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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영식 Aug 07. 2024

공정한 가위바위보를 한다는 것

공정하다는 착각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 한치의 의견도 좁혀지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속에서 누군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가위보위보로 정하자!"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가위바위보는 단순한 놀이나 게임이 아니었다. 이견으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을 군말 없는 하나의 목소리로 모아 준, '합치'의 진리였다. 가위바위보로 결정된 결과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 안에서, 그것은 가장 합리적이며 공정하게 우리 삶에 스며들어 일상에 존재했다.


가위바위보는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다.  가위, 바위, 보라는 세 개의 선택지로 구성되어 각각의 상성으로 승부가 결정된다. 가위는 보를 이기고, 보는 바위를 이기며, 바위는 가위를 이긴다. 그리고 다시 가위는 보를 이긴다.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는 어느 한 선택지가 결코 영원한 우위가 되거나 영원한 열위가 되지 않는 않는다는 말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다는 것, 그것이 가위바위보의 공평성을 말할 수 있는 가장 기본 원칙인 것이다.


여기서 공평이라 하는 것은 기회의 평등을 말한다. 가위바위보는 손 크고 작음에, 곱고 희거나, 또는 손가락이 길고 짧음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모두가 동등한 기회(세 개의 선택지)를 가질 수 있고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참여하는 누구나 공평한 자격을 갖는다는 기회의 평등을 말한다. 그러니 동등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여 자유로운 선택이 불가했다면 그것은 공정한 가위바위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오면 게임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쉽다. 만약 당신 앞에 한 무장강도가 서있는데 허리춤에 총을 넌지시 보여주며 가위를 낼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안다. 평소 좋아하는 이성과의 가위바위보를 하는 상황에서 "남자는 묵인 거 알죠?"라는 그녀의 말이 귀가 아니라 가슴에 꽂힌다면 그 역시 위력에 의한 지배는 것을 돌아서면 깨닫게 된다.


진짜 문제는 보다 근본적이고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공평함'이라는 단어 뒤에 교묘하게 숨겨져 진짜 공정의 원칙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가위바위보 대회가 있다. 오직 가위바위보로 토너먼트를 거쳐 상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방식의 대회이다. 약 10년 전 한 대회의 우승자 출신이 스타킹 프로그램에 출현한 적이 있다. 그때 소개해준 몇 개의 필승전략 중에 '상대의 손 모양을 잘 관찰하라는 것'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위바위보를 내기 전, 우리의 손 모양은 각각 특정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을 0.5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캐치하여 판단을 하고 무엇을 낼지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승자는 일반인 대상으로 가위바위보 승률 70%~80%가 나온다. 만약 당신이 이 우승자와 가위바위보 대결을 하여 1,000만 원이 걸린 내기를 한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가위바위보의 룰은 '운'이라는 요소에 철저하게 의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는 그 사실에 합의하고 있다. 아무리 가위바위보를 잘하는 친구가 있다고 하더라고 선뜻 그 친구와 가위바위보를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가위바위보가 운이라는 요소에 기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위바위보 대회 우승자 출신과 내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 결과와 과정들이 운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위바위보의 공정성에 치명타를 날리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학습'의 개입이다. 게임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패턴은 더욱 뚜렷해지며 경험에 기반한 전략적 요소의 판단은 더욱 강력해진다. 그리고 이 판단의 정확성을 좌우하는 지능이라는 것이 개입하면서 재능이라는 천부적인 영역까지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어렸을 때 내 동생은 가위바위보를 하면 늘 첫 번째로 가위를 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단판을 하는 경우에서는 웬만해서는 지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나와 동생의 가위바위보가 공정하고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최소한의 공정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공정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경험적 영역의 학습이 개입하는 상황이나,  가위바위보 우승자와의 대결처럼 사람에 따라서 "때때로" 공정하고 공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결코 완전하게 공정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위력이나 판단이나 전략이나 재능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을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고 공정한 '가위바위보'를 제안해야 한다. 만약 위 상황들에 개입으로 공정하지 못하다는 확신이 들면, 언제라도 망설임 없이 묵 대신 주먹감자를 날려주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그것이 공정이라는 착각으로부터의 자유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 될 것이다.


공정한 가위바위보 이렇게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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