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두야, 조상두!!! 빨리 일어나!!!! 시간이 몇시인데 아직도 이불 속이야! 으이구 내가 이 나이에 나이 서른 넘은 아들놈 아직도 뒤치닥거리 하면서 살아야 하다니... 팔자 사납다 정말!"
오늘도 엄마 잔소리에 눈을 떴다.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아서 밤을 새우고 새벽녁에 잠들었는데... 시계를 보니 열시다. 아 조금 더 자야 하는데.
나는 30년째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작가이다. 10살때 학교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이후로 지금까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변한적이 없다. 공모전에 수없이 출품을 하고 여러 출판사에 나의 글을 투고했다. 몇년전 한 출판사의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곧 성공한 대형작가가 될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뿐이었다. 미래를 걱정하며 구박을 하는 엄마에게 '잠깐만 기다려. 올해가 가기전 내가 쓴 글로 백만원이라도 벌어올께!'라고 큰소리 친다. 그리고 꿋꿋이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는다. 지금은 이렇게 눈치밥 먹으며 하루하루 살고 있지만 언젠간 나는 성공할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버리지 않고 살고 있다.
오늘은 피아노학원에 가는 날이다. ‘쇼팽피아노학원’. 지난 달 길을 걷다가 동네 피아노학원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들려오는 곡은 내게 글을 쓸 영감을 불어넣어줄 음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음악이 끝나자 망설이다 학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베이지색 니트에 네이비색 펜슬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긴머리를 늘어뜨린 여자의 얼굴과 표정을 본 순간 내가 학원에 들어온 이유를 잊고 머뭇거렸다. 자신을 원장이라고 소개한 이 여자는 분명히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다. 갑자기 나의 파란 추리닝과 삼선슬리퍼가 신경쓰인다.
"저.. 조금 전 연주하신 곡의 제목이 뭔가요? 너무 좋아서..."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 녹턴 20번이예요."
미소 짓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나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빨개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서둘러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와서는 집으로 달려갔다. 방에 들어가 핸드폰으로 열심히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 녹턴 20번(Chopin: Nocturne No.20, Op.Posth) 을 검색했다. 섬세한 이 곡을 여러번 듣다보니 나의 감수성이 더 풍부해진 느낌이다. 며칠동안 이 곡을 연속재생했다. 밤의 정서를 이토록 절절하게 이끌어내는 음악이 이 세상에 과연 더 존재할까. 나의 내면을 강렬하게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상상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글감이나 문장이 떠오를 것 같은데 이 곡만 듣다가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위대한 작곡가는 어떤 것에서 영감을 받아서 곡을 쓰게 되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이 곡을 연주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를 하다보면 쇼팽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은 모두 하나로 통하는 법이니까. 그러려면 피아노학원으로 가야한다. 꼭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생각을 하자 낯익은 원장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였다. 신경써서 옷을 입고 향수도 뿌렸다. 원장에게서 나의 추리닝과 삼선슬리퍼의 기억을 지워주고 싶었다.
"저...연주하고 싶은 곡이 있어서요. 딱 한 곡만 연습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일주일에 세 번, 아이들 사이에서 피아노 강습을 받게 되었다. 오직 녹턴 20번을 연주하기 위한 강습이다. 피아노를 배워본 적이 없으니 건반을 누르는 타법부터 익혀야 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자꾸 독수리타법이 되어버리는 나의 손가락을 제어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이런 내게 원장님은 천천히 하라며 웃어준다. 그 웃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강습이 끝나고 원장님과 짧은 대화를 하는 것이 좋았다. 나의 시시한 물음에도 웃으며 부드럽게 응답해주는 원장님에게 점점 더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피아노를 치고 온 날은 밤이 새도록 글을 썼다. 감수성은 깊어졌고 표현력은 풍부해진 것 같았다. 글은 녹턴의 멜로디처럼 막힘없이 훌러나왔다. 조만간 공모전에 출품할 글이 하나 완성될 것 같다. 나의 감각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해서 일까. 연습하는 곡이 쇼팽의 곡이고 쇼팽 피아노 학원을 다녀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당분간은 피아노 학원을 더 열심히 다녀야겠다. 원장님에게 내가 쓰는 글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 없이 내 글을 이해해 줄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오늘은 피아노학원에서 강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기 전 대기실 책장을 들여다보았다. 피아노 관련 서적들 옆으로 문학작품들이 꽂혀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꽤 많아서 놀라웠는데 그 사이에 종이로 엮인 나의 유일한 글, 출판사공모전 수상작품집이 꽂혀있었다. 그 책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원장님은 내 글을 읽었을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흥분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왔다. 원장님이 처음부터 낯익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고심해봤다. 나와 겹치는 취향, 나와 비슷한 성향 때문일까. 그래서 원장님과의 대화도 좋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학원에 가면 꼭 원장에게 나의 글에 대해 이야기 해볼 것이다. 함께 저녁식사도 하자고 이야기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