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간호사 성적 대상화, 케이팝의 안이한 의식
걸그룹 블랙핑크의 신곡 ‘러브식 걸즈(Lovesick Girls)’ 뮤직비디오가 논란이다. 지난 2일 공개된 뮤직비디오 속 ‘내가 사랑에 아파할 땐 어떤 의사도 도움을 주지 못해(No doctor could help when I’m lovesick)’라 노래하는 장면이 문제가 됐다. 이 장면에서 제니는 몸에 딱 붙는 치마와 1990년대 사라진 헤어캡, 붉은 하이힐의 간호사 복장을 하고 간호사와 의사 1인 2역을 연기했다.
‘러브식 걸즈’의 뮤직비디오는 공개 후 3일 만에 1억 조회수를 돌파하며 화제를 모았으나 제니의 간호사 복장에 대해 성적 대상화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10월 5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하 보건의료노조)이 논평을 통해 이 문제를 “명백한 성적 대상화”라 지적하며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보건의료노조는 뮤직비디오 속 장면에 대해 “‘코스튬’이라는 변명 아래 기존의 전형적인 성적 코드를 그대로 답습한 복장과 연출”이라 비판했다.
논란이 커지자 블랙핑크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는 6일 입장을 내고 “특정한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왜곡된 시선이 쏟아지는 것에 우려를 표합니다.”라 밝혔다. “뮤직비디오도 하나의 독립 예술 장르로 바라봐주시길 부탁드리며, 각 장면들은 음악을 표현한 것 이상 어떤 의도도 없었음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라 덧붙였다. 더불어 “해당 장면의 편집과 관련해 깊이 고민하고 논의 중”이라고도 밝혔다.
이에 대한간호협회가 블랙핑크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에 재시정을 촉구했다. 대한간호협회는 6일 YG엔터테인먼트의 입장에 대해 “가사 맥락과 상관없는 선정적인 간호사 복장을 뮤직 비디오에 등장시킨 것은 예술 장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간호사 성적 대상화 풍조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며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YG엔터테인먼트는 오늘 '러브식 걸즈' 뮤직비디오 중간 간호사 유니폼이 나오는 장면을 모두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빠른 시간 내로 영상을 교체할 예정"이라 밝혔다.
‘러브식 걸즈’의 장면 속 제니의 의상은 대중문화 속 간호사의 성적 코드를 답습하여 연출하고 있다. 몸에 딱 붙는 하얀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으며 근무하는 간호사는 없다. 제니가 쓰고 나온 간호사 캡 역시 1990년대 이후 근무 시 불편함으로 인해 빠르게 사라졌다.
대중문화에 만연한 간호사 성적 대상화는 대중에게 의료서비스와 공공보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러브식 걸즈’ 논란 후 등장한 SNS 해시태그처럼 간호사는 전문직이다(#nurse_is_profession). 성적인 메타포 아래 전문 의료인, 보건의료노동자적 성격은 무시되고 당사자들에게는 직업적 박탈감을 안긴다.
낮은 인식은 성추행과 성폭행, 폭행과 폭언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보건의료노조의 ‘2019년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에 의하면 간호사 중 14.5%가 직장에서 근무 중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폭행 피해의 경험도 간호사가 16.2%로 가장 높았다.
케이팝에서 간호사를 성적 대상화한 복장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콘셉트였다. 2008년 이효리는 3집 타이틀곡 ‘유고걸(U-Go-Girl)’ 뮤직비디오 예고 영상 속 간호사 복장을 입고 등장했는데, 당시 대한간호협회가 “간호사의 이미지를 훼손했다”며 항의하자 17일 본편에서는 해당 장면을 삭제했다. 2016년 걸그룹 마마무도 ‘리더스코스메틱’ 광고에서 간호사 복장을 입었고, 같은 해 걸그룹 브레이브걸스도 ‘하이힐’ 뮤직비디오에서 간호사 코스튬을 입고 등장했다.
이외에도 많은 간호사 성적 대상화가 있었으나 이효리와 블랙핑크처럼 문제제기가 이뤄진 경우는 드물었다. 과거부터 대한간호협회가 꾸준히 간호사를 성적으로 그리는 방송에 항의를 보내고, 매년 핼러윈데이마다 간호사 코스튬에 대한 성적 대상화 논란이 제기됨에도 사회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설사 논쟁이 되더라도 대다수는 YG엔터테인먼트의 해명처럼 ‘예술 장르’라는 이름 아래 큰 고민 없이 여러 문화 속 고정관념을 가져와 활용한 후 문제가 되면 ‘의도가 아니었다’며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2015년에도 YG엔터테인먼트는 소속 그룹 위너 멤버 송민호의 가사로 인해 대한산부인과의사회로부터 항의 성명을 받고 사과 공문을 보냈다. 당시 송민호는 Mnet ‘쇼미더머니4’ 방송에 출연해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랩을 했는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측은 “이 내용을 듣는 여성들은 성적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이 방송을 시청한 10대 청소년들에게는 잘못된 성적 가치관 및 산부인과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 비판했다.
이때도 YG엔터테인먼트의 해명에는 “모욕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라는 부분이 있었다. 5년 전의 반성과 현재의 해명 모두 논란을 불러온 안이한 의식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한 이들이 오히려 문제를 키웠다는 인상을 준다. ‘러브식 걸즈’의 경우 보건의료노조 및 대한간호협회의 직접적인 비판이 있었음에도 ‘왜곡’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블랙핑크의 인기는 국제적이다. ‘러브식 걸즈’가 수록된 <더 앨범(The Album)>은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의 글로벌 차트 역사상 최고의 성과를 거둔 여성 그룹의 작품이 됐고 미국 애플 뮤직(Apple Music)에서도 10위에 진입했다. ‘러브식 걸즈’는 전 세계 57개국 아이튠즈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하지만 인기와 별개로 글로벌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케이팝 전반에 드리워진 안이한 기획 및 차별의식은 지속적인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성적 대상화는 물론 2020년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문화적 전유와도 맞닿아있는 문제다.
2020년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정한 '세계 간호사의 해'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사태로 간호사들은 인력 부족 및 열악한 환경 속에서 번아웃에 시달리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오늘 YG가 공식입장에서 밝힌 것처럼, 케이팝 시장은 이번 사건을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깊이 깨닫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