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은 늘 가까이 있다

對감정

by 반비

7월 9일, 한 안타까운 스러짐을 목도했다. 민주적 전환기의 시기서부터 이어져온 약자의 인권신장을 향한 긴 여정이 황급한 마침표를 찍게 되었고, 시민사회와 수도의 곳곳에서 느껴지던 그의 향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추모의 적절성이나 피해자의 명칭에 대한 말장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떠남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그 원인이 다른 것도 아닌 그가 일생동안 존엄하게 여겨온 것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는 점이다.


침묵으로 마무리된 그의 삶에 너무나도 많은 궁금증이 남는다. 그가 드러낸 가치관과 언행은 줄곧 일관되었는데 내면은 어느 시점부터 변해간 것인지, 그는 그 변질을 줄곧 인식하고 있었는지. 하지만 모든 것은 이제 출구가 없는 정쟁의 터널에 갇히게 되었다.



위선의 본질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거나 도덕성이 중요시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비위가 공분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 다음과 같은 격양된 목소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지를 말았어야지"


자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논리 속에는,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다면 어느 정도의 모순은 눈감아줄 수 있다는 뜻이 담긴 건 아닐까? 물론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특히나 유권자들로부터 정치적 권한을 위임받은 선출직의 경우 그 엄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위치 또는 역할을 근거로 위선의 경중을 나누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위선의 심각도를 구분하는 것은 나쁘다기보다는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와 여러분이 위선을 끔찍이 싫어하는 이유는 똥 묻은 주제에 감히 옆 사람들에게 똥 닦으라고 삿대질한 그 모습이 가증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똥 닦으라는 그 행위 자체가 나쁜가? 꽤나 실속 있고 건설적인 충고다. 단지 괘씸할 뿐이다.


위선은 만연하지만 위악(僞恶)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선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악한 척을 하겠는가. 위선자들이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주창하는 그 구호들은 대부분 실천해서 손해 볼 것이 없는 말들이다. 애초에 선하게 보이려고 하는 연기이므로 해악이 될만한 얘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위선적인 관리가 있다고 치자. 그는 "매일 같이 인민의 고통을 생각"하던 끝에 '차를 몰고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나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차 소유자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포르쉐를 보유하고 있는데, '인민의 애환을 돌보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신은 괜찮다고 단언한다.


이 경우 - 즉 거짓된 도덕적 우월성에 근거해 어떤 행동을 정당화하는 경우에 - 위선이 타인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이것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왜곡된 판단 (나는 인민들을 위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공격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잘못된 논리('차 소유자 = 악인' 등식)이다. 즉 차 보유자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결정적인 트리거는 후자이며, 전자는 그저 그를 우쭐하게 만드는 허구 훈장일 뿐이다.


위선의 진정한 해악은 상대방에게 미치는 것에 있지 않고 스스로에게 주는 영향에 있다. 스스로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상대성을 기준으로 위선의 정도를 따지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위선에 빠져서 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거대한 실망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손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위선은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판단능력을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욕망과 진심의 억지 봉합


무엇이 늑대로 하여금 양의 탈을 쓰게 만들까? 부제 그대로다. 내가 과거에 위선에 빠졌었던 경우들을 되돌아보면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보이고 싶은 모습은 있는데 실제 마음가짐은 그와 동떨어져있을 때였다.


초딩 반장선거에 출마했을 때였다. 당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던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약았다) 하루는 많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사근사근한 표정으로 공약을 내세웠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내가 반장이 되면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


나는 반장이 되고 싶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착한 반장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에게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았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복도에서 우유갑 들고 그 친구를 조소하던 시답잖은 놈들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그때 그가 나에게 주었던 진심 어린 신뢰의 눈빛, 그리고 반장이 된 후에 그 약속을 새까맣게 잊었던 사실은 나의 과거에 대한 미화(?)를 방지해준다.


위선이란 한 단계 건너뛰는 것이다. 진솔한 변화, 지속 가능한 변화는 내면으로부터 시작된 변화가 겉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 완성된다. 하지만 내면의 변화를 가벼이 여길 때, 껍질만 탈바꿈해도 사람들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는 암묵적인 계산이 나를 지배할 때 위선이 시작된다.



원숭이 꽃신, in reverse


위선의 그림자는 항상 곁에서 호흡하는 존재다. 몇 주 전 친한 동생을 만났는데, 자신을 억울한 상황에 내몬 어떤 사람 때문에 분노에 차있었다.


나는 분노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먼저 화해를 청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서있는데 어떤 어르신이 실수로 내 발을 밟았다. 입술을 꽉 문채 살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지만 그분은 끝내 하차하셨다. 몇 분 후 버스에서 내리고서야 분노의 마수에서 벗어났고, 그제야 나의 모습이 보였다. 속이 메스꺼웠다.


원숭이 꽃신 비유를 들어봤을 것이다. 장사꾼 오소리가 맨발로 다니는 원숭이에게 접근해서 꽃신을 선물해주었다. 하지만 그 후 꽃신을 계속 신어서 굳은살이 사라지자 원숭이는 꽃신 없이는 걸을 수가 없게 되었고, 결국 오소리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양심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꽃신을 신고 태어났다. 꽃신이 번거롭다며 맨발인 상태로 산다면 우리의 발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더러워지고 오물에 찌들겠지만 결국엔 그것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남의 집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살라고 윽박지르는, 한 편의 코미디의 주인공이 될까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내로남불의 근원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자신의 내면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어 놓고는 옆사람에게는 엄정한 법치주의를 강요하는 행태다. 나의 주변에 정의가 세워지기를 원한다면 내 안의 정의부터 회복시키는 것이 온당하다. 스스로에 대한 뒤틀린 관대함을 뿌리 칠 때만이 일상 속에 스며드는 위선과 간신히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싸움을 거부한다면 “너무 멀리 왔구나, 이미 늦었구나"라며 한탄하는 나의 모습은 그리 멀지 않은 현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