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집,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3>
좋은 정치인은 어떤 정치인인가? 두리뭉실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지만, 역의 역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나쁜 정치인은 어떤 정치인일까? 여기서도 기준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대개 말 뿐인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이 많은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큰소리를 떵떵 쳤지만 정작 열매는 없는 정치만큼 소모적이고 허망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매 없는 정치인보다 나쁜 정치인이 딱 한 부류 더 있는데, 바로 나쁜 열매를 맺는 정치인이다. 적어도 허풍선이는 시끄럽기만 할 뿐 현상유지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후자는 적든 크든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전형적인 '트롤러'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의 윤리관을 다루는 제5장 <정치가와 윤리>에서 베버는 '좋은' 정치인의 품격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분명한데, 좋은 열매를 맺는 정치인이야말로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정치가, 더 나아가 모든 정치가가 맞닥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딜레마는 현실 vs 신념일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선순위와 정도의 문제지만, 극단적 이분법을 빌리자면 "현실 위에서 이상을 실현할 것인가, 아니면 이상이 곧 현실이 되게끔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주어진 밭에서 어떻게든 꽃을 피울 것인가, 아니면 -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 땅 자체를 엎어버리고 (?) 원하는 꽃을 피워낼 것인가.
합리적인 정치인이라면 현실 속에서 씨름하겠지만,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을 뒤엎고 그 자리에 의심스럽게 정의된 낙원을 건설하려는 시도들이 늘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임을 안다. 베버는 이러한 정치적 가치관이 어떤 본질적 문제를 안고 있는지 통찰함으로써 현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치가의 덕목을 역설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먼저 밭의 토질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발을 딛고 있는 땅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면, 훌륭한 재료와 도구들도 다 무용지물일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윤리가 아닌 정치에서의 윤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정치의 본질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정치'란 국가들 사이에서든 국가 내 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에 참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 또는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 p111)
정치의 에너지원은 권력이다. 타인 또는 타 집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고민과 투쟁이 정치의 큰 흐름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노력들이 상호작용하고 축적되면서 국가라는 가장 큰 범주의 정치 행위자가 뿌리내렸다.
그렇게 정립된 근대적 국가의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베버는 물리적 폭력 및 강권력의 독점으로 정의 내린다. 폭력이나 강권력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썩 좋진 않지만, 모든 나라가 그렇다. 경찰이나 군대처럼 특수한 조직들만이 폭력을 쓸 수 있으며, 그 외의 모든 폭력은 철창행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국가가 예외 없이 이런 특징을 보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의 논의는 2가지 핵심 전제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1. 정치의 본질은 권력이다
2. 근대적 의미의 국가는 합법적 폭력 & 강권력을 독점하며,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국가의 그러한 기능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이 선한 의도로 시작했으나 비참한 결과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이 전제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정치의 본질은 도덕적 신념과 극심한 모순을 낳으며, 그러한 현실을 수용하지 않는 정치가에게는 변질과 오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윤리를 생각할 때 대개 도덕적 윤리를 떠올린다. 도덕적 윤리와 현실 정치은 어떤 이유에서 마찰을 빚는 것일까? 베버는 예수의 산상수훈 (마태복음 5-7장의 내용으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산상수훈에는 널리 알려진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나 "속옷을 요구하거든 겉옷도 내어 주라"등의 빡센(?) 강령들이 포함되어있다. 마태복음 19장에는 평생을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흠결 없이 살아온 한 부유한 청년의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예수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줄 것을 명한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근심하며 떠나갔다.)
베버는 그러한 명령들의 핵심은 전부, 아니면 전무(全舞)라고 말한다. 절대적 선악 개념에 기초한 세계관 속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옳음/선함에 속하는 강령들을 착실하게 이행하며 그 반대의 것은 철저하게 배척하는 일이며, 그 사이의 중간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비유를 통해 말하듯이,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정지시키고 기분에 따라 타고 내릴 수 있는 삯 마차'가 아닌 것이다.
복음서의 윤리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자는, 파업을 해서는 안 되며 - 왜냐하면 파업 역시 강제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 어용 노조에 가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혁명'을 운운해서는 안 된다 ... 내전만이 정당한 전쟁이라고는 전혀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 p208-209)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즉 현세의 일은 현세의 일이라는 말 외에 예수는 정치 또는 체제의 방향성에 대해 설파하지 않았다. 성경의 교리가 철저하게 개인의 내적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기독교적 명분으로 숱한 폭력을 정당화했던 과거의 비극들은 어쩌면 과녁이 크게 빗나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매듭 지은 베르사유 조약 역시 과녁이 크게 엇나간 것이었다. 베버는 전쟁의 패자(败者)라 할지라도 책임자를 색출하고 '남 탓'을 하기보다는 냉철한 인정과 함께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며, 그에 반응하는 승자 역시 미래지향적인 자세로 협상에 임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마땅한 일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 협상에 윤리적 원칙을 개입시킬 경우 - 베르사유 조약이 바이마르 공화국에 '전쟁의 원죄'를 씌움으로써 살인적인 배상금을 정당화시켰듯이 - 그것은 상황을 개선시키기보다는 파국으로 질주하게 만든다. 이유는 매우 자명한데, 이득을 가능한 최대화하려는 승자의 이해관계, 그리고 전쟁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더 많은 양보를 얻고자 하는 패자의 바람은 왜곡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제국 황실의 비이성적 판단으로 인한 제1차 대전의 대가를 일반 국민들에게 지우면서 "전쟁의 책임"이라는 정당화로 깊은 국가적 수치심을 남겼다. 히틀러는 이 모욕감을 꿰뚫어 보고 국민들의 모욕감에 불을 지폈고, 결과적으로 몇 십배의 재앙을 '세계 정의를 위해 싸웠던' 승전국들에게 안기게 된다.
