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단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초록색 잎들로 선명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저렇게 많은 잎들이 새로 나고 자라고 푸르러졌을까. 이렇게 밖을 내다본 지 한참 된 것 같다. 지난번 입원 때에는 나무의 메마름과 앙상함을 보고 나의 몸을 생각했다. 거칠고 야윈 가지가 뻗어나간 그 끝을 바라보며, 하늘을 찌르려는 뾰족한 창을 생각하고 쓴웃음을 지었었다.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야위었던 그날의 그 나무는 그저 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졌던 이미지였던 건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나무는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생명을 가득 펼쳐 보이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거칠고 앙상한 몸에 자신을 대입했던 지난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절이 바뀌면 잃은 듯했던 생명을 다시 싹 틔우는 나무, 앙상한 계절을 지나고 지날수록 더욱 농염한 자태를 온몸으로 익혀가는 나무, 자연의 순환을 거듭하여 나이테가 늘어갈수록 그 푸르름이 더욱 풍성해지는 나무.
-언니 담배 좀 그만 피우면 안 돼? 수술 날짜 잡아놓고 왜 이래 진짜!
-수술 날짜 잡아서 피우는 거야. 수술 전에 많이 피워 둬야지. 수술하고 나면 못 피울지도 모르는데.
-아우 진짜 나 이제 병원 안 와!
-소희야, 나도 이렇게 쉬는 거야. 연기를 몸속 깊이 마시다 보면 그제야 사는 것 같다.
-언니, 그래도 좀 줄여. 나 너무 걱정돼.
-그런데 나 눈 밑에 주름 너무 많지 않아? 요즘 주름 펴는 시술 하고 싶더라. 흐흐흐.
소희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미간을 찡그리고 입을 모았다가 그만 두려는지 이내 얼굴의 긴장을 풀어버리는 듯 보인다. 비상계단으로 기어코 데리고 와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하려는 내게 소희는 계속 짜증 섞인 표정이다. 나는 다시 흐흐흐 웃는다. 이런 나의 마음을 젊고 싱싱한 너는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성을 도려낸 다는 것,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이 무엇 일지 생각해본다. 너의 나이였던 20대에는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있었다. 실패도 아름다울 나이였다. 나의 몸은 생동감으로 가득했고 가꾸지 않아도 내면의 빛이 외모의 부족함을 메우기에 충분했다. 30대에는 20대의 실패에서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나의 능력치를 끊임없이 자각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보다는 나의 능력 안에서 무언가를 쌓아가는 시기였다. 돈을 모으고 인맥을 쌓았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외모를 꾸미려고 했다. 20대의 무모한 생동감은 없지만 서서히 편안한 아름다움을 쌓아간다고 느꼈다. 마흔이 넘으며 아름다움은 물질적 여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정과 몸짓에서 묻어 나오는 여유로움이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그동안 쌓인 커리어와 인맥, 자산은 지난날의 치열함에 대한 보상이었다. 가끔 눈 밑의 주름과 피부의 잡티를 지울 경제력은 그 아름다움을 지속시켜 줄 수 있었다. 40대에 접어들어 그런 여유를 부릴 때 즈음 나의 병을 알았다. 병명은 유방암. 2기 말이었다.
27살의 막내동생 소희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냈다. 누구보다 나에게 의지하며 자란 소희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수줍게 남자 친구를 소개하는 성인이 되어 친구로 느껴지던 무렵 나의 병을 알았다. 소희는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게 받았던 보살핌을 갚아주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했고 수시로 반찬을 해서 가져왔으며 휴일은 나와 함께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 마음이 느껴질수록 소희에게서 멀어지는 나의 마음을 소희는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를 도우려는 애씀에 알 수 없는 반발심이 일었다. 걱정하는 눈빛과 표정의 바탕에 젊음이 있다는 사실에 질투가 느껴졌다. 약을 먹고 치료를 받으며 서서히 나무껍질처럼 메마르고 굳어가는 나의 피부와 잃어가는 머리카락에 좌절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내 곁에서 홍조 띤 소희의 볼과 풍성한 머리숱을 볼 때면 화가 치밀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자책하며 소희와 산책을 한다. 벤치에 앉아 소희가 싸온 포도를 한알씩 입안에 넣는다. 달콤한 포도를 꼭꼭 씹으며 날씨를 이야기하고 각자의 하루를 이야기하고 수술 이야기를 꺼낸다. 갑자기 쓴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잡았던 포도알을 놓아버렸다.
-이제 그만 가. 조금 있으면 D가 올 거야.
소희는 걱정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사람 다시 만나?
-응... 내가 연락했어.
-언니를 다시 만나겠대?
예전 그 일은 내가 착각한 거라고 얼버무리고 소희를 보낸다. 이제 곧 D가 올 것이다. 설레는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난다. 그에게 의지하는 나약함을 거부고 싶은, 나의 그 자존심을 버리기로 했다. 지금은 그냥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를 기다리며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한다.
2.
은희를 만나러 병원에 왔다. 누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은희는 내게 미소를 보낸다.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니 옅게 화장도 한 것 같다. 그 얼굴을 보니 20여 년간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흘러간다. 각자의 연애를 지켜보고 짧은 결혼 생활과 이혼을 겪은 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게 된 지난 3년.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가끔 몸과 마음을 나누며 쿨하게 살자고 합의했었다. 그러나 공간의 공유를 통해 처음의 그 마음은 서서히 무너졌고 경계는 사라졌다. 은희와 나는 행복했다. 낮에는 서로의 일터에서 치열하게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불행은 그런 순간에 찾아온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로, 마치 지속 가능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듯이. 병원에 다녀왔던 은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저녁식사 후 늘 그랬듯 함께 와인잔을 기울이다가 은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한마디를 던졌다.
