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걸스와 함께한 군생활, 기적같은 역주행을 바라보며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그룹은 브레이브걸스다. 2017년 곡 ‘롤린(Rollin’)’이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지니, 벅스의 음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더니 11일에는 국내 최다 사용자를 보유한 멜론의 ‘24히츠(24Hits)’ 차트에서도 아이유의 ‘셀레브리티(Celebrity)’를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2011년 ‘아나요’로 데뷔 후 1기를 정리, 2016년부터 7인조 2기로 활동을 시작해 현재 민영, 유정, 은지, 유나 4인조가 된 브레이브걸스는 지난 10년 간 주목받지 못하다 드디어 인기의 중심에 섰다.
‘롤린’의 역주행을 이끈 것은 국방TV ‘위문열차’ 프로그램과 유튜버 ‘비디터’가 업로드한 ‘브레이브걸스_롤린_댓글모음’ 영상이었다. 이미 브레이브걸스는 2017년부터 전후방 가리지 않고 전국 군부대를 돌며 위문 공연을 펼친 ‘군통령’으로 군인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았다. 스케줄 없는 무명의 그들에게 위문 공연은 유일한 스케줄이었다. 육해공 3군을 통일한 그들의 열정적인 무대를 교차 편집한 영상은 3월 12일 현재 738만회 조회수를 넘겼다. 당시 군복무 중이었던 입장에서 ‘롤린’의 역주행을 바라본다.
아, 제대 후에도 ‘롤린’을 듣게 되다니… ‘브레이브걸스_롤린_댓글 모음’ 영상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대 앞으로 돌진하는, 앞자리에 오지 못해도 모든 안무를 숙지한 채로 열광적으로 춤을 추는 군인들의 모습. 운이 좋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4년 전 ‘롤린’이 나왔을 때 나는 군인이었고, 교차 편집된 ‘위문열차’ 영상은 앞이 보이지 않던 군 생활 중 수차례 돌려봤던 영상들이었다.
당시 ‘롤린’의 인기를 설명하기 위해 ‘댓글 모음’ 영상에 유튜버 ‘마초맨’이 단 댓글을 옮겨온다.
아침에 듣고 보고, 밥 먹고 듣고 보고,
일과 끝나고 듣고 보고,
자기 전에 듣고 보고, 선임이 시켜서 춤도 춰보고…
과장 좀 보태서 ‘롤린’은 ‘복무신조’처럼 반드시 알아야 하는 곡이었다. 선후임 상관없이 ‘롤린’의 한 구절만 들려도 모두가 앞다투어 의자 위로 올라가기 바빴다. 샤워할 때도 생활관에서 '롤린'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밥 먹을 때도 '롤린'이 나왔다. ‘의자춤’과 ‘가오리 춤’은 반드시 외워야 할 동작이 됐다. 어디서나 춤 추기도 좋았고 따라 부르기도 쉬웠다. ‘꼬북좌’ 유정이 ‘아닌 척하지 마요’ 파트에서 웃음 지을 때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롤린’이 나온 2017년 3월 7일 나는 상병이었다. 당시 군대에서 인기있는 걸그룹은 블랙핑크, 마마무, 레드벨벳, 트와이스 등. 라붐, 소나무, 오마이걸, EXID, 러블리즈 등 그룹도 든든한 마니아들에게 사랑받았다. '우주를 줄게'로 등장한 볼빨간사춘기도 인기가 많았다. 브레이브걸스는 생소한 그룹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완전한 무명은 아니었다. 매일 아침마다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던 SBS MTV 채널에서 나온 ‘하이힐’만큼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치어리더 복장과 하이힐을 신고 콩콩 춤을 추던 브레이브걸스의 퍼포먼스는 군인들의 주목을 사기에 충분했다. ‘롤린’ 전에도 브레이브걸스는 ‘위문열차’ 공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팀이었다. 2016년부터 2기 멤버 7명으로 새 활동을 시작한 브레이브걸스는 ‘위문열차’에 출연해 열심히 ‘하이힐’을 췄다. 그리고 이듬해 ‘롤린’이 나왔다.
지금도 우연히 음악방송에서 봤던 ‘롤린’의 첫 무대를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다섯 명이었던 브레이브걸스 멤버들은 의자를 활용해 ‘하이힐’과 다른 성숙한 콘셉트를 선보였다. 의자 위에 올라가 춤을 추고 걸터앉아 매혹의 눈빛을 보내던 그들. 하지만 처음부터 ‘댓글모음’ 영상처럼 열광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는 요소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뱀파이어 콘셉트의 검고 붉은 의상과 달리 곡은 신나는 노래였다. 지금은 ‘의자춤’, ’가오리춤’이라 이름 붙여진 춤 동작도 당시에는 생소했다. ‘홀린 듯 I’m Fall In Love But 너무 쪽팔림에’ 같은 가사도 튀는 지점이었다. 물론 그 와중 ‘꼬북좌’ 유정의 미소는 매혹적이었지만. 일단 비범한(?) 곡이긴 해도 모두가 춤을 따라 출 정도로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 ‘생소함’이 ‘롤린’의 첫인상이었다.
