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집,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2>
제20대 국회의 폐원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이 당론을 어겼다는 이유로 금태섭 의원에게 '경고' 처분을 내린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파문이 일었다. 금 전 의원은 민주당이 사활을 걸고 밀어붙인 공수처법의 표결에서 기권표를 던진 유일한 민주당 의원이었고, 그 전 '조국 사태' 땐 공개적으로 자성을 촉구한 바 있다.
소신의 아이콘인 금 전 의원에 대한 때늦은 징계는 민주당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을 빚었다. 비판의 핵심은 이 징계 결정이 당 내 의견의 다양성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김해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이 사안이 "국회의원의 양심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다루는 중대한 문제"라고 역설하며 또 다른 소신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한편 원희룡 제주지사(미래통합당)는 "민주당에 '민주'가 없다"라며 새누리당 시절 소신을 지키다 위기에 처했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소장파의 고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특정 정당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승민이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핵폭탄급 소신발언을 한 후에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를 기억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99년엔 두 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동티모르 파병 관련 당론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출당이라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어디서나 비주류는 고달프다지만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정당들의 '미운 오리 새끼 죽이기'는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당혹감을 준다. '당 내 이견도 포용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베버에겐 금태섭과 유승민의 이야기가 그리 놀랍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초기의 정당 발전을 분석한 결과 그는 엄격한 규율과 집단적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정당이 도래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당은 선거에서 도태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당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귀족 추종자 집단이었는데, 이는 특정 지역의 권세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 클럽"이었다. 여기에 관계된 사람들의 관심사는 지역 권세가를 통해 자신의 현안을 처리하는 것이지, 어떤 국가적 차원의 목표나 정책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베버는 이러한 정치조직을 명사(名使) 정당이라고 불렀는데, 곧 계급∙직업∙이념에 따라 지역의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익집단들을 의미했다.
명사 정당은 오늘날의 정당과는 어떤 결정적인 차이가 있을까? 첫째, 지역 간 단합이 매우 적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지역 현안에만 관심을 뒀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또 명사 정당은 매우 느슨한 조직이었다. 모임은 '필요할 때에만' (ex: 선거철) 있었고, 당직자들은 당직을 부업이나 명예직으로 여겼다.
이렇듯 흡사 사교모임, 내지 서클의 모습을 띠던 정당들이 변화하게 된 건 인근 지역구들 간의 연대, 조직적인 선거활동, 그리고 국민들에게 광범위하게 어필할 수 있는 통일된 강령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였다. 다시 말해 통일된 움직임을 통해 전국적인 영향력을 얻으려는 열망이 주 동력이 된 것이다.
기존 명사 정당 시스템의 옹호자들과의 알력이 있었지만, 승리는 프로 정치인들의 것이었다. 느슨하고 따로 노는 지역 당 조직들만으로는 전국 선거에서 승산이 없을뿐더러 충분한 재원확보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매우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발전을 거친 근대적 정당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일까? 베버는 머신(machine)이라고 답한다. 엮은이 최장집은 머신의 정의를 "유권자의 표를 동원하기 위해 발달된 정당의 하부 조직"으로 내린다.
머신의 의의는 체계적 조직화를 통한 대중 동원에 집중함으로써 지상 목표인 "표 끌어오기"를 달성하는 데 있다. 머신의 활용은 정당의 관료화를 의미했다. 베버는 머신을 장착한 정당의 특징으로 매우 엄격한 규율의 발전과 지도부 내에서 존재하는 고도의 통일성을 꼽는다.
우리는 이 원리를 행정조직이나 군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엄격한 규율을 수반한 체계적 위계질서이기 때문이다. 머신 정당이 가장 확연하게 발전한 곳은 영국이었는데, 머신이 의원 개개인 위에 확실하게 군림함으로써 의원들은 그저 당론에 순종하는 거수기가 되었다고 베버는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볼 때 - 그리고 '머신 정치 대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 당론은 머신이 지향하는 방향성으로 (= 표 극대화를 위한 방향성), 당 전략은 머신이 목표 달성을 위해 채택한 경로로 (= 표 극대화로 인도하는 경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금태섭의 경우는 어떨까. 현 민주당의 지도부는 나사 풀린 머신에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시달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을 힘입고 152석의 거대 여당으로 올라섰지만 불과 2년도 안 돼 나락의 길로 떨어진 열린우리당의 기억이다.
열린우리당의 실패는 여러 요인을 통해 설명될 수 있지만, 여론이 등 돌린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당의 난잡한 규율이었다. 108명의 초선 의원들이 좋게는 다양한 개성, 나쁘게는 108개의 불협화음을 내면서 "108 번뇌"라는 조소까지 들어야 했다. 혼탁함 속에서 당론의 존재감은 옅어졌지만 지도부는 지도부대로 개혁법안들을 무리하게 강행했고, 이는 민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당은 16년 만에 거대 여당으로 복귀했다. 총선 직후 이해찬 대표는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교훈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지만, 앞으로 지도부가 당내 규율에 대해 가질 스탠스를 암시하는 메시지도 되지 않을까.