-나 아프대.
그리고는 잔을 비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테이블에 남아 며칠 동안 불안했던 나의 마음을 가늠해보려고 했다. 어떻게 은희를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제 우린 처음의 합의대로 쿨할 수 없었고 나는 은희를 책임져야 했다. 한동안 은희는 혼자서 치료를 받고 나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은희를 존중해주고 싶었고 나는 평소와 똑같이 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식욕을 잃고 몸이 앙상해져 가며 머리카락을 잃어가는 모습에 은희는 날카로워졌다. 그런 은희의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은희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저녁시간에는 와인 대신 차를 끓였으며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거실의 커다란 거울과 집안의 구석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거울들을 치워버렸다. 시간이 지나며 나의 노력으로는 은희의 고통과 상실감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달으며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와 함께 나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구멍이 자리했다. 자신감 넘치고 활기차던 은희가 그리웠다. 나 역시 은희의 에너지에 많이 기대어 살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은희가 입원했던 지난 2월 은희 곁에서 소희가 간병을 하며 지냈다. 소희는 매일을 곁에 있지는 못했지만 퇴근을 하고 자주 들르고 가끔은 보조침대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지쳐가는 나의 모습과 달리 소희는 언제나 밝아 보이려 애쓰곤 했다. 소희를 보고 있으면 침대에 누워있는 은희가 왠지 낯설어 보였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내게 웃어주고 재치 있는 말로 나와 끊임없이 대화하던 은희가 아니었다. 내 안의 알 수 없는 구멍의 깊이와 넓이가 커질수록 은희 옆의 소희가 보였다. 간호를 하는 소희를 보며 은희의 예전 모습이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갈수록 나도 모르게 소희의 모습에서 은희를 찾고 있는 나의 생각과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병원의 간이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며 간호하는 소희에게 저녁을 사준다며 불러냈다.
-소희야 힘들지?
-아녜요, 언니인데요 뭘.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자며 들어간 호프집에서 소희와 함께 은희 이야기를 하며 취하도록 마셔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소희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맥주잔을 잡고 있던 소희의 손을 잡아버린 것밖에는.
다음날 병원에서 은희가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소희가 전화해서는 그냥 집에 가겠다고 하던데?
-아 글쎄... 별일 없었는데...
나는 은희와의 대화가 어색해져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퇴원한 은희는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나는 왠지 은희와의 시간이 불편해서 집에 돌아가는 시간을 계속 늦추게 되었다. 대화 중간중간의 나의 주저함과 우리를 둘러싼 어색한 공기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은희는 무언가를 감지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헤어지자.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지도 변명을 하지도 않았고, 표면적으로는 처음의 그 마음처럼 쿨하게 헤어지게 되었다.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지냈다. 고통스러움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고 해방감을 느끼는 나에게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매일 아침을 자괴감에 취해서 일어났다. 은희의 고통을 나눠주지도 은희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잠시라도 소희에게 흔들렸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어제 은희에게 전화가 왔다.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라는.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포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가야 한다. 병원에 있는 은희를 만나기로 했다.
3.
언니가 병에 걸렸다. 나를 키워준 언니, 나의 현재를 만들어준 언니.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는 자신만을 위해 사는 오빠와는 달리 마치 부모님처럼 나를 보살펴주었다. 어린 시절에는 갖은 투정과 짜증을 받아주었고, 청소년 시절에는 용돈을 주고 대화를 해주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함께 술을 마셨다. 언니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는 나의 세상을 둘러싼 안전하고 견고한 벽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강인한 언니가 내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자각하는 시간이었다. 언니의 병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금방 회복될 거라고 믿었다.
포도송이에서 포도알을 떼어내어 깨끗이 씻었다. 오늘은 입원한 언니를 보러 가기로 했다. 언니는 내가 곁에 오래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의 젊음을 병원에서 소진시키지 말라며 가끔 얼굴만 보러 오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 말을 흘려듣고 계속 곁에 있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언니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해서 잠시 머물고 돌아온다. 병원에서의 언니는 아프기 전과 많이 다르다. 강한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던 언니는 아픈 이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언니의 축 처진 어깨를 보는 것이 속상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공허함에 마음이 아팠다. 창밖을 바라보는 언니의 얇고 날카로운 등을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가끔 나를 향한 적대적인 눈빛을 보며 당황한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참아내기로 했다. 언니의 고통을 대신 겪을 수 없지만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오늘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함께 산책을 하고 나는 늘 그렇듯 잔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언니는 D가 온다며 나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언니의 병을 알고 나는 D에 대한 나의 마음이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았던 것 같다. 언니의 곁에서 미소 짓는 그 사람이 좋았다. 성공한 사람의 여유, 자신감을 동경했다. 그 동경하는 마음이 언제 이런 애틋한 마음으로 발전했는지는 모르겠다. 언니와의 행복을 빌어주면서도 가끔은 나와 함께 하는 D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나는 이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각만으로도 벌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지옥으로 떨어져도 마땅하다고 느꼈다. D와 저녁을 먹던 밤, 둘은 맥주를 마셨고 그동안 쌓여있던 고단함에 금방 취해버렸다. D는 내가 안쓰럽다며 손을 잡아주었고 나는 마음을 말해버렸다. D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없던 일로 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D와 헤어진 언니의 건강은 더욱 안 좋아졌다. 나는 어쩌면 언니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언니의 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언니에게 찾아가는 길이 불편해졌고 언니를 향한 나의 마음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오늘 D가 언니에게 온다고 한다. 마음이 내려앉는다. 절망감인지 기대감인지 헤아릴 수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에게 언니가 말한다.
-소희야, 나는 너를 알아. 그리고 믿어.
언니의 눈빛에 채워진 감정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려고 했다. 언니의 말에 나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