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타래 인간관계
나는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다. 호와 불호의 선을 선명하게 긋는 편인데, B는 불호에 속한 사람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의 말투가 조금 거슬렸던 것 같다.
하루는 걷다가 그를 맞닥뜨렸다. 적당한 안부 묻기로 빠르게 상황을 종료하려고 했는데, 밥 먹었냐는 질문에
"밥? 아 밥 아직 안 먹었지.
뭐 ... 같이 먹을래?"
할 말 없을 때 아무 말로 얼버무리는 습관이 대참사를 일으킨 것이다. B도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도 거절은 곧 우리의 불편한 관계를 재확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우리는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의욕 없는 대화 사이사이의 침묵은 식당에서의 분위기를 예고하는 듯했다. 순간 발상의 전환이 뇌리를 스쳤다.
'이리된 거 점수 좀 따 볼까? 접점이 아예 없는 사람도 아니고 ... 적어도 앞으로 마주칠 때 껄끄럽지는 않았으면 하는데...'
전략을 수정했다. 칭찬을 퍼붓자! 나는 네 편이라는 확실한 시그널을 주자. 그래서 밥 먹는 내내 눈에 불을 켜고 칭찬거리를 찾았다. 표정은 자연스럽게, 표현은 담백하게 하려 했다. 급조된 아첨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막상 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포크를 쉴 새 없이 들었지만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너무 울렁거려서 이후 한약 소화제를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에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환한 표정에 놀랐고,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났는데 언제 한 번 같이 식사하자는 제안에 더 놀랐다. 미움의 장벽이 사라진 곳엔 B의 매력이 보였다. 정확하지도 않은 첫인상으로 사람을 밀쳐내는 습관이 잘못됐음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잘 지내게 되었다.
위선이며 기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위선이 관계 회복과 자기반성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 기만은 노력 없는 방치보다는 낫지 않을까?
B에 대한 실험은 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나에게 꽤 큰 의의가 있었다.
"나에게 잘해준다 → 나도 잘해준다"라는 공식은 그간 수많은 폐단을 낳았었는데,
"내가 잘해준다 → 남도 잘해준다 (or 그대로다)"라는 대안이 마냥 비합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불편한 관계에 큰 반전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다 제치고 봐도, 후자는 적어도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
전자는 수동적이지만 후자는 능동적이다. 움직이기 때문에 어려운 걸까? 먼저 호의를 베푸는 것은 마치 오랜만에 이른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는 것과 같다. 너무 귀찮고 힘들지만, 막상 하고 나면 '왜 이제야 했을까'라며 뿌듯해하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험담은 쉽지만 칭찬은 어렵다. 칭찬보다 더 어려운 것은 진실된 칭찬이다. ⌈인간관계론⌋의 저자 데일 카네기는 아첨과 칭찬을 이렇게 구분한다:
인정과 아첨의 차이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 하나는 마음에서 나오고, 하나는 입에서 나온다. 인정은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지만, 아첨은 모든 사람들이 비난한다
카네기는 진솔한 칭찬의 비결은 디테일에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알고 쓱 훑어봐도 알 수 있는 건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가치 있게 여겨주는 태도는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중국 어학연수 시절 나의 멘토였던 C도 그런 분이었다. 아버지 뻘임에도 그는 언제나 존댓말을 썼고, 세상 물정 모르고 하는 소리도 늘 들어주려고 하셨다. 하지만 그분으로부터 가장 크게 배운 건 디테일의 힘이었다.
한 때 기업에서 일하셨던 C는 같이 백화점을 걸어도 항상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있었다. 최근 중국 청년들이 즐겨 입는 옷은 무엇인지, 그들은 어떤 색상을 선호하는지, 어떤 카페 인테리어가 대세인지, 소비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어떤 전략을 쓰는지 등등... 그는 거창한 전문서적을 읽지 않고도 일상으로부터 통찰력을 얻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세심함은 사람을 대할 때도 드러났다. 가끔 그와 함께 다른 사람과 밥을 먹을 때면, '잘 지냈죠?'라는 상투적인 질문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그 사람이 그간 무엇을 해왔는지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으며 또 그것이 안 본 사이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상대방이 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는 같이 국수집을 갔는데, 주문을 하려던 참이었다. "이 집은 국수에 피망을 많이 넣어요. 주문할 때 빼 달라고 해주면 빼줘요. 피망 싫어하잖아요." 당시엔 그저 고개를 끄덕였지만,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잔잔한 즐거움이 가득했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같이 볶음밥을 먹을 때 피망을 한쪽으로 치운 걸 보고 피망 싫어하냐고 물었던 것이 그제야 기억났다.
언급이 가장 기분 좋은 칭찬일 때가 있다. 몇 주 전 가족 식사를 하는데 작은 엄마가 염색하신 것이 눈에 띄었다.
"너밖에 없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채던데..." 오랜만에 두둑한 용돈을 받은 건 덤.
미용실에 갔을 때다. 그곳은 머리를 감길 때 지압을 해주는데, 그날따라 마사지가 더 시원했다.
"지압 정말 잘하시네요. 지금까지 받아본 것 중에 가장 시원해요."
"고마워요. 그런 말 처음 들어봐요."
그날 지압은 평소보다 2배는 길었다.
스타일리스트는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 기뻐했던 걸까? 전혀. 나는 '진심으로' 지압 마사지를 즐거워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말 역시 진실되게 전달된 것일 뿐이다.
섬세하고 진심이 담긴 칭찬은, 더 크게는 기꺼이 남에게 먼저 호의를 베푸는 마음은 어디서 올까를 생각했다.
첫 번째는, 내가 호감을 가지고 다가갈 때 돌아올 상대방의 보답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호의를 나타냈지만 정작 그 사람은 시큰둥하거나 심지어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개의치 않는 태도가 그것이다. 말이 쉽지 너무나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웬만한 다짐과 희생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각자의 선택일 것이다.
두 번째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타인을 더 깊게 생각하는 것이다. 굳이 인간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쏟을수록 섬세한 통찰력과 진지한 열정을 품게 된다. 반면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밑도 끝도 없이 무관심해진다. 내가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아이스크림 종류 5가지나 FC바르셀로나의 선수 등번호는 지금 바로 읊을 수 있지만,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는 그 이름조차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가 상대방에게 '진지한' 관심을 표하는 길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할애해서 타인을 위해 내어 주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호빵맨처럼 자기 팥을 나눠준다고 힘이 빠질 우리가 아니다. 자기 사랑은 우리의 기본값이기 때문에 '이제부턴 내 생각은 1도 안 하고 오직 남만 생각해야지' 등의 극단적인 결심을 하더라도 결국은 나 자신에 대한 묵상으로 돌아가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놨지만 나는 막상 제대로 지키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항상 느끼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에게 집착한다. 그래도 조금씩 바뀌려 노력 중이다. 가능한 한 주변에 적대적인 사람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자기중심적인 것을 보라!) C가 조언해주셨듯이, 누구를 만나기 전엔 단 1분이라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기억하는 습관도 들이는 중이다.
아직은 어설프고 쭈뼜쭈볐하지만,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손을 내미는 나를 상상해본다. 먼저 손 내미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것이 내가 늘 바라는 것이기에, 그리고 누구나 바라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