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백서가 된 에릭 클랩튼을 조명한 롤링 스톤 기사 번역
에릭 클랩튼은 코로나19 팬데믹과 백신 접종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백신 접종 반대 운동을 지지하며 노래를 발표하고, 백신 접종 유무를 확인하는 공연장에서 무대를 갖지 않겠노라 선언했습니다. 최근 한 유튜브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제약회사들에게 속아 백신을 접종하였으며, 백신 접종은 '집단 최면 형성 이론'의 결과라 비판했습니다.
10월 10일 <롤링 스톤>의 특집 기사는 에릭 클랩튼이 백신 반대자들을 격려하는 것을 넘어 자금을 대고 있으며, 로큰롤의 저항 정신이라는 명목 아래 방종을 저질러 왔음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해당 기사를 번역했습니다.
캠벨 맥러글린은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COVID-19 팬데믹과 백신에 반대하는 캠벨은 27세 청년으로, 공공장소에서 '독성 백신을 팔에 주입할지도 몰라'라는 가사를 노래하는 영국 음악가들의 모임 Jam for Freedom의 설립자다. 그들의 '자유'를 위한 공연은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고, 캠벨은 한 쇼에서 스스로 체포된 적도 있노라 밝혔다.
지난봄 Jam for Freedom 멤버들의 장비를 운송하던 자동차가 사고로 쓸 수 없게 망가졌다. 캠벨은 경비, 벌금 등을 충당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GoFundMe에 모금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캠벨은 충격을 받았다. 에릭 클랩튼이 자신에게 1,000파운드를 기부한 것이다.
"오, 음, 이건 가짜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캠벨이 기부금과 함께 기재된 계정에 메일을 보내자, 76세의 기타 히어로는 즉각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에릭 클랩튼이야. 아주 잘하고 있어.".
둘은 전화를 나눴고, 에릭 클랩튼은 Jam for Freedom을 위해 하얀 6인승 폭스바겐 트랜스포터 밴을 임시로 빌려줬을 뿐 아니라 새로운 차량 구입을 위해 거액의 돈을 주었다 (캠벨은 거절했다고 말한다.). 게다가 언젠가 Jam for Freedom에 합류할 수도 있다는 말도 남겼다. 에릭 클랩튼의 도움으로 Jam for Freedom은 이제 영국 전역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퍼트릴 수 있다.
과거 클랩튼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것을 꺼렸다. 1968년 그는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행동이 신문 어딘가에 실리게 되면 사람들은 그걸 보고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바꿔야겠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틀렸어요. 전 음악가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제 음악을 좋아해 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들이 제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필요는 없죠."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클랩튼은 백신 회의론자로 변했다. 앤서니 파우치 박사가 "바이러스를 타인에게 퍼트리는 매개체가 되도록 허락하는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클랩튼은 팬데믹 상황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라이브 음악은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 말했고, 밴 모리슨과 함께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위해 세 곡을 노래했다. 또한 클랩튼은 친구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통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을 '실패한 경험'이라 부르며 그가 겪은 고통을 상세히 기술했다.
최근 급증하는 코로나19 확진율과 사망률에도 불구하고 에릭 클랩튼은 백신 접종 증명을 할 필요가 없는 장소부터 미국 투어를 시작했다. 섹스, 마약, 로큰롤 라이프스타일을 받아들였던 이 1960년대의 아이콘은 보수적인 전문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그는 최근 악명 높은 낙태법과 투표권 제한으로 비판받는 주지사 그렉 애보트와 백스테이지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악한 주지사와 클랩튼의 모습은 몇몇 이들에게 심각한 충격을 안겼다.
방금 에릭 클랩튼 노래를 모두 지웠어.
기타 좀 더 잘 치는 키드 록(Kid Rock)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네. 끝이야.
- 그렉 애보트 트위터에 달린 댓글 -
에릭 클랩튼은 커리어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최근 활동 과정에서 그의 명성과 헌신적인 팬들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1970년대 클랩튼의 음반사 RSO를 운영했던 빌 오크스는 "그가 나쁜 반응을 보였다면, 그건 나쁜 일인 거겠죠."라며 덧붙인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요. 많은 어린 <롤링 스톤> 구독자들이 에릭 클랩튼에 대해 읽게 되는 첫 번째 기사가 이런 내용이라니 유감입니다. 에릭은 분명 위대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이것이 그가 노년기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방법이겠죠.". (에릭 클랩튼은 이 기사에 대해 코멘트하기를 거부했다.)
