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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Mar 22. 2021

로컬 시상식 그래미를 놓아주자

매년 그래미 어워드를 준비하지만, 올해는...

 


매년 그래미 어워드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여러 가지를 준비한다. 최근 시상식 경향부터 후보에 오른 아티스트들과 결과물을 분석해서 글을 쓰고 말도 한다. 음악 관계자들과 팬들, 특히 팝음악을 많이 듣는 이들에게 그래미는 오래도록 최고의 시상식이었다.


물론 준비를 많이 해도 주목받는 경우는 드물다. 국내에서 그래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크지 않았다. 몇몇 소식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골든 글로브 시상식만큼 주목받는 시상식,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시상식은 아니었다.


올해는 달랐다. 그래미에 대해 이렇게 많이 이야기한 때가 없었다. 후보 선정부터 수상 예측, 주요 일정 같은 기본 진행부터 거시적인 시각까지 많은 이야깃거리가 등장했고 기사가 쏟아졌다.


원인은 당연히 방탄소년단이다. 2020년의 히트곡 ‘Dynamite’가 베스트 팝/듀오 그룹 퍼포먼스 부문에 후보로 오르며 한국 대중가수 최초의 그래미 노미네이트 업적을 세웠다. 게다가 그래미 무대에서 단독 공연을 펼치는 최초의 한국 가수가 됐다. 지난해 11월 후보 발표부터 15일 제63회 그래미 어워드 현장 및 결과까지 ‘남의 잔치’였던 그래미가 ‘우리 가수’의 등장으로 커다란 이벤트가 됐다.



반대로 그래미를 운영하는 레코딩 아카데미와 중계 방송사 CBS 입장에서는 올해만큼 처참한 해가 없다. 올해 미국 내 그래미 시청률은 2.1%, 평균 880만 명 시청자를 끌어모으는 데 그쳤다. 역사상 최저 시청률이다. 온라인 스트리밍을 포함해도 92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5.4% 시청률과 평균 1,870만 명 시청자를 동원했던 지난해 시상식과 비교해 반 이상 감소한 수치다. 코로나19로 미국 TV 시청률이 높아진 상황이라 더 타격이다.


물론 690만 명 시청자에 그친 2월 28일 골든글러브 어워드, 그보다도 낮은 610만 명 시청자를 동원한 지난해 9월의 에미 어워드와 비교하면 그래미는 여전히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시상식’이다. TV 지표와 반대로 SNS 상에서의 언급은 오히려 늘었으며 인터넷 시청률도 크게 증가했다. 시상식 다음날 애플 아이튠즈 차트 상위권에 그래미 무대를 빛낸 이들의 노래가 대거 등장하며 어느 정도 영향력도 건재함을 증명했다.


“콘텐츠 소비 습관이 달라진 요즘 시대 시청률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래미 책임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 벤 윈스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문제는 지금의 최저점에서 우상향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청률뿐 아니라 그래미는 오랜 기간 신뢰를 놓쳤고 권위를 상실했다. 시대가 변했고 비평의 가치가 흔들린다는 핑계도 댈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래미와 레코딩 아카데미의 문제다. 플랫폼 변화 및 온라인 시청자 증가 착시 아래에는 시상식에 대한 축적된 반감과 무관심이 있다.



최근 그래미는 오랜 역사로 다져진 대중음악계 최고의 권위를 스스로 해체했다. 마니아와 전문가 모두 의아해하는 결과가 계속됐고 기준은   달라졌다. 내부 부패부터 '비밀 위원회'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마땅히 언급되어야  아티스트와 작품들을 여성, 흑인, 아시아계, 신인, 힙합, 소수 장르라는 이유로 외면했다.


최근 10 년만 돌아봐도 카니예 웨스트, 비욘세, 켄드릭 라마   획을 그은 아티스트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나마 비욘세는 올해 트로피를 추가하며 28번이나 그래미상을 수상한 최초의 솔로 가수가 됐지만 명작으로 손꼽히는 < Beyonce > < Formation > 때는 무관에 그쳤다.


