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없는 여름의 하늘 하늘
고운 봄 수선하나
셋, 둘, 하나—스르륵 뚝.
일찍이도 오셨네요.
어린 날,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방울 하나, 하나 둘 뚝 떨어지던 날.
강렬한 여름 햇볕에 축축이 젖어갈 때부터 나는 여름이 두려워졌습니다.
더워서 흘린 땀방울이었을지, 그깟 한 서린 감정에 처연히 흘러내린 방울이었을지, 나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추억 때문이겠지요.
이상한 기후 덕분에 일찍이도 오시는 그분.
봄 맞아 빠르게 부푼 마음은 급히도 저물어갔습니다.
텁텁한 마음과 몸 하나를 이끌어 나의 마을 천변(川邊) 근처 사우나에 닿았습니다.
사우나라는 장소는 퍽 오랜만에 겪는 경험이었습니다.
발이 안 닿아 힘겹게 허우적거리는 것만이 유일한 어려움뿐이었던 어린 나와 사뭇 다르게 방황한 탓이었을까요.
물속 나는 신선한 파장을 느꼈습니다.
이곳 바깥 공간께서는 몸을 짓누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을 푹 짓누르기에 이를 저항하기엔 때때로 힘겨울 때도 많지요.
물속의 몸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려 애쓸 때 비로소 자유로워졌어요.
손가락을, 팔을 물 표면에서 천천히 놀려봅니다.
무엇인가를 얻으려, 무엇인가를 가르려 애썼던 나의 가여운 것들은 수면을 경계로 달라 보이더군요. 공기 속 나의 것들은 어딘가 모르게 날카롭고도 성나 보여요.
물 분자들이 서로를 표면장력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물방울을 형성할 때도
때로는 무지하기에, 어쩌면 외면을 품은 의도로 그것들을 털어내려 애썼습니다.
수면이, 그 포근한 수면이 제가 저의 팔과 손가락을 물속에 담을 때마다 당신은 주저함 없이 나를 안아주려 했습니다.
편평한 수면은 제가 저를 담을 때마다 매번 나를 위해 제 형상을 기껍게 바꾸더군요. 그 속에서 나의 손가락과 팔은 퍽 뭉툭해 보였습니다.
모난 구석은 물이 포근히 안아준 덕에 둥글둥글해졌어요. 동족(同族)의 아무개와 부딪힐 때도 서로를 부드럽게 맞이했다가, 뒤끝 없이 홀연히 떠나는 모습을 느꼈습니다.
물속 공간은 물밖 외로운 공간과는 사뭇 다른 녀석이라고 생각해요. 퍽 포근한 부력은 마음까지도 짓누르지 못했답니다. 붉게 상기되었던 마음이 푸르른 물속에서 한껏 부드러워졌어요.
수직적 무력감에 결국 옹졸해졌던 마음이 나른해지며 버겁게 품고 있던 사고(思考)의 산란을 목격했답니다.
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문득 생경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나의 사랑은 붉은색이었어요.
눈이 피로하네요. 눈을 잠시 감고 떠볼게요.
빨강이 아녔나 봐요.
어두운 붉은색이었나요? 새빨간 색이었나요? 불그스름? 울긋불긋?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하물며요.
무한한 수(數)에게 고작 인세(人世) 하나 편해지자고
그 많은 잣대를 들이대 봐도
그게 나누어지던가요?
내가 드린 사랑이란 그리 얕지 않았나 봐요.
나는 그 단어에 두께를 담았어요.
나는 당신이 준 사랑의 무게를 재지 못했나 봐요.
측정의 노력조차 못 한 나였어요.
그것을 한 번 들어보기만 했어도 되는 건데 말이죠.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정말 아니었다면
내가 드린 언어가 혹여 너무 뜨거웠나요?
저와 당신의 온도는 달랐을는지도 모르죠.
수많은 짝이 잉태한
사랑을 말하는 낱말
한낱 그 두세 글자의 모음으로
무한한 폭의 감정의 깊이와 두께, 온도까지도 재단할 수 있을 거라고
그때의 나는 왜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정말로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수면의 경계에서 손가락을 노닐 때, 그것을 경계로 이질적으로 끊겨있는 나의 손가락을 보았습니다.