최근에는 클랩튼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의아함을 갖고 있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동료 음악가들조차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퀸의 브라이언 메이는 클랩튼과 같은 백신 회의론자들을 '이상한 놈들'이라 부른 바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클랩튼과 함께 일한 사람들, 음악계 인사들 역시 <롤링 스톤>에 클랩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거부했다. 한 저명한 동료 음악가의 매니저는 '이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라 대답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블루스와 레게를 주류 문화에 도입한, 엄청난 기타 연주를 선보인 에릭 클랩튼의 업적을 칭송했다. 1960년대 어떤 이가 런던 지하철 역에 '클랩튼은 신이다'라 스프레이로 써갈긴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지금도 네 살 난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이로부터 탄생한 노래 'Tears In Heaven'의 감동적인 카타르시스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논란은 클랩튼의 과거에 대한 재평가로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그의 경력 초기 인종차별적인 발언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감탄과 공감에서 어리둥절함과 배신감을 갖게 된 걸까?
1976년 여름, 데이브 웨이클링은 클랩튼을 안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선구적인 스카 밴드 중 하나인 잉글리시 비트(English Beat, The Beat)를 만든 웨이클링은 그 해 스무 살이었고, 클랩튼의 열렬한 팬이었다. 버밍엄에 살 때는 집에서 런던까지 히치하이킹으로 에릭 클랩튼의 블라인드 페이스 인 하이드 파크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76년 8월 버밍엄의 오데온 극장에서 에릭 클랩튼을 만난 웨이클링은 당혹스러웠다. 대부분의 로커들과 달리 베트남 전쟁과 같은 주제를 언급하지 않던 클랩튼은 술에 취해 이민 정책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콘서트는 촬영도 녹음도 되지 않았지만, 웨이클링의 기억과 당시 공연장에 있었던 익명의 제보자들에 의하면 클랩튼은 무대 위에서 불쾌하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면 10년 내로 영국은 식민지가 될 것이라 말했고, '외국인들'이 영국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일장 연설했다. 'Wogs(피부 검은 비백인을 일컫는 속어)들을 쫓아내라, 쿤(Coon)들을 쫓아내자...".
"엥... 그냥 이거 장난치는 거지?" 웨이클링이 당시를 회상한다. "곧 장난이 아니라는 게 명백해졌죠. 그 외침이 군중들 사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에릭 클랩튼의 말을 따라 하기 시작했죠. 콘서트가 끝나고 로비에서 소리 지르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져갔어요...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 개자식'."
이후 에릭 클랩튼이 저명한 반이민주 의자 극우 정치가 에녹 파월을 지지하자 웨이클링은 더욱 기분이 상했다. 에녹은 1968년 웨이클링이 살던 버밍엄에서 악명 높은 국수주의 연설 '피의 강'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웨이클링은 버밍엄 각지 공장에서 백인 노동자들과 흑인 노동자들이 함께 어울려 일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고 통합되어가고 있음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날 버밍엄의 오데온 극장에는 에릭 클랩튼의 레게와 블루스에 푹 빠져 있던 작가 카릴 필립스도 있었다. 세인트 키츠 섬에서 이주해 영국으로 건너와 현재 영미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작가가 된 카릴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에릭 클랩튼을 저와 같은 크로스오버 인물이라 생각했죠. 저는 백인 음악을 좋아하는 흑인이었고, 클랩튼은 흑인 음악을 좋아하는 백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데온 극장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카릴도 에릭 클랩튼의 장황한 연설에 놀랐다. "클랩튼은 외국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더니 두 세 곡을 더 연주했어요. 술에 취하긴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노래도 불렀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오데온 극장에서 에릭 클랩튼은 유일하게 그런 발언을 하지 않을 인물처럼 보였는데 말이죠. 모든 시선이 제게 쏠리는 걸 느꼈어요."
클랩튼의 발언은 밴드 동료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당시 클랩튼의 밴드 멤버였던 조지 테리는 "에릭의 발언은 정말 놀라웠다."라고 회상한다. "에릭은 콘서트에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모두가 믿었거든요.".
