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길을 걷다가 한번 생각에 잠기면 몇 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사색을 했다. 밤이 찾아와도 새벽이 와도 해답을 찾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아지경의 사색에 빠져들었다가 아침 해가 떠오르면 짧은 기도를 하고 자리를 떴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현대에 살았었다면 어땠을까.
현대인에게 '사색'은 사치이다. 일과 가정, 그리고 수많은 관계들 사이에서 사색이 자리할 곳은 없다. 바쁘게 돌아가는 초단위의 현실은 잠깐의 여유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가성비' 보다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를 말하는 시대이다.
온라인 미디어의 세상은 도파민의 향연이다. '숏폼'은 우리의 니즈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짧고 자극적이며 강렬한 그곳에서 우리의 의식은 순식간에 쾌락으로 동화된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큰 갈증을 불러낸다. 아! 이것이 도파밍의 무한굴례인가.
그러니 현대에서 사색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버겁다. 마치 스마트 폰의 도입으로 빠르게 밀려나버린 2G 폰처럼, 아주 소수의 철학자와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이 되었다. 조금 먼 미래에는 아예 형이상학적인 단어로 치부되어 종이 사전 속 몇 획의 잉크로만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스스로에게 물어도 사색이 뭐냐고, 그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돼 묻는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면 되는 게 아닌가. 소크라테스가 동시대를 살고 있었다면 물어보고 싶다. 아니 그전에, 그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사색을 즐기는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사색이도대체 무엇이길래 길거리에서, 연회장에서, 전쟁터에서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넋 나간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문자 그대로의 사색(思索)이다. '思(생각 사)',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깊은 생각이 다 사색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저녁 메뉴를 진지하게 고민한다고 해서 사색을 한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索(찾을 색)'으로 그 의미가 완성된다. 생각하여 이치를 구하며 탐구하는 것이다. 즉 생각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탐구하며 이치를 구할 때, 사색의 진정한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다.
다시 의문이 생긴다. 무엇을 탐구한다는 것인가? 무엇의 이치를 구한다는 말인가? 현시대 최고의 지성, 챗 GPT에게 물었다. "사색이란, 우리가 생각이나 고민을 깊게 하고 문제나 주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을 말해요. 예를 들어, '왜 우리는 존재하는 걸까?' 같은 큰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죠."
그러니까 사색은 우리의 존재와 같은 큰 질문에 대한 이치를 탐구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란 것이다. 그러나 삶, 사랑, 종교, 철학, 존재, 우주 이 거창해 보이는 철학적인 이슈들은 다시금 우리를 사색으로부터 떨어트려놓는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색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테슬라의 일론머스크,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까지 모두 사색을 즐겨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존재에 대해서 심오한 탐구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철학에 대해서 진지한 의미를 물어 알려진 것이 아니다. 그저 각자가 관심 있는 영역에서 진지하고 깊은 고민을 했으며 그것이 지금의 그들을 존재하게 했다.
스티브 잡스가 명상과 사색을 좋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계기는 과거 인도여행이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떠난 인도 여행에서 우연히 명상과 사색을 배우게 된다.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의 가치관과 내면에 대한 이해는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더 나아가 미래의 비전을 꿈꾸며 현재의 자신과 연결시켜 주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모든 독창적이고 혁신적이 아이디어는 모두 사색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색의 효과를 말하는 이 시점에 더 중요한 게 있다.정반대의 결과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이다.
사색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사색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존재 의미와 삶에 대해 묻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없기에 어디까지나 인간의 판단 내에서이다.그런데그 특권조차누리지 못하는 인류를 상상해 보면 참담하기 이를 수 없다.
영화 '아이로봇'에서 스푸너 형사가 로봇 써니를 쫒는 데 써니가 돌연 형사에게 반격을 하며 묻는다.
"What am I?"
나는 무엇인가? 이 로봇의 짧은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모자라 우리에게 범인류적 과제를 내어놓는다. 과연 스스로의 정체감을 묻는 로봇은 그동안 우리가 정의해 왔던 로봇이라고 할 수 있는가? 존재에 대해 사색하는 로봇과 인간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제 인간이 로봇보다 뛰어난 점은 남아있는가?
