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by 김범인

눈을 뜨니 세상의 어둠은 사라졌다.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다가 새벽녁에 잠이 들었다. 어젯밤에도 영감을 얻으려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 녹턴 20번(Chopin: Nocturne No.20, Op.Posth)을 연속재생했다. 이 세상에 밤의 정서를 이토록 절절하게 이끌어내는 음악이 과연 더 존재할까. 밤이 깊어질수록 피아노의 음색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의 밀도를 높이고, 피아노 선율을 타고 어둠의 농도는 짙어진다. 왜 밤을 담은 곡인지 알 것 같다. 밤에 깊이 빠질수 있는, 나의 상념에 젖어들 수 있는 시간이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악과 어둠을 관통하는 기록. 비극을 써야겠다. 비극이야말로 진짜 인생을 함축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내가 쓴 이 글을 재인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 글을 보면 재인도 나의 재능을, 나의 마음을 알아줄 것 같다.


재인을 만나기 위해 나오고 싶지 않았던 모임에 왔다. 남자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재인의 모습을 힐끗 바라 보았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검정색 수트를 입은 재인은 여전히 자신감 넘치고 멋있다. 작은 체구에도 주변에 앉아있는 어떤 남성보다도 강인해 보인다.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듯한, 구겨지고 낡은 나의 청바지와 티셔츠가 왠지 부끄러워 맥주만 연신 마셔댔다.

"요즘 어떻게 지내? 아직 글 쓰고 있어?"

재인이 물었다.

"아... 어...아직.."

내가 쓰는 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다른 사람들이 없는 우리 둘만의 자리에서 하기 위해 대답을 얼버무렸다. 술자리가 깊어져 모두들 적당히 취하면 둘이서만 대화할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흥미 없는 이야기들이 오가는 자리를 피해 잠시 담배를 피우러 거리로 나왔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데 내 곁으로 재인이 다가왔다.

"넌 언제까지 그렇게 글만 쓸거야?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앞 길 생각해야지."

".........."

"넌 여전히 꿈만 꾸며 살고 있구나. 현실을 좀 제대로 봐."

내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 글을 읽으면 재인의 생각도 바뀔 것이다.

"난 사실..."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재인을 데릴러 온 남자가 보였다. 검정색 벤츠를 타고 온 그가 차에서 내렸다. 키가 큰 그는 세상의 어둠은 경험해보지 못한 천진한 모습이다. 그 천진함은 아마도 풍요함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빛의 바탕으로 발현된 그 천진함은 세상의 어둠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듯한 저 눈빛이 싫다. 그는 웃으며 그를 반기는 재인 옆의 나를 본다.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나는 왠지 모를 패배감이 느껴진다. 나에게서 적대감을 느꼈는지 그는 짧게 인사하고는 재인을 태워서 가버린다. 차가 떠나고 길에 남겨진 나는 다시 한번 잔인한 거절을 당한 것 같다. 오늘도 재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렇게 돌아가야 하다니, 기대가 어긋난 것에 좌절감이 느껴졌다. 나는 친구들이 있는 가게 안의 테이블로 돌아갈까 하다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에 돌아와서 노트북을 켜고 재인에게 보여주려던 글을 보았다. 다시 읽어 본 어제의 글은 모두 거짓이었다. 어둠 속의 빛을 구하는 그 글은 모두 가식처럼 느껴졌고 허황된 이야기들이었다. 이 글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 나는 글을 완전히 삭제해버리고 노트에 적었던 짧은 메모들도 모두 찢어버렸다.

다시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쇼팽의 녹턴 20번을 다시 듣는다. 내면을 강렬하게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상상한다. 피아노 위의 손가락은 춤을 추는 듯이 구부리고 오무리고, 떨림이 반복된다. 다시 밤이고 나의 내면도 어둠이다. 내 몸이 연주하는 선율, 리듬이 나의 가슴에 새기는 굴곡에 집중하려 한다. 음악이 멈춘 짧은 마디에서 나의 호흡도 멈춘다.

비극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춘다. 음악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몸은 분절된 동작이 없도록 최대한 둥글게 이어진 곡선을 표현하려고 한다. 내 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손가락의 리듬을 몸으로 표현하고 싶다. 땅과 가까워지도록 노력한다. 하늘을 향하려 노력한다. 달을 향해 달려가려는 몸짓을 해보인다. 음악을 나의 몸으로 표현해내고 나니 내 안에 글이 가득 차오른 것 같다. 문자들을 꺼내어보고 싶었다. 나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이 음악은 완벽하다. 영감의 원천이 될 완벽한 것을 내 몸에 새긴다면 나도 완벽해지지 않을까?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 글을 써내고 싶다. 재인에게 내 글의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곡을 정복하기로 했다. 내 몸이 이 곡이 된다면 나도, 나의 글도 완벽해질 수 있다. 이 곡을 내 몸에 새겨넣어야겠다. 책상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뾰족한 물건을 찾았다. 서랍 깊은 곳에 송곳이 있었다. 그리고 책장에 놓여있던 만년필 잉크. 이거면 충분할 것 같았다. 왼쪽 팔에서부터 시작했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선을 그리고 리듬을 내 몸에 구현할 음표들을 그려넣었다. 내 몸을 흐르는 음표의 굴곡을 바라보니 내 귓가에 음악이 재생된다. 쇼팽의 영혼이 내 안에 들어온 것 같다. 나의 신체에 새겨진, 나의 몸이 연주하는 영혼을 바라본다. 나는 이제 완벽해진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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