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과 웹소설, 하이브가 꿈꾸는 오리지널 스토리는?
1월 15일 하이브가 새로운 프로젝트 오리지널 스토리를 공개했습니다. 네이버 웹툰의 슈퍼캐스팅 캠페인과 함께하는 오리지널 스토리는 네이버의 글로벌 서비스를 통해 전 세계 10개 언어로 번역된 웹툰과 웹소설 콘텐츠로 첫 선을 보였습니다.
BTS X <세븐 페이츠(SEVEN FATES): 착호>
엔하이픈 X <다크 문(DARK MOON): 달의 제단>
투모로우바이투게더 X <별을 쫓는 소년들>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선후관계를 확실히 짚어야 합니다. 오리지널 스토리는 캐릭터(아티스트) 중심 아티스트의 줄거리가 아닙니다. 소속사가 전개하는 세계관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화제를 모았던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아케인>과 비교해보겠습니다. '아케인'에 등장하는 징크스와 바이, 제이스, 에코, 빅토르는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 등장하는 챔피언(캐릭터)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를 운영하는 라이엇 게임즈는 애니메이션 제작 전부터 챔피언 고유의 배경과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 (자운, 필트오버) 에 대한 설정을 구상하여 공개해왔습니다. <아케인>은 라이엇 게임즈의 지적재산권(IP)을 영상으로 옮긴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세븐페이츠: 착호>(이하 <착호>)는 어떨까요. 하이브는 근 미래의 타락한 도시 '신시'에서 악령 '범'을 사냥하는 현대적인 착호갑사들의 판타지 활극을 구상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이 이야기에 '캐스팅' 되었습니다. <아이언맨>의 주인공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닥터 스트레인지>의 주인공에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섭외한 마블 슈퍼히어로 영화를 생각해보면 편합니다.
<착호>의 주인공들은 멤버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기획된 존재들이지만, 방탄소년단이 <착호>를 홍보하는 것은 본인들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 대한 의미가 아니라 출연 작품에 대한 홍보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다른 두 작품도 동일합니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소년들의 판타지 학원물 <다크 문: 달의 제단>(이하 <다크문>)은 엔하이픈을 캐스팅했습니다.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아이돌 그룹을 다룬 <별을 쫓는 소년들>은 투모로우바이투게더를 캐스팅했습니다.
방탄소년단의 '학교 3부작', '화양연화' 같은 콘셉트 역시 아티스트를 이야기에 캐스팅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이브의 오리지널 시리즈는 케이팝 시장의 치열한 콘셉트 경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이브는 BTS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웹툰 <화양연화 Pt.0 'SAVE ME'>, 게임 'BTS 유니버스 스토리(Universe Story)' 등을 통해 오리지널 스토리 사업 전개를 위한 테스트도 거쳤습니다.
단순히 아티스트를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 레이블 전체를 관통하는 지적재산권으로 콘셉트를 강화한 결과가 지금의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은 “그동안 하이브가 선보였던 스토리가 아티스트와 창작물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장치였다면, 이제는 조금 더 생명력을 가진 ‘오리지널 스토리’를 들려드리려 한다”라고 했다.
한겨레, 논란의 BTS 범 내려온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26623.html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오리지널 스토리 속 등장인물들을 아티스트와 동일시합니다. '아티스트를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따라붙는 이유죠. SM엔터테인먼트의 SMCU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관이 아티스트에 우선한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아티스트의 탄생 비화를 수식하는 정도의 구상, 아티스트가 있기에 나올 수 있는 후속 콘텐츠로 가공되었죠. '아티스트의 콘텐츠'는 익숙하지만, '콘텐츠에 아티스트를 캐스팅'하는 하이브의 개념은 낯섭니다.
