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을 위한 처음.

사적인 이야기들을 쓸 수 있는 공간.

by 제로

거창하게 글을 씁니다, 하고 자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저는 원래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친구들에게 나 사실 이런 고민이 있어, 하고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이 모든 고민들이 브런치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 익명성을 빙자한 대나무숲에서 열심히 글을 써보자. 대부분은 내 감정을 쏟아내는, 그런 출구겠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사실 카카오 계정을 연결하라고 해서 좀, 떨렸다. 난 이런 문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일단 연결을 하면서도 괜히 신경이 쓰이더라. 이거 설마, 나중에 연락처 동기화 되어서 내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이 다 보게 되는 거 아냐. 그러면 더이상 글을 쓸 수 없을 텐데. 아니, 앞으로 쓸 글들을 들키게 된다면 정말 죽고 싶을 텐데. 나는 늘 사는 이유를 모르는 해파리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죽고 싶어지는 것과는 별개다. 죽고 싶어지는 건, 정말 쪽팔림이든 화든 어떤 감정이든 간에 당장 뛰어내리고 싶어지는 거고, 사는 이유를 모르는 건 그냥 이유를 모른 채 흩날리는 삶이다. 지금 나처럼.


어렸을 때부터 누누이 들어왔던 말이 있다.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기형아 판정을 받고, 또 미신이지만 사주에서는 아들로 태어나면 엄마를 죽이고 태어난다고 했더랜다. 그 말에 덜컥 겁이 난 아빠는 당장 지우자고 했었고, 할머니도 그랬고. 모두가 지우자고 할 때 엄마만 끝까지 낳을 거라고 했다. 그러던 와중에 태몽처럼, 엄마 꿈에 나타난 강아지가 어떻게든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애를 썼고, 쫓아내려는 아빠에겐 엄청 으르렁 거리며 사납게 굴었더랜다. 내쫓지 말라고. 그 뒤에 아빠 꿈에서는 사냥개가 팔뚝을 물고는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그 꿈을 동시에 꾼 엄마아빠는 그래, 어떻게 되든 키우자, 라고 했고. 내가 태어났다. 잔뜩 불어터진 얼굴로 아빠를 노려보며.


그 얘기를 듣고 살면서 매번 이런 말도 같이 하셨었다. 넌 태어날 이유가 있던 거라고, 태어나려고 그렇게 용을 썼으니 뭔가를 해도 할 거라고. 그 말로 버티며 살았다. 기억도 안 날 어린 시절때부터 대학교,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버티면서 살았다.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 이유가 미래에는 보일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태어난 이유가 있겠지. 사는 이유가 있겠지. 내 삶의 이유가 있겠지.


여전히 모르겠다. 미래에서 찾아서일까, 현재에서 찾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다들 사는 이유에 대해선 고심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걸까. 필연적으로 우울해질 수 밖에 없는 성격을 가져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나는 늘 원인을 찾았다. 일이 터지면 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분석에 분석을 거듭하며 이유를 찾아나갔다. 삶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사는 이유가 뭘까, 대체 왜 그런걸까. 그렇게 분석을 하다보면 형편없이 뜯어진 나만 남는다. 나는 비로소 나를 마주했을 때 무너졌다.


사람들은 이정도 생각까진 안 하고 살까.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다고 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생각보다 단순하게 사는게 맞는 거라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렇게 사는 게 정상이라고. 그런 말을 보고 들으며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 할까 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하다. 여전히 이런 글을 쓰면서 나를 분석하고, 왜 내가 그렇게 된 걸까 고민하고, 결국 태초의 이유까지 들먹여가며 글을 쓰고 있지 않는가.


평생을 우울할 수 밖에 없으면, 그 블랙독을 내 친구로 삼으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더이상 휘청이지 않고, 그 블랙독과 함께 차를 마시며 친구로 삼았다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내 손님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찾아오고는 했다. 새벽에만 찾아오는 불청객은 대처가 가능하지만, 이런 낮에 찾아오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나는 할 일이 있는데, 그냥 찾아오는 손님도 힘든데 블랙독의 불청객이면 더. 그리고 그 불청객이 현실이라는 객을 데려오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휘말리게 되는 거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 들어가 안락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정신없이 휘말리면서 아, 살려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살고 싶었던 적은 없었지만 죽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나는 내가 우울증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전에 만난 사람이 그런 말을 했었다. 너 우울증 아니냐고. 그 친구도 우울증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무례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동아줄과도 같은 말이었다. 누군가 내 상태를 확언했을 때,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애써 버티고 있던 겉의 벽면이 녹아내리는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우울증이야. 난 지쳤어.


지금도 지쳤다. 지치고 지쳤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고 해도 나는, 정말로 지쳤다. 나는 본성이 우울하고 자체로도 충분히 우울한 사람인데, 현실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든다. 겉은 멀쩡하게 꾸며내는 것이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꾸며낸 탓에 괴리는 점차 심해지고, 말하지 못하는 성격은 점차 바닥으로 나를 끌어내린다. 조건 없는 애정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응. 나는 기대했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하고 상처입고 벽을 세우기를 반복한다.


애인은 어차피 남이지만, 가족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가족에게 나름 애정과 노력을 열심히 했어도 돌아오는 건 지겹다는 말들 뿐이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자식인데, 자식 키우는 게 지겹다고 자식한테 말하는 엄마나. 나도 가족인데, 가끔 가족이 싫다고 말하는 언니나. 혹시 NPC 로 보이는 걸까. 내 속이 언제까지 곪아야 하는 걸까. 말하고 30 분 정도 있다가 실수였어, 라고 말하는 가족들에게 애써 고개를 끄덕여보일 수 밖에 없는 거다. 응, 괜찮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지.


나도 사람인데. 정말 NPC 였으면 데이터 삭제하고 없던 일처럼 살아갈 수 있겠지만. 나도, 사람인데.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블로그에 쓸까 했지만, 연결된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여전히 내 속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지만, 내 가까운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건 싫다. 그래서 애인한테도 열지 않았다. 애인이 되기 전에는 누구보다 내 속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막상 애인이 되니 열기 어렵더라. 지금은 헤어졌지만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아직도 떠돈다. 너는 나한테 알려주지 않는다고.



그래서 브런치를 택했다. 이런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 누구한테는 말하고 싶지만 동시에 들키고 싶지 않은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은 몇 없으니까. 앞으로 브런치에 글을 많이 쓰게 될까. 많이 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무너져있을 테니까. 자판에 기대어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