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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야 Mar 28. 2024

매일 일기 쓰는 사람

이청준은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기를 적거나 편지를 쓰거나 그런 것에 자주 매달리는 사람들은 대개가 바깥 세계에서 자기 욕망의 실현에 실패를 하는 경향이 많은 쪽이기 쉽다'고.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 일기에는 내가 납득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상황과 사건, 인물에 대한 기록이 주로 담겨 있다. 가령 그 사람은 왜 그렇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지, 그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게 마땅한지 따위를 물으며, 실패한 욕망을 한 템포 늦게 복기하는 식이다.


앞에서 못할 얘기, 뒤에서라도 해야지 어쩌겠는가 싶은거다. 일기가 아니라면 좌절되거나 억눌린 욕망을 도대체 어디서 마음껏 풀어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나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어우러져 할 일 없이 남 뒷담화하는 걸 무척 싫어한다.) 해서, "어떻게 매일 일기에 쓸 만한 얘기가 있냐?"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뭐 남 욕만 써도 한 페이지는 차던데."라 답한다. “일기에 저도 나와요?”라는 동료의 노파심에는 “아무나 등장할 순 없어요.”라고 눙친다.


욕망 해소를 떠나, 지난 일기를 보면 자연스레 얻게 되는 깨달음이 있다. 그건 내가 내일 일어날 일을 결코 알지 못한 채로, 오늘의 나를 어르고 달래며 하루하루 꼬박꼬박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2018년의 일기를 펼친다.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얼마 후, 12월 22일 토요일의 나는 이렇게 적는다.

배가 고파서 롤케이크를 조금 먹고 티브이를 보다 탭을 했다.
모든 것이 영락 없이 같다.
모든 것이 영락 없이 같은 것을 다르게 대해야 할까 하다가 그냥 똑같이 대했다.
무엇을 다르게 생각해야 할 지 모를 만큼, 모든 것이 같다.


이틀이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아침 방송에서 치킨집이 나오는데 닭을 내려치고 살을 발라내는 모습이 끔찍해 보인다.
나와 네가 다르지 않다는 자각.
나는 너무도 이기적이지만, 계속 이기적이겠지만,
그로부터 한걸음 물러나고 더 물러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일기를 보면 삶이란 매우 구체적인 풍경으로 펼쳐진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엄마가 곰국과 배추전을 해주어 맛있게 먹은 일, 언니네 집에서 조카들과 마리오카트를 하며 즐거워 한 일, 직장 동료와 맥주 마시며 쓸데 없는 말을 늘어놓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책한 일. 또, 7월 14일 토요일의 나는 카페에 앉아 '깊은 생각, 풍부한 교양, 바른 자세, 적당한 말수를 지닌 노인 되기'를 염원하고, 같은 해 12월 16일 일요일의 나는 9시에 일어나 창밖에 파우더가루처럼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일기는 나의 정사 혹은 야사다. 나의 하루를 온전히 함께 하는 자는 나뿐이므로, 나는 나의 가장 주된 사관으로써 매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가는 내내 나는 아무래도 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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