나를 잠시 동안 품고 있던 물의 힘을 빌려 나의 안면을 씻어내 봅니다. 다시 손가락을 수면에서 노닐어 봐도, 그 이질적인 경계는 도저히 씻길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잘못 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대로 마주하더라도 저는 이질적인 모습밖에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저를 보고 웃을지도 몰라요.
아아- 실제로 웃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사소한 동기에 삶의 주안을 발견한 듯한 모습이 우스워 보여 그랬을지 저는 알 길이 없겠네요.
그래요.
웃어도 괜찮아요!
적어도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해 비관적이지 않게 되어서 그래요.
이제는 포근한 물속에서만 볼 수 있게 된 뭉툭한 손끝을, 어린 나는 뜨겁던 태양 아래에서 흐르던 방울을 닦을 때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훔치던 손끝의 기억은 아프지 않기 때문이거든요. 아가페적 방식만이 사랑의 외딴 정도(正道)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막다른 그 길에서 마주한 장벽께서는 어린 나의 도약 생리(生理)마저 가로막았던 것 같습니다.
방울의 자취조차 감추고자 올려다본 하늘의 태양이 너무나 강렬하고 무서웠습니다.
그 태양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뭉툭한 손을 내 육신의 초라한 속죄양으로 임명해 드렸습니다.
그 손을 다시 뻗기는 두려워서였을까요? 나의 손을 뻗을 때마다 그대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고자 가락 가락을 예쁘게 조각하였습니다. 문득 마주 본 나의 손가락은 사뭇 얇아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서늘하고 예리한 감촉이 싫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 손이 참으로도 돌올하고 고와 보였습니다.
비단 어정쩡히 좌우로만 움직이던 나의 두 발은, 포근한 물에 담그게 되어서야 비로소 발을 굴렀습니다. 그 결곡했던 장벽은 사뭇 낮아 보였습니다.
그대들께서는 그 장벽이 태초부터 높았을지, 마음이 여물어가며 장벽을 한층 한층 덜어낸 건지 부디 목격해 주세요.
물속에서 착시로 뭉툭해진 손가락을 바라보며 깨닫습니다. 내가 다른 이와 세상을 서로 미워하고 오해하는 일들 역시 어쩌면 물 밖과 물속의 경계처럼 한낱 착시일 뿐이라는 것을요.
실제 제 손은 여전히 이어져 있을 겁니다. 제 뇌가 그것을 착각했다고, 그 여린 세포들에 검붉은 사선 작대기를 그을 건가요?
찢길 듯 세차게 긋지 않고 살살 긋는 것은 괜찮을까요?
저와 당신의 기준은 같을 수 있을까요?
저는 불완전한 사람일 거예요. 인간이기에 하릴없이 방황하고, 제 입맛대로 편집된 삶을 살아가겠지요. 이런 제가 뭉툭한 손가락으로 세상에 악수를 청해볼게요.
저의 손이 부족하여 혹여 다른 부위와 맞닿게 되더라도요,
닿지 않은 다른 부분을 지레짐작하시더라도,
아예 인식조차 어려울지라도 마주하려고 노력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맞닿는 부위가 당신의 전부라고 판단하지 않으려고요.
혹여 악수가 어려울 정도로 멀리 있다면 당신 주변의 그를, 그녀를 사랑해 주세요. 찰나의 사랑으로 연장된 서로를 연대해 주세요. 그 사랑의 활공(滑空)으로 거침없는 기행(紀行)을 담아주세요.
곡진한 사랑의 녹음을 이뤄주세요. 기행은 우리가 더는 품을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기행(奇行)이 아닐 수 있을 거라는 걸 알아요.
내 생각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나는 물 밖의 날카로운 모습이 고와 보였습니다.
나의 착시는 참으로 아름답고도 가여운 인식이었습니다. 다만 물이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듯, 우리 모두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사랑의 연장을 이루어낼 때,
비로소 하늘 아래에서 평화롭게 뭉툭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파란 하늘 파란 물결.