그때까지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 흑인 문화와의 연관성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였다. 영국 서리(Surrey)에서 태어나 할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10대 시절부터 기타로 블루스를 연주했다. 야드버즈, 존 메이올과 블루스브레이커스, 크림으로 이어지는 활동에서 그는 머디 워터스, 지미 리드와 같은 블루스 기타 거장들의 음악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았다. 클랩튼의 커버 곡들은 원작자들에게도 수익을 챙겨 주었다.
"에릭은 제대로 기타를 쳤죠.". 1960년대 클랩튼을 처음 만나 수없이 어울렸던 시카고 블루스의 전설 버디 가이가 말한다. "어떤 사람이 기타를 잘 친다면 저는 그 사람을 크다거나, 뚱뚱하다거나, 키가 크다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에릭 클랩튼은 그때 선을 잘 지켰던 것 같아요. 영국인들은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블루스를 유행시켰죠. 제가 에릭만큼의 명성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에릭 클랩튼은 지미 헨드릭스의 테크닉에 경외심을 느꼈고 그의 사망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1968년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클랩튼은 헨드릭스를 당대 유행하던 경멸적인 용어로 언급했다. 어쩌면 이는 그가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데서 더욱 심각한 발언일 수도 있다. "지미 헨드릭스가 처음 영국에 왔을 당시 영국 사람들은 흑인에 대해 관심이 많았죠. 마법 같고, 섹슈얼하잖아요. 모두가 지미 헨드릭스와 그의 동생 레온 헨드릭스의 크기를 궁금해했어요. 그들은 최대한 그걸 활용했고요. 제길, 모두가 속았어요.".
클랩튼은 헤로인과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한 뒤 안티가 섬에 약물 및 알코올 중독 치료 센터 '크로스로드 센터'를 오픈했고, 1991년 아들을 잃는 사고까지 당하며 <롤링 스톤>을 포함한 언론에서 대체로 동정적인 인물이 되었다. <롤링 스톤>은 1968년 이후 8차례에 걸쳐 클랩튼을 표지 모델로 선정했다. 2015년까지만 해도 그는 롤링 스톤의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인 목록에서 2위에 올랐다. 버밍엄에서의 사건에 대해 어떤 영국 작가는 "클랩튼의 취약한 정직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줄 뿐"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콘서트 직후 클랩튼의 발언에 대한 출판 보고서 사본을 보여준 아지프로 작가이자 연기자인 레드 손더스는 "완전히 충격받았다"라고 말한다. "에녹 파월은 이 나라에서 토템처럼 숭배받는 인물이에요. 1960년대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와 다를 바 없는 양반이에요. 에녹은 보수적이고, 구질서를 열변하는 영국 제국주의자라고요.". 에녹 파월의 사상을 지지하는 클랩튼의 모습은 손더스로 하여금 NME에 편지를 부치도록 자극했다.
"에릭, 무슨 일이야? 뇌가 망가진 거 아냐? 네 음악의 반 이상이 흑인 음악이야. 넌 록 음악의 가장 거대한 개척자라고. 대단한 음악가지만, 블루스와 알앤비 없이 무얼 이룰 수 있었겠어?"
손더스의 편지는 약 5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를 외친 Rock Against Racism 페스티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손더스는 피트 타운센드가 1979년 여름 Rock Against Racism 페스티벌에 클랩튼을 데리고 올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손더스는 클랩튼이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클랩튼은 페스티벌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클랩튼을 알고 있었고 그와 함께 일했던 몇몇 사람들은 그의 버밍엄 발언이 진지한 감정을 담은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빌 오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말이 진심이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술 때문이었어요. 정말 취한 상태였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죠. 흔히들 '술 취하면 진심을 말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2017년 < 롤링 스톤 >과의 인터뷰에서 클랩튼은 "마약과 알코올로 채워졌을 때 나는 어떤 남자를 마주한다."라고 말한다.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막 나가죠. 그리고 나에게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느껴졌죠." 후자에 대해서는 일리가 있었을 것이다. 록 지배계급의 특권층으로서, 클랩튼은 오래전부터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며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웨이클링이나 손더스 같은 사람들은 인종 차별적인 반응과 더불어 클랩튼의 대응에 더욱 화가 났다. 버밍엄에서의 소동이 영국 언론에 보도되자, 클랩튼은 영국의 신문사 Sounds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얘기였다.
