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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Apr 07. 2022

진짜를 말하고, 본질을 찾아 헤매는 여행 에세이


가만보면 뭐 하나 진짜인걸 찾기 어려운 시대이다. 흉내내고, 있는 척하고, 겉멋에 빠져있는 가짜가 도처에 널려있고 가짜가 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다. 시류에 맡게 적당하게 허세부리며 사는 것이 편해서인지, 진심을 다해 진짜로 사는 것이 바보같다 느껴서인지 아님 둘다일지도 모르겠다. 이 여행기는 우직하고 묵직하게 진짜를 찾아나가는 얘기다. <이 낯선 여행, 이 낯선 세계>의 저자 춘자는 노마드지만 나무 같다. 단단하고 뿌리깊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확장한다. 혼자 외로된 골몰을 많이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묵직한 이야기들을 깊은 데서 캐올린다. 뭐가 있을지 몰라 무섭고 어두운 동굴에 불을 켜고 안을 천천히 깊게 들여다보면 이야기를 쌓는다. 형식상 여행 에세이라는 범주에 있지만 여행 에세이로 규정짓기엔 그 그릇이 작다.


미노오는 황홀한 향기로 가득 차 있다. 그건 달콤한 열대과일 향과 비슷하다. 도착하자마자 그걸 알아차리고 향기의 근원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도통 알아낼 수가 없었다. (중략) 이쯤 되니 나의 후각 신경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매일같이 킁킁거린 결과 마침내 향기의 근원을 찾아냈다.

킁킁은 일본말로도 킁킁이야 中


그녀가 중요히 여기는건 도시의 화려함이나 인기있는 여행지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 춘자가 여행하는 공간은 크지않고 화려하지 않다. 서점 쓰타야, 카페 마론, 미노오, 루팡, 토레몰리노스의 해변, 에어비앤비 등 여기 아니고 거기여도 상관없을 작은 공간을 유랑하며 담기는 이야기는 결국 거기, 그 순간이어서 가능한 이야기다. 그 작은 공간을 치열하고 집요하게 관찰한 결과 일구어낸 이야기다. 란과 후군은 미노오에 몇 년을 살면서도 금목서의 향을 알아차린 적도 없지만 그녀는 작은 마을 미노오를 가득 채운 향을 알아차리고 집요하게 킁킁거리며 결국 그 근원을 찾는 것 처럼.


도쿄의, 무려 신주쿠에서, 재개발의 광풍을 피해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남기까지 그 공간을 지키고자 많은 사람이 싸워 왔다고 한다.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 삶과 사랑과 시대를 이야기하는 살롱이었고 이제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명소가 된 골든가이. 이곳은 낡았지만 흉내낸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시간을 따라 흐르며 견뎌왔을 뿐이고, 그래서 자연스럽다.

주말의 도쿄는 만실 中


후쿠시 씨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큰 사랑을 받아온 카페 마론이라는 공간을 어떤 형태로든 기록하려는 마음으로 (MARRON PAPER)를 시작했다. 그녀는 카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직원들의 긍지와 자부심, 마론을 찾는 손님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마론의 매력을 조금씩 발굴해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을 꾸준히 오래도록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꾸준히'와 '오래도록', 그 두 단어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카페 마론의 역사가 48년이니 꾸준히 그리고 오래도록 그 자체로 카페 마론의 정체성이다. 누구나 '오래'가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꾸준히'하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카페 마론에 '쇼와 레트로'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건 오히려 그 공간이 쌓아온 시간을 축소하여 설명하는 방법이다.

아오모리는 애플이 아니라 마론이야 中


쓰타야가 멋진 이유는 그곳이 서점이기 때문이지 라이프 스타일 편집샵이기 때문이 아니다. (중략) 어쨌든 쓰타야는 이와나미 시게오가 일군 이와나미 문고의 정신과 같은 것 위에서, 그것을 딛고 먹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이와나미 시게오가 창간사에서 쓴 '문고의 사명'과 같은 것, '문고의 사명'을 다하고자 90년 동안 문고본을 출간하고, 진보초에 복합 문호 공간을 만들어 한쪽 벽면을 알록달록한 이와나미 문고로 발라 버리는 그 꼬장꼬장한 정신 말이다. 그 정신들의 누적 말이다. 퇴적이 있어야 그것에서 변성이 이뤄진다.

문고의 사명 中
내게 여행이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그건 온갖 낯선 것들을 만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이며 낯섦과 마주한다는 것은 원래 불편한 경험이다. 자아, 내면의 목소리, 진짜 나 같은 걸 만나러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거니와 여행 중에는 나와 마주할 여유 따위도 없다. 여행의 과정에서 나를 만나게 되는 경험은 여행자의 손에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낯선 것들을 끝까지 용감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마주한 결과 얻게 되는 보상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게는 뜨거운 가슴이 아닌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일상으로의 복귀 中


춘자에게 여행은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단단하게 확인하는 과정이며, 진짜를 보고 진짜를 겪고 진짜를 배우며 본질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낭만은 없고 진지함만 가득하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한없이 진중한 가운데 허당기 넘치는 고생기와 춘자가 형성한 낯선 세계관, 재밌는 에피소드가 맞물리며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다. 머핀을 가져가고 오레가노를 준 엘리라든가, 토레몰리노스 해변가에서 서핑하는 고양이라든가, 미래의 자신이 <인터스텔라> 처럼 캐리어를 쓰러트린다든지 하는 부분은 입가에 미소를 한껏 머금고 읽어내려갔다.


최근에 읽은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에서 에세이는 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 기발한 생각, 독특한 태도, 남다른 의견과 같은 개성이 핵심인 장르라고 말한다. 나는 단언코 <이 낯선 여행, 이 낯선 세계>가 자기 마음의 모양을 잘 알고 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 기발한 생각, 독특한 태도로 써내려간, 에세이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한 아주 잘 쓴 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적이고 사려깊으며 따뜻하다.


모든 익숙함을 떨쳐버리고 오로지 새로움만을 삶으로 끌어오르기 위해, 나는 힘차게 구르고 있다.

stay or forever go 中

그 커다란 것이 오로지 내 힘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힘을 쓰고 있어서, 두 발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어서, 허벅지 근육이 잔뜩 긴장하고 있어서, 핸들을 쥔 두 손에 땀이 배고 있어서,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덕분에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다정한 바람을 만난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면 기분이 좋다. 멈추지 않고 계속 힘을 내고 싶어진다.

끝의 시작, 시작의 끝 中


분명 유리창 밖에 엄청나게 커다랗고 번쩍번쩍 빛나는 무언가가 있는데 유리창이 뿌옇게 흐려서 정확히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보고 싶어서 유리창을 닦고 또 닦는다. 그런데 한참을 닦아도 유리창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정확히 보고 싶을 뿐이다. 나를 위함은 그 짜릿함의 정체를 말이다. 그렇게 유리창을 한참이나 호호 불어 문지른 뒤에야 글을 쓸 수 있다. 여전히 뿌옇지만 감으로 쓴다.

창문을 닦자 中


여행이 춘자 안에 새긴 것들을 가지고 거울을 닦고 페달을 밟으며 수련하고 각성하며 그려질 새로운 그림들이 더욱 궁금해진다. 제주 여행에 이 책을 동행했다. 호텔의 맛없는 조식을 먹고 뽀시락 거리는 하얀 시트에 누워 읽고, 바다를 보면서도 읽었다. 이 책을 읽고나니 내가 읽고 싶었던 여행 에세이가 이런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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