2020년을 지배한 위켄드(The Weeknd)에게 단 하나의 노미네이트도 허락하지 않은 올해는 그 절정이었다.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52주나 머무른 히트곡 ‘Blinding lights’와 평단의 호평을 받은 < After Hours >를 모두 외면했다. 위켄드는 “그래미가 부패했다”라며 울분을 토했고 원 디렉션 출신의 제인 말리크는 “뇌물을 주지 않으면 후보로 오를 수 없는 시상식”이라며 불신을 표했다. 저스틴 비버, 드레이크, 제인 말리크 등 많은 스타들은 아예 보이콧을 선언했다.


부정적 기류를 의식한 듯 ‘올해의 노래’ 부문에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 시위를 노래한 허(H.E.R)의 ‘I Can’t Breathe’, 신인 부문에 래퍼 메간 더 스탤리온을 선정했지만 결국 마지막 ‘올해의 레코드’ 역시 지난해 본상 4개 부문(레코드, 노래, 앨범, 신인)을 싹쓸이한 신예 빌리 아일리시의 것이었다. 납득하기 힘든 과정을 공개한 후 수습을 위해 변화를 강변하는, 그럼에도 결국 최후의 순간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 요즘 그래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방탄소년단의 수상 불발에 대한 해외의 비판적인 반응도 이와 연결된다. 국내에서는 세계적인 시상식에 후보로 올랐다는 것 자체를 영예로 여기고 결과에 덤덤한 반면 오히려 해외 팬들이 BTS의 수상 실패에 더 분노하고 있다. 레코딩 아카데미가 시청률과 홍보 효과를 위해 방탄소년단을 이용하면서 정당한 기회를 부여하지 않고 가치를 축소한다는 목소리다.


사실 최근 방탄소년단이 보여온 성적에 비하면 그래미가 방탄소년단을 홀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꾸준히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리고 월드 투어에서 거대한 수익을 올렸지만 그래미와는 인연이 없었다.


2020년 두 장의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앨범과 싱글 차트 1위 세 곡,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백만 달러 이상 수익을 올린 온라인 콘서트 등 거대한 성적을 냈음에도 그들에게 허락된 자리는 ‘베스트 팝 듀오 / 그룹 퍼포먼스’ 하나뿐이었다. 2012년 신설된 데다 보이 그룹에게 단 하나의 트로피도 허락하지 않은 부문이다.


갖은 논란에도 그래미가 온라인 시청자 및 SNS 상에서의 관심을 끄는 것 역시 사실상 방탄소년단의 공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미 중계 전부터 방탄소년단 팬덤 아미(ARMY)는 ‘셋더나잇올라잇BTS(#SetTheNightAllrightBTS)’, ‘라이트잇업포BTS(#LightItUpForBTS)’ 등 해시태그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래미를 홍보했다.


그러나 그래미는 방탄소년단에게 본 행사 전 열린 사전 행사 ‘그래미 프리미어 세레모니’에서 결과를 발표한 후 시상식 내내 '곧 BTS가 나온다'는 광고를 송출했다. 긴 기다림 끝에 본 시상식 가장 마지막에야 ‘Dynamite’ 무대를 배치했다. 마지못해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리파이너리29(Refinery29)가 '그래미가 BTS를 눈요기로 사용했다'는 비판 기사를 낼 정도니 말 다했다.



그래미의 권위가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다. 부침은 있을지라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시상식이며 음악인들이 꿈꾸는 마지막 단계다. 미국 내 코로나19로 힘겨워하는 로컬 공연장들을 조명하고 세상을 떠난 거장들에 대한 추모 퍼포먼스는 6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그래미만이 꾸릴 수 있는 무대다.


나 역시도 ‘그래미 노미네이트의 의미’를 묻는 매체의 질문에 ‘후보 등록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는 대답을 해왔다. ‘그래미는 그래미다’라는, 음악 팬이라면 어쩔 수 없는 고정관념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쇠퇴하는 시상식, 근본적인 변화 없이 수습만 반복하는 시상식, 1년 전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로컬 시상식’에 우리가 너무 큰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포브스(Forbes)의 브라이언 롤리 (Bryan Rolli)가 쓴 글처럼 방탄소년단을 무시하면 이제 그래미가 손해인데 말이다.


보수적인 레코딩 아카데미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인종차별적인 서구 백인 사회에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누구나 BTS의 성공을 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미국 대중음악의 바로미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매년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이젠 정말 그래미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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