량과 1억 4천만 건 이상의 음원 판매량,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가장 오랜 기간 오른 여성 가수, 빌보드 선정 2010년대 최고로 성공한 여성 가수의 업적은 커리어를 요약하는 극히 일부의 기록일 뿐이다.
동시에 ‘미스 아메리카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슬픈 페르소나기도 하다. 스스로 곡을 쓰고 또래의 이야기를 전하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잠재력은 ‘컨트리 스타’라는 기성의 시선에 자주 무시받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테일러 스위프트는 리앤 라임스, 캐리 언더우드 이후 오래간만에 등장한 미국 출신 백인 컨트리 팝스타였다. 컨트리를 벗어나서도 미 언론 및 평단의 과한 주목은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성공과 동시에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부담과 악인의 이미지를 누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09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힙합 스타 카니예 웨스트가 테일러의 수상 과정에 난입했을 때도, 2012년 기타를 벗고 팝스타로의 도전을 선언한 정규 앨범 <레드(Red)>를 두고 정체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을 때도 테일러 스위프트는 본인이 원하는 음악을 하며 본인이 원치 않은 논쟁에 휩싸이는 불편한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2014년 정규 앨범 <1989>가 첫 주 128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팝스타로의 완벽한 성공을 거두자 그를 둘러싼 구설수는 더욱 커졌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대답은 언제나 정면 돌파였다. 남자 친구를 갈아치우고 광기에 휩싸여있다는 세간의 이미지에 대해 일일이 해명하고 논쟁을 피하는 대신 오히려 논란을 즐기는 듯 도발적인 언어로 심경을 고백했다. 컨트리의 고장 내슈빌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할 때도, 화려한 대도시 뉴욕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춤을 출 때도 그는 내면의 이야기를 숨기지 않았다.
한 때 사랑했던 싱어송라이터 존 메이어에게 보내는 ‘디어 존(Dear John)’의 강력한 메시지, 이에 한 술 더 떠 2014년 히트곡 ‘블랭크 스페이스(Blank Space)’ 속 ‘옛 애인들의 긴 목록 중 빈칸에 네 이름을 쓸 거야’라는 노랫말은 본인을 둘러싼 루머를 비틀어 활용하는 테일러의 경고였다.
화룡점정은 2017년의 앨범 <레퓨테이션(reputation)>이었다. 2016년 카니예 웨스트와 그의 아내 킴 카다시안이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아 전 미국인이 그를 ‘테일러 스네이크(Snake)’라 부르자, 그는 ‘룩 왓 유 메이드 미 두(Look What You Made Me Do)’ 뮤직비디오 속 세상이 부여한 자신의 페르소나들을 모두 총출동시켜 죽여버리는 초강수를 둔다. 하지만 그 지난한 공격, 비판과 응수의 과정 속 테일러는 지쳐갔다.
‘미스 아메리카나’는 <레퓨테이션> 이후 일곱 번째 정규 앨범 <러버(Lover)>를 준비하는 테일러 스위프트를 담는다. 20대의 끝자락에 놓인 테일러는 거듭된 이미지 변신에 피로를 호소한다. “여성 팝스타들은 남성 스타들보다 20번 이상 더 변신하고 재창조해야 한다. 새로워져라, 어려져라…”. 2013년 라디오 DJ 데이비드 뮬러로부터 당한 성폭력 사건을 고발한 2017년 소송은 대표적인 사건이었을 뿐, 데뷔 이래로 테일러는 팝 시장의 차별적인 시선과 대중의 조롱을 숨 돌릴 틈 없이 견뎌야 했다.
다큐멘터리 속 그는 고통받은 자아의 흔적을 숨기지 않는다. 파파라치에게 사진이 찍혀 ‘임신한 것 같다’는 대중의 반응에 거식증으로 고통받았던 경험, 어머니의 암 투병기를 담담히 고백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코 주눅 들지 않는다. 긴 시간 동안 공개를 꺼렸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하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하고, 성소수자를 지지하며 사회 속 성차별적인 시선을 응시한다. 타인이 팝스타의 시선에서 벗어나 본인의 시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미스 아메리카나’ 속 테일러 스위프트는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자아가 아닌 ‘인간 테일러 스위프트’의 마음을 본인의 언어로 고백한다. 이 기조는 <러버(Lover)>에 이어 올해 8월 기습 발매한 앨범 <포크로어(folklore)>로 연결되었다.
화려한 팝을 내려두고 다시금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잔잔하고 편안한 음악의 이야기집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소박하고 확실한 내면의 고백을 이뤄냈다. 코로나바이러스, 흑백 인종 갈등으로 신음하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잔잔한 앨범은 평단의 만장일치 호평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거대한 성공을 거뒀다. <포크로어>는 올해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7주 동안 정상에 오르며 2020년 최고로 성공한 앨범이 됐다.
그간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부여된 ‘미스 아메리카나’는 기성 미국 팝 시장, 컨트리 이미지를 바탕으로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성공을 안겨주었으나 동시에 대중과 관계자들의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작용했고 논란을 부추기며 개인의 삶을 파괴해왔다.
이제 <포크로어>와 ‘미스 아메리카나’로 과거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커리어의 시작을 알린 2020년의 테일러 스위프트는 새로운 ‘미스 아메리카나’로 팬들과 함께한다. 부딪치는 대신 끌어안고,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극복하는, 진정한 미국을 대표하는 팝스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