"모든 외국인 분들에게... 공연 시작 전 저는 잔뜩 취해 있었고, 한 외국인이 제 연인의 엉덩이를 더듬는 걸 보고 화가 났습니다. (에릭 클랩튼은 부유한 사우디 출신 인물이 당시 연인인 패티 보이드를 희롱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마치 백인 우월주의자처럼 "저는 에녹이 이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글을 덧붙였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 에릭은 버밍엄 공연의 잘못을 몬티 파이선 시리즈처럼 농담거리로 만들었다. "사실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릭 클랩튼은 2007년 회고록에서 버밍엄에서의 발언에 대해 "인종 차별 의도가 결코 없었다"며 논란을 새롭게 다루었다. "그 발언은 값싼 노동력에 대한 당시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고, 문화적 혼란과 과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손더스와 Rock Against Racism 커뮤니티의 사람들에겐 말도 안 되는 설명이었다. 사실 'Wogs'라는 단어를 썼다는 데서 변명의 여지는 많지 않다.
당시 미국에서는 버밍엄 사건이 크게 보도되지 않았는데 2017년 다큐멘터리 영화 <에릭 클랩튼 : 기타의 신 >은 이 내용을 조명했다. 클랩튼은 이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인터뷰에서 흑인들과의 우정을 언급하며 인종차별 의혹을 부인했고, 버밍엄의 발언을 음주 탓으로 돌렸다. "전 정말 불쾌한 일을 했어요. 비열한 사람이었죠.". 그는 버밍엄에서의 발언이 자신을 인종차별주의자처럼 보이게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끔찍한 일이죠.". 그리고 다시 한번 한마디를 보탰다. "사실, 그건 재밌는 일이었습니다.".
버디 가이는 최근까지 버밍엄 사건에 대해 들어본 바가 없다고 말한다. "백인들도 그런 말을 하고, 흑인들도 그런 말을 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버밍엄에 갔거나 버밍엄 사건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면 클랩튼의 해명은 공허하게 들린다. 웨이클링은 크림의 'Badge'와 'White Room'을 제외하고는 그날 이후 클랩튼의 음악을 듣지 않았다. 필립스 역시 클랩튼 앨범을 듣지 않았다. "술 마신다고 정교하게 거짓말을 지어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술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진심을 털어놓게 만들 뿐입니다.".
클랩튼의 회고록을 자세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최근 발언이 그리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클랩튼은 "화가 났을 때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라 썼고 "정치를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음모론" 경향을 인정했다.
확실히 에릭 클랩튼은 잘 속는 면이 있는 것 같다. 회고록에서 그는 과거 '유럽 억양이 강한 어떤 여성'이 당시 그의 아내였던 패티 보이드와의 어려움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고 말하며 '패티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고, 십자가에 바르고, 나의 이름을 쓰라' 같은 의식을 시도하도록 설득당한 사건을 자세히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 수수께끼의 여성의 조언에 따라 뉴욕으로 날아가 섹스를 했지만 그런 미친 짓으로 패티 보이드의 마음을 다잡을 수 없다는 것은 몰랐다.).
에릭 클랩튼이 현재 견지하고 있는 자세는 코로나19, 가짜 뉴스, 쇠약한 건강 상태로 흔들리는 뜨거운 혼란이다. 지난 몇 년 간 에릭 클랩튼의 건강, 특히 그의 손은 최근 앨범보다 더 많이 뉴스에 올랐다. 2016년 클랩튼은 <롤링 스톤>에 "어떤 신경적인 통증이 있다"라고 고백했다. 이듬해 인터뷰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습진에 시달리고 있다'라고 밝힌 데 이어 말초신경장애로 고통받고 있노라 이야기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클랩튼은 영국 정부의 코로나19 대처에 의문을 제기해 온 화학 기술자 겸 작가 이보르 커민스(Ivor Cummins)의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저는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열심히 채널을 시청했습니다."라 고백했다. 이후 에릭 클랩튼은 밴 모리슨과 함께 'Stand and Deliver'라는 싱글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알렸다. "우리는 이 혼란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하기에 일어섰다. 대안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공교롭게도 밴 모리슨은 1976년 버밍엄 공연의 특별 게스트였다.).