이 부분까지 이해하더라도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적재산권을 사업 모델로 확장하고자 하는 기획사들의 행보에 팬덤이 느끼는 피로감입니다. 이제 웬만한 아이돌 그룹들도 오리지널 스토리와 함께 등장하는 2022년 케이팝 시장에서 '입덕'은 예전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탄소년단의 대성공으로 케이팝 세계관이 한창 주목받던 2010년대 말에도 케이팝 세계관에 몰입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즐길 거리가 많아진다는 점에서 신규 팬 유입에 긍정적인 요소지만, 기존 팬덤의 경우 아티스트 케어와 활동 대신 '상업적으로 이용' 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랜 코어 팬덤의 힘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난 하이브라면, 그리고 그 팬덤이 케이팝의 가장 거대한 그룹 방탄소년단의 아미라면 우려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콘텐츠를 밀고 나가되 우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자세도 요구됩니다. 거대 기업의 숙명이죠.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는 네이버 슈퍼캐스팅 캠페인의 일환입니다. 슈퍼캐스팅 캠페인은 네이버가 긴 시간 구축해온 글로벌 지적재산권 가치 사슬 플랫폼을 발판 삼아 세계적인 기업들의 IP를 웹툰, 웹소설 등으로 콘텐츠화하는 프로젝트입니다. 2021년 10월부터 DC코믹스와 함께 선보이고 있는 '배트맨 : 웨인 패밀리 어드벤처'가 슈퍼캐스팅 캠페인의 사례입니다.
슈퍼캐스팅 캠페인을 통해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는 10개 언어로 웹툰과 웹소설로 동시 제작되어 전 세계에 동시 서비스됩니다.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케이팝 아티스트 관련 콘텐츠 소식에 글로벌 시장에서의 즉각적인 반응이 따라왔습니다. <착호>는 론칭 이틀 만에 1,500만 조회수로 네이버 웹툰 최고 기록수를 경신했습니다.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태국어 일간 활성 이용자 수(DAU)도 최고 수준입니다.
하이브는 네이버의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꽤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오리지널 스토리와 자사 콘텐츠의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습니다. 네이버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기업과 세계적인 케이팝 아이돌의 이름에 힘입어 플랫폼의 체급을 한층 더 높였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됐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는 걸그룹 에스파를 론칭하며 자사 아티스트들을 통합하는 SM 컬처 유니버스(SM Culture Universe)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광야(KWANGYA), 코스모(KOSMO), 아이(æ) 등 미래 지향적이고 우주적 개념으로 정립된 공상과학적 세계관을 선보이고 있죠. 그렇다면 하이브가 꿈꾸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착호>, <다크 문>, <별을 쫓는 소년들>의 공통 키워드 세 개를 꼽아보겠습니다. '판타지', '덕력', 그리고 '청춘'입니다.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는 신화와 설화, 마법과 초자연적 존재들의 장소입니다. <착호>부터 살펴볼까요. 근미래의 서울을 배경으로 만든 가상 도시 '신시'에서 단군신화, 호랑이와 관련된 민간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등장인물들이 대결을 예고합니다. 인기 네이버 웹툰 <호랑이형님>을 생각한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다크 문>에서는 해리포터 시리즈와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혼합한 인상을 받습니다. 가상의 세계 리버필드의 명문 학교 드셀리스 아카데미에 전학 온 주인공 수하를 둘러싸고 학교 최고의 인기 그룹 뱀파이어 소년들과 늑대인간 소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 시리즈인데요. 저는 웹툰 작가 석우를 생각했습니다. 뱀파이어 학원물 <오렌지 마말레이드>와 늑대인간과 인간 소녀의 연애를 다룬 <하나의 하루> 같은 작품이 떠올랐네요.