이처럼 한 번 듣고 말 것 같았던 ‘롤린’이 어느새 ‘하루가 멀다 하고’ 부대 어디서나 들려왔다. 국방홍보원 홈페이지 다시 보기, 막사 곳곳에 설치된 TV에서 국방 TV 채널로 ‘위문열차’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하이힐’로 다져진 인지도와 마니아 팬들, 육해공 가리지 않고 어디든 달려가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이던 브레이브걸스 삼박자가 점차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어느새 누군가가 ‘온통 너의 생각뿐야’를 선창 하면 ‘나도 미치겠어’가 따라 나왔다.
‘롤린’ 역주행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5년 전 나온 곡이 지금도 군인들 사이에서 ‘인수인계’되어 ‘밀 보드 차트 (밀리터리 + 빌보드 차트의 합성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에서는 ‘숨겨진 명곡’ 정도로 어느 정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무명에 가까웠는데, 브레이브걸스는 2018년부터 올해까지 꾸준히 ‘위문열차’에 출연해 장병 앞에서 ‘롤린’ 무대를 펼쳤다. ‘댓글 모음’ 영상의 부흥을 이끈 핵심 요소에는 충성스러운 ‘리얼 아미’들의 결집과 간증(?)이 있다.
어떤 요소가 ‘롤린’을 군대의 스테디셀러 노래로 만든 걸까. 선정적인 춤, 걸그룹에 대한 충성으로 쉽게 해석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선정성만 놓고 보면 ‘하이힐’이 더 아슬아슬했고,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걸그룹이 ‘위문열차’에 출연했다.
그것보다는 모두가 함께 즐기고 놀 수 있는 일종의 ‘응원가’에 가까운 곡이었다는 생각이다. 레드벨벳, 트와이스, 블랙핑크 등 그룹이 고고한 인기의 그룹이었다면 브레이브걸스는 ‘롤린’과 함께 언제 어디에나 있는 그룹이었다. ‘위문열차’에 자주 나왔고, 따라 부르기도 쉬웠고, 의자만 있으면 춤 추기도 어렵지 않았다.
이런 ‘쉬운 춤’은 복잡한 ‘안무’와 분명히 구분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역대 ‘군통령’의 지위를 누린 원더걸스의 ‘Tell me’, 소녀시대의 ‘Gee’, 크레용팝의 ‘빠빠빠’, EXID의 ‘위아래’의 공통점은 장소 구분 없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안무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롤린’은 일종의 놀이 문화였다. 그리고 이제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모두의 놀이 문화이자 새로운 히트곡으로 지위를 굳히고 있다.
이제 브레이브걸스는 톱스타다. ‘위문열차’가 하루의 유일한 스케줄이었던 그들은 쏟아지는 섭외 요청과 인터뷰, 음악방송, 라디오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대중의 반응도 폭발적이다. ‘꼬북좌’ 유정에 이어 민영에게는 ‘메보좌’, 유나에게는 ‘단발좌’, 은지에게는 ‘왕눈좌’ 등 별명까지 얻었고, 주요 음원 차트 정상을 석권했다. ‘댓글 모음’ 영상 하루 전까지 해체를 논의했던 팀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반전 드라마다.
돌아보니 전역날을 바라보던 군 시절 우리들은 좀처럼 뜨지 못하는 브레이브걸스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 그 시간을 준비하는 방법은 그저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고, '롤린'같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넘치는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무대를 위해 환히 웃음 짓고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브레이브걸스에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이 고진감래(苦盡甘來) 서사에 모두가 열광하는 것은 멤버들의 땀과 눈물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있다고 본다. 브레이브걸스는 힘든 시기를 끈질기게 버텼고, “노력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다면 지금 이런 기회가 와도 못 잡았을 것 같다.”(유정)는 말처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해도 성공의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최소한 훗날 당당하게 노력했노라 이야기할 수 있는 든든한 보험이 되어준다. 그리고 대개 행운은 준비된 자가 거머쥔다.
편법, 부정, 쉬운 길의 유혹에 자꾸만 흔들리는 민간인이 된 지금, '롤린'의 역주행은 불안한 마음과 힘든 하루 속에도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던 군 시절의 낡은 순수함을 다시금 들춰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