이어 클랩튼은 친구이자 건축가이며 백신에 회의적인 로빈 모노티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통해 댓글로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세계 정부의 침해와 첨단 기술 검열에 직면하여 공개 토론을 펼치고 정보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오라클 필름스(Oracle Films)라는 웹사이트에 백신 2차 접종 후 부작용을 호소하기도 했다. 거의 3주가량 손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백신에 대한 시각 때문에 클랩튼은 지난 1년 동안 동료, 가족들과 멀어져 소외감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Weil Cornell 의과대학 신경학과 회장인 매튜 핑크(Matthew Fink) 박사는 클랩튼의 백신 부작용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말초 신경에 영향을 끼치는 백신 염증성 질환 사례는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특히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희귀한 신경 질환과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손과 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기타리스트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크 박사는 에릭 클랩튼의 메시지를 경계하고 있다. 크림 시절 에릭 클랩튼의 음악을 좋아하는 핑크 박사는 "그렇다고 모든 백신을 비난해선 안됩니다. 백신은 대부분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치료법입니다. 백신 접종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라 밝혔다. 백신 회의론자들과 가짜 뉴스로 인해 미국 인구의 56%만이 백신을 맞았다.
캠벨 맥러글린은 런던에 있는 그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파란 스웨터와 모카신을 캐주얼하게 차려입은 클랩튼을 만났다. 그는 코로나 백신을 경계한다. "많은 돈을 받지 않는 한, 저는 새로운 기술을 시험해 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사람들이 그들의 몸에 넣고 싶은 것을 선택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강요하지 말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특정한 행동을 하라고 소리치는 건 수상합니다."
클랩튼은 맥러글린은 아직도 자신이 백신 접종 후유증을 앓고 있다며 몇 달 동안 기타를 연주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함께 잼(즉흥 연주)을 하고 싶었지만 클랩튼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요. 확실히 백신은 클랩튼에게 스트레스를 줬습니다.". 맥러글린은 클랩튼이 선물한 밴 옆에서 클랩튼과 함께 사진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공유했다.
요즘 클랩튼의 발언을 들어보면 1976년 버밍엄의 때처럼 어정쩡하게 혼자 내버려 둬서는 안 될 것 같다. 최근 그는 성명서를 통해 "차별된 관중"을 위해 공연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백신 접종 증명서가 필요하지 않은 장소에서만 공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9월 미국 투어의 첫 쇼를 앞두고 클랩튼은 'This Has Gotta Stop'이라는 새로운 노래를 발표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걸 깨달았지 / 네가 법을 집행하자 / 내 손을 움직일 수가 없어 / 땀에 흠뻑 젖었고 울고 싶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시민들을 조작된 꼭두각시로 묘사했다.
"클랩튼이 또 다른 에녹 파월 찬양의 순간을 보내는 것처럼 들리네요."라고 오크스는 말한다. "그가 어떤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낸 것은 가장 최근의 일입니다. 왜냐면 클랩튼은 기본적으로 조용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버밍엄 망언은 오래전 일이고 술을 엄청나게 마신 탓에 일어난 일이라고 쳐도, 이번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여요."
오라클 필름스와의 인터뷰에서 클랩튼은 자신의 견해를 밝힌 후 '내가 트럼프 지지자로 분류됐다"라고 불평했다. 그러나 그의 구세계적 행보는 적어도 20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클랩튼은 브라이언 페리, 스티브 윈우드와 함께 영국 버크셔의 한 성에서 '음식, 농업, 그리고 컨트리 스포츠'를 홍보하는 영국 단체인 Countryside Alliance를 위해 자선 공연을 펼쳤다. 그들의 컨트리 스포츠에는 여우 사냥이 포함되어 있다. 여우 사냥은 사냥개를 풀어 여우를 죽이는 야만적인 전통으로, 동물 학대뿐 아니라 계급 차별을 내포한 탓에 영국 정부로부터 금지되었다.