*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The Buck Stops Here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이라는 문구가 적힌 명패가 놓여 있었다. 내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의 최애 명언이기도 했다.
윤리는 결과를 묻지 않는다. 이것이 베버가 신념을 품은 정치가들에게 던지는 당부다. 윤리적 가치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권력만을 좇기에는 거대한 허무함과 갑작스러운 파멸이 도사리는 곳이 정치판이기에, 지속 가능한 정치 활동을 위해서는 내면의 신념을 향한 맹렬한 열정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즉 문제의 핵심은 정치인의 신념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인이 자신의 신념을 주어진 현실에 연착륙시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신념의 실현으로 인해 일어날 일들을 책임지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분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책임 윤리다. 신념 윤리가 통상적인 의미의 윤리임에도 정치 윤리의 두 기둥을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로 구분한 것을 보면서 어쩌면 베버는 책임의 자세야말로 정치인에게 있어서 '지켜야 마땅한 옳은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는 두 윤리의 차이를 신앙인의 관점을 통해 보여준다. 같은 신앙을 가져도 신념 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할 뿐,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라고 말할 것이고, 책임 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신의 주관 하에 있지만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전자는 자신의 행위가 부정적인 결과를 낳더라도 그것은 사회의 악함 내지는 구조적 부조리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면 책임 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타인의 선의와 완전함을 전제할 그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과의 책임을 전적으로 남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베버는 이 이상으로 정치인이 가져야 할 신념이나 책임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결과를 묻지 않는 윤리'를 강요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겸비한 정치인은 어떤 자질을 갖추게 될까? 베버는 그것을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으로 정리한다.
여기에서의 열정은 베버가 '지적 호기심의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객관성이 결여된 자아도취적 흥분과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 열정은 사회의 현실에 부딪혀 끝없이 마모되면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열정이다.
그리고 그 열정이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책임감이다. 책임감이 결여된 정치인의 열정은 그것이 아무리 진실되고 순수하다 하더라도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열정을 성숙한 책임감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는 균형적 판단이다. 이는 물질과 사람에 대해서 '거리감'을 둘 수 있는 능력이며 주어진 현실을 편향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균형적 판단에서 넘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말이 쉽지, 주변에서 자신을 치켜세우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밀려 들어오는 물질의 유혹에 파묻혀 살면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정치인은 균형적 판단의 최대의 적인 허영심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 허영심은 "가능한 한 자기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어 하는 욕구"인데, 이것은 처음에 품었던 대의에 대한 헌신을 꺼뜨리고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를 흐리게 할 것이며 목적 없이 권력 그 자체에 중독되게 만드는 것이다.
정치를 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반대 세력에 맞서기에 앞서 자기 자신부터 정복해야 한다.
도처에 도사리는 허영심의 유혹, 사방에서 굽이치는 권력의 그림자, 좀처럼 바뀌지 않는 현실로 인한 환멸감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열정은 말 그대로 소명(召命)이라 불릴 수 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제1차 대전 직후인 1919년에 독일 뮌헨의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을 담은 것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모두가 잿빛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정치가 과연 절망스러운 현실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절규가 가슴속을 헤집는 때에 베버는 단상 위에 올랐다.
시종일관 냉철하고 분석적이었던 베버의 말투는 강연의 막바지에 이르러 격정적으로 변한다. 인문학 서적을 읽으면서 전율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맺는말의 몇 부분을 소개함으로써 ⌈소명으로서의 정치⌋ 시리즈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10년 후에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 ... 그때는 이미 반동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거라는 두려운 생각을, 나는 갖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때는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 그리고 솔직히 나 자신도 - 바라고 희망했던 것들 가운데 실제로 실현된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 표면적으로 어느 집단이 승리하든 상관없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여름의 만개가 아니라 얼음이 뒤덮인 어둠과 고난에 찬 극지의 밤이다 ...
이 밤이 서서히 물러갈 때, 이 봄날의 꽃이 자신들을 위해 화사하게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살아남아 있게 될까? 여러분 모두는 그때 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을까? 비분강개해 있을까 아니면 속물근성에 빠져 세상사와 자신의 직업을 그냥 그대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고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도자이면서 또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영웅일 수밖에 없다. 지도자나 영웅은 아니라 해도, 모든 희망이 깨져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