영화 '이디오 크러시'에서는 이 문제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설정은 이렇다. 먼 미래에 인간을 대체할 고차원적인 AI가 발달하고 유전적인 원인까지 겹쳐지면서 전 세계 인류는 자신이 누군지 조차 모르는 수준까지 퇴화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과거에서 우연한 계기로 타이머신을 타고 온 평범한 주인공이 이 황당한 세계에서 천재로 추대받게 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그려내는 내용이다.
감독은 영화 시작 장면에서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띄어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곤 이어, 마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고 학생들의 반응을 즐기는 어느 선생님처럼, 기대 가득 찬 모습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생각을 하지 않는 인류의 모습을 보니 어때?"
데카르트는 진리를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탐구했다. 그는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의 존재를 참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생각하는 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단순히 내가 여기 있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에게 생각하지 않는 인류의 존재에 대해 묻는다면, 분명 그곳에 실재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무의식에서만 존재하는, 그러니까 존재와 비존재 그 사이 중간쯤 어딘가쯔음에 붕 떠있는, 우주를 떠다니는 부유물 같은 존재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 끔찍한 판타지를 종말 시킬 해결책은 다시 사색이다. 우리는 사색을 통해서야 비로소 스스로의 삶에 존재하고, 살아내며,성장할 수 있다.
나는 글을 쓰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곧 나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행위가 성장의 동력인 셈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글을 씀으로만 성장했던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하게 되었던 수많은 사색들이 진정한 성장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글이 잘 안 써져몇 시간 동안이나 멍한 상태로 휴대폰을 들어다 놨다 할 때에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문단을 쓰기 위해서 수없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할 때에도, 정확한 팩트를 찾기 위해 며칠 동안 정보들을 모아갈 때에도 언제나 그 시작에는 사색이 있었다.
"왜 나는 이 주제로 글을 쓰는가. 나는 정말 무엇을 쓰고 싶은가. 이것이 정말 나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오는 글이 맞는가." 모든 사념과 질문들이 정리되는 순간 신기하리만큼 글은 술술 쓰였다. 사색을 통해 만들어진 나만의 가치관과 철학들이 글을 쓰는데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 이 근본을 보고 개똥철학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다. 괜찮다. 어느 서점에 있는 베스트셀러 저자의 철학을 자신의 것인 거 마냥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개똥철학이 낫다. 혹시 또 모르지 않은가. 이 사색의 순간이 스티븐 잡스의 인도 여행처럼 나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데려다 줄지 말이다.
이제 사색을 해야 할 때이다. 삶이든, 죽음이든, 사랑이든, 철학이든, 현실이든, 자유이든 무엇에 관해서 이든 일단 해보는 것이다. 항상 무언가에 취해있어야 한다는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말처럼 사색에 흠뻑 취해있어 보는 것이다.
옛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항상 곁에 '관찰자'들을 두었다고 한다. 그들은 한번 사색에 빠지게 되면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주 위험한 상황에 처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곁에 있는 '관찰자'들이 주의를 환기시켜 사색에서 깨어나게 해 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무아지경의 사색이다. 우리 곁에는 수많은 현대판 관찰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색으로 가는 길목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방해한다. 그 악랄한 방해꾼들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휴대폰을 놓고 누구도 찾지 않는 장소에서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무아지경의 사색에 빠져들 때, 곧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無'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뚜렷한 '有'이다. 그 순간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된다. 물론 그 시작은 아주 가벼운 사색이다.
가끔 통화를 하는 친구가 있는데 통화를 마칠 때면 항상 이렇게 말을 한다.
"그래 또 열심히 살아보자!"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쁘게 산다는 것인가? 일에 몰입하며 산다는 것인가? 왜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렇게 깊은 무아지경의 사색에 빠져들려는 찰나, 복부에 익숙한 통증이 느껴진다. 훌쩍 지나가버리 시간을 보면서저녁메뉴에 대한 심오한 고민이 시작된다. 나의 보잘것없는 사색은 허무하게 끝이 난다. 아,사색은 쉽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