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신념의 무기화: '나만 옳다주의'의 함정

최창집,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1>

by 반비

절대적인 것은 늘 매혹적이다. 거기엔 그 어떤 회색지대도 없으며, 진정한 답을 찾아 나서는 고된 여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절대성은 가치관 혹은 신념에 적용될 때 가장 탐스러워진다. '이 쪽'과 '그 쪽' 사이에 선을 긋는 가장 쉬운 방법이고,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 혹은 우리는 - 알게 모르게 흑백론을 즐기게 된다.


"부먹이라고? 탕수육 먹을 줄을 모르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가 없지."

"충격적이네. 그 정치인을 지지한다니."

(위의 문장들이 두서 없다고 느껴진다면, 오늘 저녁 식사에서 써먹어보기를 권한다. 그 이후의 식사 분위기는 책임지지 않겠다.)


단순한 문제들조차 갈라서게 만드는 이 절대성은 논의의 규모가 커질 수록 괴수로 변해간다. 가족을 위해 옳은 길, 아파트를 위해 옳은 길, 마을을 위해 옳은 길 ... 벌써부터 고성이 오고가는 장면이 연상될 것이다.


절대성이 파열음을 몰고 다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절대성 속에서는 오직 옮음과 그름 만이 존재한다. 내가 옳은 쪽에 서 있다면 천만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곧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가치관이 완전히 개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판결이고, 우리가 고집불통인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다.


모든 가치관 공유는 적개심을 일으킬 뿐이어서 입 다물고 흐리멍텅하게 사는 것이 차라리 편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절대성을 빌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때, 그 사안의 복잡성, 그리고 그에 따라 급격하게 좁아지는 타협의 여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 글의 주제를 다루기 위해 스케일을 국가로 확장시켜보자.

"이 나라가 진정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은..."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아무리 선한 정치인이라도 한 번쯤은 내뱉고 싶게 만드는 선언이다. 스케일이 커질수록 그것에 대해 ‘정말 옳은 방향의’ 진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구미 당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눈독 들였던 사과 뒤엔 중대한 대가가 함께 있었듯이, "너무나도 숭고해보이고 이 사회를 좀 더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 정치적 신념의 절대화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서로 분리된 개개인의 내면에서 조용히 뿌리 내리는 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자가 어떤 신념에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할 때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신념에 동조하는 광범위한 세력을 형성하고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목표를 관철시킬 뿐만 아니라 그에 반하는 모든 의견을 제거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한국의 출산율이 저조한 이유는 과거 ○○○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것이다."


수많은 원인들이 낮은 출산율이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 청년 실업, 사교육 경쟁, 감당하기 어려운 집값, 비혼주의의 확산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의 무능함"으로 응축시킨 것이다.


집요한 노력 끝에 여론까지 호응해준다면, 흐름에 편승하려는 수많은 정치조직들이 동참할 것이고, 이내 변화를 요구하는 한 동력이 되고 대대적인 정책 변화 및 세력화가 뒤따르게 된다. (이 과정은 절대화 과정을 거치치 않은 개혁에서도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결정적 차이는 달성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편협함에 있다.)


위의 개념과 예시로부터 몇 가지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다.

1. 정치적 조직에 의한 신념의 절대화는 사회 체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2. 전면적 정책수정과 세력화는 곧 새로운 이권의 형성을 의미한다.

3. 절대성이라는 특성상, 만약 그 신념이 관철된다면 그에 반하는 의견들은 결과적으로 크게 약화되어서 감시의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변질의 위험이 훨씬 크다.


3번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소설가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에서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다시 말해, 가치를 성역화시키고 그것이 절대선(-善)임을 강요하면서 그 본질은 오염시켜 껍질만 남게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변질의 의미다. 그리고 킬링포인트는, 이것이 실제로 가능하며 몇몇 국가들은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이미지 출처: Medium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실로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 (베버, 본문 p217)


책의 엮은이인 최창집은 한 정치행위자가 개인적인 신념을 가지고 어떤 윤리적 목적을 추구할 수 있어도, 그것과 상충되는 어떤 타협도 거부하고 남을 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그 윤리는 무책임하고 위험하다고 말한다.


베버는 같은 선상에서 무장과 살상행위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했던 맹목적인 평화주의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보다는 치명적인 위협에 빠뜨린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단 20세기만 보더라도, 이데올로기가 극단적으로 절대적인 가치 및 목표가 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역사는 이미 목격한 바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의 말살이야말로 독일을 위대하게 만들 방책이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당이 지정한) '부르주아 계급'을 섬멸해야 인민의 평화가 찾아온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통해 당 내 '반동세력'를 정리함으로써 혁명이 완수된다고 믿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다. 외침들은 실행에 옮겨졌다. 결과는 참혹했지만, 지도자들이 약속했던 낙원은 도래하지 않았다.



전후 한국정치사 역시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고자 하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군사정권은 주요 반대세력인 민주화세력은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정권은 그들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집단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오늘날까지 종북프레임이 정치판에서 일정량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군부의 그러한 노력은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진보진영은 이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과거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와 구별되는 지점 중 하나가 정치적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출범 직후에는 모호하게 정의된 '적폐청산'을 통해 정책노선을 전방위적으로 수정하였고, 근래에는 이른바 '친일-반일' 구도를 통해 동력을 확보해왔다. 정확이 무엇이 적폐인가? 한 진영전체가 친일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진영논리와는 별개로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문점들이다.


여러 목소리들이 상호작용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신념의 절대화는 필연적으로 분열과 대립을 잉태한다. 작년 정국을 시끄럽게 했던 '조국 사태'는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조국이라는 한 개인의 거취를 놓고 사법 시스템의 미래와 검찰 개혁에 대한 논쟁이 오고 갔다는 것 - 그리고 그 논쟁이 광화문을 다시 두 동강 냈다는 사실 - 은 나에게 비참하게 다가왔다.


이미지 출처: 월간중앙


"그래서 어쩌라는거야?"라는 반문이 나올 법하다. 왠만한 사회적 사안은 다 복잡한데, 그것에 대해 확고한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피하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는 것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지는 태도는 별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글을 쓰고 싶다.)


이 순간에도 뉴스 섹션에는 당신의 가치관을 사로잡으려는 사이렌들이 도사린다. '우리는 옳으며 저들은 글렀다'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동조의 손길을 호소하고 있다.


숨을 고르자. 그 손 덥석 잡기 전에 한 번만 더 차갑게 들여다보자. 악마는 정말로 디테일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