당시 클랩튼의 대변인은 그가 Alliance를 지지한다고 밝히긴 했으나 직접 사냥을 하진 않았다고 밝혔다. 그 협회는 동료들에게도 곤혹스러운 존재다. 퀸의 브라이언 메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는 에릭 클랩튼을 사랑합니다. 영웅이죠. 하지만 여러 면에서 저와 매우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재미로 동물을 쏴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죠.". 대변인이 여우 사냥을 '사람들의 사적인 오락'이라 이야기하는 바람에 클랩튼은 또 다른 단체의 지지도 얻었다. 전미총기협회(NRA)가 '에릭 클랩튼이 여우 사냥을 지지한다'는 글귀를 사이트에 올린 것이다.
백신 회의론자들에게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에서 공연을 펼치는 클랩튼은 도전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민주당에 투표해야 할 이유 : 종합 가이드'를 저술하며 미국 내 보수주의 방송인으로 떠오른 마이클 놀스는 트위터를 통해 '에릭 클랩튼은 앤서니 파우치보다 훨씬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 이야기했다. <롤링 스톤>과의 통화에서도 놀스는 "클랩튼은 과학과 건강 문제보다 백신을 맞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면에서 에릭 클랩튼이 앤서니 파우치보다 백신 문제와 더 큰 이슈들에 대해 신뢰받는 인물이라 생각합니다."라 말했다.
31세의 놀스는 대부분의 클랩튼 팬들보다 어리지만 현 상황에 대한 이 기타리스트의 입장이 로큰롤 정신에 충실하다고 본다. "굉장해요. 록스타가 권위에 저항하는 것은 진정성 있는 일입니다. 그게 로큰롤 정신이죠. 록이 나이 들어가자 어느 순간부터 사회 지배적인 의견에 그저 순응하게 되었습니다. 오래도록 이 나라가 운영된 방식이죠. 더는 그러지 않아야 하고요."
Jam for Freedom의 맥러글린은 마이클 놀스와 비슷한 의견을 견지하고 있다. 클랩튼과의 대화는 이를 확인시켜준 계기였다. "클랩튼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1960년대 청년들의 행동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유를 포용하고,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사회 통제에서 탈출하는 것 말이죠.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했던 일이다'라 말해주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는 항상 그가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했어요." 클랩튼과 수년간 함께 일해온 한 음악계의 베테랑이 말한다. "클랩튼을 여러 번 만났어요. 그는 신사적이고, 성숙하고, 말을 잘하며, 신중합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대부분이 그의 발언에 충격받았을 겁니다. 나는 그의 공연을 다시는 보지 않을 거예요. 백신을 반대하면서 어떻게 팬들을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라이브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에릭 클랩튼의 음악과 견해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Layla and Other Assorted Love Songs>의 열정, <461 Ocean Boulevard>의 느긋함, 로버트 존슨의 'Crossroads'와 크림의 음악을 예전처럼 즐길 수 있을까? 코네티컷의 대표적인 클래식 록 방송국 WPLR 소속 DJ 채즈(Chaz)는 에릭 클랩튼을 '러쉬모어 산'같은 인물이라 말한다.
"클랩튼은 음악으로 세상에 많은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만약 제가 가족들과 밥을 먹는데 할아버지께서 동의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면, 전 그냥 무시하고 '매시드 포테이토나 가져다주세요'라 말할 거예요. 클랩튼에 대한 생각도 그렇습니다."
클랩튼의 미국 투어 첫 날인 9월 13일, 텍사스 포트워스의 디키스 아레나에 도착한 사람들도 채즈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 관객에게 클랩튼의 견해에 대해 질문하자 "정치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은 편하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포트워스의 태런트 카운티에는 텍사스에서 두 번째로 많은 30만 7천여 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연장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클랩튼 팬들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저는 클랩튼이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에릭 클랩튼 콘서트에 참여한 데이비드 헤이너가 이렇게 말한다. "클랩튼은 건강과 안전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를 귀찮게 하는 일은 아닙니다."
버디 가이가 말한다. "누군가 클랩튼처럼 유명한 인물이라면 사람들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든 간에, 지금까지 클랩튼을 지지해 온 사람들은 그가 옳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2주간의 투어 동안, 클랩튼은 백신에 반대하는 노래들을 부르지 않았다. 고전적인 'I Shot the Sheriff, ', 'Layla'의 언플러그드 버전, 'Tears In Heaven'과 블루스 커버곡을 연주했다. 그는 대중에게 연설하거나 백신, 정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손에 기타를 들고 문화 내전의 기로(Crossroads)에 서있다. 예전에도, 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