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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Oct 18. 2019

림킴은 더 큰 해방을 꿈꾼다

김예림의 새 이름, 잘 벼린 아시아 여성의 정체성



대중은 김예림을 목소리로 기억했다. 2011년 <슈퍼스타 K3>에서 혼성 듀오 투개월의 멤버로 등장한 김예림에게 심사위원 이승철은 ‘인어가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라는 평을 내렸다.


동시에 대중은 김예림의 목소리만을 기억했다. 회사는 <A Voice>와 <Her Voice>라는 제목으로 아티스트를 소개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혔다. 곧 ‘독특한 음색’은 김예림을 수식하는 거의 대부분이 됐다.

2016년 5월 미스틱과의 계약 만료 후 긴 침묵의 시간을 갖던 김예림은 올해 5월 림킴(Lim Kim)이라는 새 이름 아래 신곡 ‘살기(SAL-KI)’를 발표했다. 과거와의 단절, 새로운 시작의 수준이 아니었다. 칼 부딪치는 소리와 그르렁대는 베이스로 날카롭게 벼린 이 노래에서 림킴은 그의 상징과도 같던 목소리를 과감히 버렸다.


성난 가사를 하이 톤 랩으로 뱉어대며 과거의 자신을 파괴하는 모습은 분노의 선전포고였다. 오디션 출신 김예림이 자기 살해의 과정을 거쳐 목소리에의 종속을 풀고, 비로소 림킴 본인의 음악을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10월 15일 발표한 EP <제너레아시안(GENERASIAN)>은 여러 모로 독립적이다. 우선 앨범은 지난 7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tumblebug)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목표 금액 5천만 원을 훌쩍 넘겨 최종 모금액은 9천145만 원을 달성했고 후원자는 1986명에 달한다. 림킴은 텀블벅 페이지에서 유튜브 인터뷰와 긴 안내글을 통해 본인의 이야기와 앨범의 테마를 상세히 소개하며 ‘새로운 시도’를 강조했다.

림킴의 새로운 시도는 ‘동양 여성’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미국 유학 과정에서 자주 자각했던 동양 여성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서구의 편견을 전복하는 것이 아티스트의 목표다.


이는 앨범을 여는 ‘민족요(Enterance)’로 적극 구현되는데, 그 과정이 상당히 독창적이다. 림킴은 강렬한 내면 탐구의 현장을 긴 선창으로 ‘신세계’라 선언한 후 묵직한 비트 위 다채로운 국악기 소리를 얹은 다음, 판소리 합창단과 함께 한국 민속 신앙과 우리의 여러 민요로부터 가져온 가락을 힘차게 노래한다.

영적인 경험 이후 아시아 여성의 정체성과 그 언어가 다양한 형태로 전달된다. 정확히는 유교 문화권 동북아시아 여성과 이를 바라보는 서구의 스테레오타입을 전제로 한다.


‘호접몽’의 개념을 빌린 ‘Mong’과 마법(Magic)의 색다른 개념 ‘요술(Yo-Soul)’로 대중음악이 동양의 테마에 기대하는 신비로운 소리를 충족한다면, ‘아시아 여성들은 나처럼 노래하지 / 그들은 여왕처럼 노래한다네’라 선언하는 ‘Yellow’는 반항적이다. 이 노래의 지상 과제는 일본 교복, 조신함, 차분함 등으로 각인된 동양 여성의 고정관념을 공격적이고 거친 힙합 트랙으로 전복한다.

동시에 <제너레아시안>은 무국적을 지향한다. 림킴은 인터넷 시대 ‘디지털 유목민’을 유목 민족의 지도자 ‘칸’으로 격상하여 ‘디지털 칸(Digital Kahn)’이라 선포한다.


모든 문화와 종교, 젠더가 어지럽게 섞여 있는 디지털 시대에서 동양 여성의 정체성 강조는 결코 폐쇄적인 목적이 아니다. 서구 중심주의 사고방식 아래 통합된 지구촌 시대 속 본인을 분명히 하고, 주류의 시각에 다양화를 추가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 전략이다. 진부한 표현일 수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의 현대적이고도 독립적인 변용이다.



‘업계는 여전히 이런 시도를 통한 작업물에 대해 낯설어했다’는 림킴의 고백대로 <제너레아시안>은 가요계에 흔치 않은 작품이다. 우리의 민속 음악부터 실험적인 테크노, 힙합을 자유로운 멜로디로 섞어냈다. 김예림의 나긋한 목소리와 림킴의 날카로운 랩은 아예 다른 사람의 작품처럼 들린다. 낯선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을 넘어 세계로 눈을 돌리면 아시아 여성 뮤지션들의 약진은 익숙한 흐름이자 신선한 새 발견의 대세로 자리를 굳힌 모습이다. 페기 구(Peggy Gou), 예지(Yaeji), 박혜진 등 한국 여성 DJ들의 선전에 해외 음악 팬들은 케이 하우스(K-House)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만들었다. 한국계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 필리핀계 제이 솜(Jay Som), 일본계 미츠키(Mitski) 등도 분명한 정체성과 훌륭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림킴은 수많은 아시아 여성 뮤지션들의 발화에 분노와 전통의 언어를 더하며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비록 <제너레아시안>의 음악 세계는 스리랑카 출신 영국 가수 엠아이에이(M.I.A)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동북아시아 여성의 정체성을 당당히 표현하며 편견에 맞섰다는 점에서 분명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통해 주류 미디어로부터 독립적인 길을 선택하고 완전히 다른 성격의 실험적 세계를 탐구해나가는 모습 역시 인상적이다. 유교 문화권 하의 억압적인 젠더 구조, 가부장제 사회 속 고통받는 한국 여성들에게 림킴의 행보와 음악은 거대한 카타르시스로 다가온다. 긴 시간 끝에 자신을 해방한 림킴은 이제 더 큰 해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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