산란(散亂)이 보여주는 일치된 방향을 마음에 품어봅니다. 고작 따뜻한 물속에서 손을 노닐다 이 같은 사실을 느낀 것처럼, 여러 오해가 착시임을 느끼고 서로 연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착시를 품에 안을 때 나의 마음을 짓눌렀던 여름의 햇볕은 더 이상 강렬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방식을 마주하는 데에 많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다만, 내 사랑의 방식은 여전히 거칠 것이고,
정도(正道)를 끝끝내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아요.
착시는 의학적으로 안구가 아닌 뇌의 착각이지요. 어쩌면 당연한 것을 주변의 다른 정보로 인해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곡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분명하고 완전하기에 미련조차 없이 너를 대하기보다는,
부족하기에 조금 더 반성하고 자세히 보려고 노력하는 제가 참으로 곱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깎아내기보다, 저의 넘치는 부분을 당신의 부족한 공간에 담아볼게요. 우린 사람이니까요. 멈춘 세상의 너를 기억하기보다, 우리 영상으로 삶을 녹음해 봐요.
우리의 길고도 넓은 동행에 얕고도 깊은 사랑이란 파장을 곁에 둘러봐요.
시작이라 설레면서도 두려운 나의 싹을 피운 봄은 지나갔지요.
애써 수선하려고 노력한 누더기 나의 봄에서 이제는 벗어나 보지요 뭐.
잘못 본 그대를 내 입맛대로 배치를 옮겨보면요. 나의 착시가 현실이 될 줄로 알았나 봐요. 내가 소망한 것에 닿자마자 가치는 소멸해 버린걸요. 나의 작은 사랑의 연장을 이루려 해요.
힘겹더라도 연장된 사랑을 놓지는 말아볼까요?
미세하더라도 괜찮아요.
그리 연하지만을 않을 거예요.
뜨거울 여름을 맞이해야 해요.
천변(川邊)에 만연히 피어난 수선화 근처
고된 일기(一期) 끝 시들어버린 수선화 꽃잎 한 닢
어여쁜 꽃이어서 누군가 뜯어버린 건지,
자연의 풍파(風波)에 무너져 떨어져 버린 것인지
이제야 마주한 나는 결코 모를
수분기 잃은 수선화 꽃잎 하나
쨍한 노란 꽃일 때 얼마나 스스로가 예뻤을까요?
어린 시절 지나가며 본 수선화는 그저 어여뻤어요.
지금 그 수선화는 슬프지 않을걸요?
어쩌면 이번 해부터는 여름에 대한 묵상이 깊어질 것 같네요.
나무에 꼭 붙어 우는 쓰르라미의 사모하는 소리 탓도 있겠네요.
어쩐지 이제는 거북하지 않네요.
저는 사랑을 부르짖는 여러분들이 허상(虛像)을 두려워하지 않았음 해요.
파란 하늘 푸른 물결.
혹여 당장은 푸르지 않더라도
그 산란을 맞이한다면요,
공기가 빛을 품어 푸르러지면요, 곧 우리도 푸르러질 것을
우리는 푸른 하늘 아래서 깨달았습니다.
우우우
나와 모든 당신에게.
오늘 나의 생각들을 감사히 보내고, 내일도 무사히 맞이해요.
우리의 기행이 외로운 감정 아래 쓰이지 않았음 해요.
꼭꼭 담길 목소리에 따스함이 깃들었음 해요.
순간 우리 멀어지는 듯하여도
그대의 방향으로 가는 길에 혹여 안개라도 끼지 않을까 걱정할래요.
그러다가 우리 서로 마주 보아도, 끝끝내 서로를 알지 못하더라도,
심술 내진 않을게요. 당신도 나의 탓을 하진 말아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먼저 차분히 바라볼게요. 따라서 사랑을 보려고 노력해 주세요.
셋, 둘, 하나
무슨 일이죠? 그대의 웃음이 더 이상 씁쓸하지 않네요.
고마워요 그대여.
나를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줘서 고마워요.
내 마음도 그대로 향할게요.
그대도 나에게 그대로만 해주세요.
혹여 잘 모르겠다면 주변을 자세히 봐주세요.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나에게 단어들을 보내주세요.
그때 우리 너와 나의 단어를 함께 외워봐요.
우리만의 언어에 기행을 담아봐요.
오늘의 밤이 무섭지 않도록, 떠오를 해가 뜨겁지 않고 따뜻하기 위해서요.
저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