투모로우바이투게더가 출연하는 <별을 쫓는 소년들>은 어떨까요. 데뷔 3년 차 무명 그룹 스타원이 세계적인 아이돌 미드나이트의 대타로 무대에 올라 마법을 발휘하게 되며 일어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마법사가 아이돌을 겸하는 세상에서 다섯 멤버 중 누구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해 '망돌'이 된 스타원은 어느 날 리더 '솔'이 19세 나이에 마법 능력을 각성하며 수수께끼의 적 '멸룡도가'와 대결을 펼쳐야 합니다. 198~90년대 일본 마법소녀물과 아이돌 물을 결합했던 숱한 콘텐츠가 기억 속에서 튀어나옵니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판타지'의 세계.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하이브의 스토리텔링 팀이 어마 무시한 '덕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방시혁 의장이 '덕후'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죠. 과거 방시혁 의장의 트위터 계정만 잠시 둘러봐도 이 분이 얼마나 다양한 콘텐츠에 진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해박한 지식과 '찐 사랑'이야말로 방탄소년단의 '화양연화'와 'Love Yourself', 투모로우바이투게더와 엔하이픈의 성공을 이끈 핵심 요소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2020년 경부터 하이브의 '스토리 콘텐츠 기획' 채용 공고가 종종 올라오곤 했습니다. 필수 자격 중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디어, 웹툰/웹소설, 영상 콘텐츠 관련 회사에서 프로듀싱 및 콘텐츠 론칭 경험을 보유한 분
기획부터 출시까지 콘텐츠 생산의 전반적 프로세스 경험을 보유한 분
콘텐츠 및 IP 산업, 글로벌/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분
일찍부터 하이브는 자사 아티스트들의 세계관을 넘어 오리지널 스토리 확장을 위한 준비를 해왔던 겁니다. 현재의 오리지널 스토리는 음악, 소설, 영화, 만화 등 셀 수 없이 많은 콘텐츠의 리스트업 과정을 거치고 그중에서 레퍼런스를 찾아 기획을 다듬어 실제 크리에이터와 연결하여 플랫폼에 연재를 시작하기까지를 아우르는 대규모 기획입니다. 이들의 '덕력' 또한 상당할 것이라 예상해봅니다.
일각에서는 하이브 보이그룹들이 '청춘'이라는 테마에 고착화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법 같은 10대 시절을 지나 차갑고 혼란스러운 20대로 진입하며 영원을 꿈꾸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 혼란스러운 세상을 즐기며 돌파하는 틴에이저 엔하이픈의 모습에서는 자연스레 방탄소년단이 걸어온 길이 겹쳐집니다. 오리지널 시리즈도 비슷한 노선을 가져가죠.
SM의 SMCU는 기술의 발전을 찬미하는 미래파의 입장에서 휘황찬란한 최첨단의 테마파크를 펼쳐 보이는 공간입니다. 하이브는 혼란스러운 오늘날 세상의 청년들의 현실을 직시하며 일상 속 작은 마법과 환상의 나라를 선사합니다. 순수한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사춘기 시절의 자기혐오와 비교, 갈등이 사라집니다. 계급, 차별, 빈부격차 없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좀 부족해도 너무 아름다운' 자신을 깨닫고, 'Love Yourself'를 되뇌며 더 나은 내일을 그려보는 곳. 하이브가 꿈꾸는 세계는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오리지널 스토리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새로운 세계관에 자사 아티스트들을 캐스팅하며 노선 변경과 확장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괜찮은 결과가 나오면 더욱 구체적이고 깊은 이야기를 창작해 웹툰/웹소설 이상의 콘텐츠를 꿈꿔볼 수 있습니다. 하이브 버전의 <아케인> 혹은 <트와일라잇>이 나온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닌 거죠. 주연 배우로 정국과 아리아나 그란데가 출연하는 실사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죠. 농담처럼 들리지만, 지금 하이브는 충분히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엔하이픈의 <다크 문>은 팬들과 대중의 호평을 받으며 엔하이픈의 초기 뱀파이어 콘셉트가 매력적인 IP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많은 비판에도 <착호>와 <별을 쫓는 소년들>은 지적재산권 확보에 열을 올리는 케이팝 시장에 하나의 기준점으로 자리 잡는 모습입니다. 이제 시선은 올해 5월 공개 예정인 하이브의 새 걸그룹과 오리지널 스토리를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