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을 줄 수 있다면, 라면

by 김범인

지금은 혼밥 하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아이 엄마가 되었지만 20대 중반, 회사를 다니며 바쁘게 살던 그때에는 혼밥 하는 것이 그리 편치 않았다. 야근이 많았던 직업의 특성상 점심, 저녁식사를 거의 회사 동료들과 함께 하고 야식과 음주가 잦아 늘 시끌시끌, 북적북적한 식사를 하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혼자만의 조용한 식사시간을 갖긴 했지만 진정한 여유를 느끼기엔 난 너무 바쁘고 세상은 늘 시끄러웠다.

그 시절, 회사를 다니며 매주 한 번씩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완치가 어려운 피부질환이 있는데 대단치 않은 병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침 회사 업무도 비수기에 접어들 때인지라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주 1회, 2시간 정도 병원을 가기 위해 외출을 하기로 했다.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성수기를 지나온 터였으므로 그 시간은 내게 꿀처럼 느껴졌다. 회사는 시청 앞이었고 병원은 숙대입구였는데 지하철을 타고 가서 병원의 예약된 시간에 차질 없이 진료를 받고 나면 시간은 40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1시간 20분은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허락된 시간이다. 나는 돌아오는 길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일정을 짠다. 일단 자유를 만끽하며 회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회사로 가는 길은 서울역과 남대문 시장을 통과해서 가는, 갈 때마다 새롭고 흥이 넘치는 길이다.


점심시간을 포함해 외출을 했기 때문에 혼자서 밥을 해결하고 들어가야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마음에 드는 식당에 들어가기로 했다. 너무 크고 사람이 많은 식당이면 곤란했다. 분명 나는 그런 곳이라면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쫓기듯 나올 것이다. 어색한 혼밥을 하더라도 나의 감수성에 작은 조각이라도 보탬이 되는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었으면 했다. 그런 곳을 찾는 것은 운에 맡기기로하고 병원에서 나와 서울역 쪽으로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허름한 분식집이 나왔다. 분명 누군가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곳이다. 그렇지만 그 큰 대로에 유리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마치 시골 동네에서 마주칠 듯한 분식집이 있다니! 왠지 아늑해 보이는 그 곳이 마음에 들어 라면을 먹기로 했다. 라면이라면 맛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 넉넉잡아 10분이면 내 테이블에 음식이 올라올 수 있는 '한국형 패스트푸드'의 대명사 격 메뉴가 아닌가. 들어가 보자. 미닫이문을 열어 들어가 보니 작은 공간에 테이블은 몇 개 없었고 마주하고 있는 주방은 제대로 누추하다. 그러나 햇볕이 잘 드는 그곳의 오래된 테이블과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빛바랜 수저통, 냅킨통을 보니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진다. 자리를 잡고 라면을 주문했다. 라면을 기다리면서 갖고 갔던 책을 뒤적이다가 아주머니가 라면을 끓이고 있는 주방을 탐구하는 자세로 바라본다. 아주머니는 식당용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고 양은 냄비를 올린다. 강한 화력에 냄비의 물이 금세 팔팔 끓으면 미리 열어서 쌓아두었던 라면 중 한 덩어리를 넣고 역시 미리 다 열어서 사발에 한데 쏟아두었던 라면스프를 수저로 푹 떠서 넣는다. 그리고 호프집에서 쓰이는 1700ml 피처에 반쯤 채워져 있는, 미리 풀어놓은 계란물을 피처의 주둥이로 살살 따라 정량을 국물에 넣는다. 수없이 여러 번 같은 일을 반복하여 달인의 경지에 오른 이의 빈틈없는 몸놀림이다.


드디어 내 앞에 자리 잡은 라면은 강한 불에서 딱 맞는 시간을 끓여내어서인지 눈으로 보기에도 탱글탱글하다. 국물 전체에 걸쳐 색상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계란의 연노랑색과 파의 초록색은 국물의 진한 주황색 빛깔을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시각적 효과를 높인다. 나는 급하게 후루룩 라면을 입안에 넣고 면의 탄력을 느끼며 씹는다. 그리고 국물을 맛본다. 뭉친 구석이 하나 없이 국물의 전체에 고르게 분포해 있는, 나는 구현해내지 못하는 계란이 풀린 이 국물의 농도를 좋아한다. 라면에 곁들이는 김치는 식당에서 늘 먹었던 듯한 익숙한 김치의 맛이다. 갓 만들어 급하게 익힌 듯한 아삭하지만 신맛. 그리고 단짠단짠 반달 모양 노란 단무지는 면과 함께 씹으면 아삭함이 배가 된다. 나는 이 즐거움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공깃밥을 추가로 시킨다. 라면의 탱글함을 급하게 음미하다가 끝나버릴 듯한 이 시간을 연장시키고 싶다.


라면을 먹고 공깃밥을 국물에 말아서 국물까지 싹싹 먹고 나면 회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배도 부르지만 세상의 좋다는 영양성분을 온몸에 흡수시킨 것 같다. 분명히 내가 먹은 것의 대부분은 탄수화물과 나트륨일 터인데 나는 거기에 자유로움과 평화로움, 깊은 휴식까지 과잉 섭취하고 나온 기분이다. 라면을 먹으며 뭐 이렇게까지 행복해하냐고? 아마도 1시간 20분의 자유 중 1분 1초도 허비하지 않고 아낌없이 즐길 수 있는 스피드로 나온 음식과 그것을 즐길 장소까지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맛이야 뭐... 한국인에게는 검증된 맛이 아닌가. 특히나 장인의 주방에서 그의 능수능란한 솜씨로 끓여낸 맛인데.

이 시간의 평화로움과 만족감을 라면이 아니라면 그 어느 것이 대신 줄 수 있겠는가. 진정 노벨평화상을 인간이 아닌 무엇에 줄 수 있다면 라면에게 수여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분식집의 유리로 된 미닫이 문을 닫고 나오며 나는 서울역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시장을 통과할 때 뭔가 이쁜 액세서리라도 발견하면 사가야지 생각한다. 다양한 색채와 온갖 흥미로운 소리들, 별별 냄새들을 느끼면서 회사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한 주 뒤의 자유로운 이 시간에 다시 그 분식집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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