근대적 정당의 궁극적 목표가 표 극대화를 통한 집권이고, 머신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안된 수단이라면, 그것은 정치체제에 어떤 영향은 끼칠까? 베버는 머신의 결과물로 1) 엽관제 (표와 관직을 거래하는 관행), 2) 표 만능주의, 3)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리더의 출현을 들었다. (3)은 다음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려 한다.)
표 몰이에 기여하는 대가로 관직을 받는다는 개념은 - 이른바 낙하산 관행 - 분명 검은 거래의 표본이다. 베버는 "복종 ←→ 물질적/관직 보상"이라는 메커니즘은 고대 역사에서부터 항상 존재해온 방정식이라고 말한다. 정치에서의 기브 앤 테이크의 절대원칙이라고나 할까.
민주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과거 왕정제에서는 복종하고 보상을 바랄 지도자가 단 한 명 밖에 없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을 바라보고 리더에게 베팅할까? 베버는 두 가지를 드는데, 첫 번째는 그 리더를 추종하면서 얻는 내적 만족감이고, 두 번째는 그를 추종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관직의 보상이다.
다시 한번 악마의 관점에 서보려 한다. 내가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거대한 기계와도 같은 정당으로 하여금 오직 나를 위해 일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오직 '내적 만족감' 만으로 나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저와 함께 더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벅차지 않습니까?" 따위의 말로 머신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들은 집권 이후에도 꾸준하게 나를 지지해줘야 하는 기둥이다.
베버는 낙하산 관행을 선악의 관점보다는 하나의 필연적 현상으로 본다. 그는 정당 간의 모든 투쟁을 본질적 목표를 위한 투쟁인 동시에 관직 수여권을 위한 투쟁으로 보았고, 심지어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후자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주장했다. 그는 엽관제를 제한할 장치로 법 제정과 전문관료 양성을 들었는데,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1883년에 공무원 개혁법 (Pendleton Act)이 통과되기 전까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우체국 집배원까지 갈아치우는" 것이 관행이었다 한다.
정리하자면 '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가 당의 실질적인 목표다. 표 만능주의다.
... 경합하는 정당들이 일관된 [이념적] 원칙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관직 사냥꾼을 위한 조직이고 선거전이 있을 때마다 득표 가능성에 따라 정책 프로그램을 바꿔 버린다. (본문 p179)
최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의 '좌클릭 행보'가 많은 이목을 끌고 있다. '빵 하나 못 사 먹는 삶 속에 자유가 어딨느냐'며 기본소득을 주창하기도 하고, 정강정책에 "노동자의 권리"를 삽입하겠다고도 말했다. 그래서일까. 최근엔 민주당이 복지정책 관련 주도권을 통합당에 내줄까 봐 걱정에 빠졌다는 재밌는 기사까지 나왔다.
표 만능주의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민주당의 선거 4연승이 시사하는 바는 한국 사회 주류의 교체, 즉 대세가 산업화 세력에서 민주화 세력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위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에 따르면 정당들은 (유권자 전체의) 이념 분포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 원하는 정책을 따를 때 승리한다. 한국 유권자들의 경제정책 스탠스가 왼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김종인의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소명으로서의 정치⌋의 제4장인 <민주주의와 정당 체제>를 읽으면서 민주주의 정당에 대한 콩깍지가 많이 벗겨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정치의 본질은 권력을 향한 무한투쟁임을 기억한다. 정책실현을 위해서는 표를 최대한 많이 얻어야 했고, 이를 위해 군사조직을 연상시키는 당 조직이 정착되었으며, 그러한 정당의 '합리적' 운영이란 곧 합리적 포퓰리즘을 추구하는 정당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투표해야 바뀐다'라는 선관위의 호소는 항상 유효하다. 정당들이 몸집 불리기와 관직 배분에 전념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민심과 멀어졌을 때 그것을 교정할 유일한 방법은 선거이기 때문이다.
또 투표는 정치적 바보들에게 기회를 준다. 정치적 바보란 모두가 표 극대화와 선거공학에 몰두할 때 비효율적이고 수지맞지 않는 길을 고집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바보들이 당선된다면, 그들은 기존 정치체제에 좋든 안 좋든 거대한 균열을 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은 바보가 맞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역주의 망국론’이 대두되었고 양당은 줄기차게 타파와 변화를 외쳤지만, 정치인들은 차라리 그것을 이용하는 것을 즐겼다. 지역주의만큼 화끈하게 표를 끌어모으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0년 당시 종로구의 현역 의원이었던 노무현이 합리적인 정치인이었다면 답은 분명했다. 그대로 종로에서 재선을 노리던지, 보수계 정당으로 옮겨서 자신의 고향인 부산에 출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 머신의 요구를 충실히 따름으로써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계란에 바위 치기를 멈추지 않았고, 더 놀랍게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그 바위 치기에 움직였다. 선거의 힘인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평가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을 따라 민자당으로 들어가지 않은 노무현, 종로에서 재선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낙선을 무릅썼던 노무현은 한국 정치가 마땅히 그리워해야 할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