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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파마와 매립지 Feb 24. 2020

도전일기_4 석류를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무파마와 매립지의 제로웨이스트 도전일기_네번째 이야기 


 '나는 원치 않았다'고 말하는 게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왜 이렇게 투덜대는 거야? 핀잔 듣게 될까 슬슬 걱정도 된다. 그러니 나도 꼭 하고 싶었다고, 드디어 화장품을 만들게 되었다는 거짓으로 글을 시작하고픈 유혹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딘가 화장품까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을지도 모르기에 (이런 게 연예인의 마음인가?) 솔직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역시, 화장품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순종적인 피부 타입으로 뭘 써도 괜찮다는 매립지와 달리, 나는 예민한 피부의 소유자였다. 이십 대 초반에 격하게 피부가 뒤집힌 후로 제자리를 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전처럼 예민하진 않지만 예전처럼 예민해질까 봐 예민하게 군다. 참 별나다 싶겠지만, 피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부과에 들락거려야 했던 사람이라면 이해할 거라 믿는다. 화장품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에 동조할 수 없는 처지랄까. 그러니 나로선 기대보다는 걱정이 컸다. '안정성'을 운운하며 빠져나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이미 결론이 난 고민이긴 했다. 프로젝트의 재미와 의미는 입맛 따라 고를  수 없는 것이니까.


준비물



 준비물은 간단하다.

 정제수. 글리세린. 석류 한 개. 그리고 소독을 끝낸 화장품 용기만 있으면 된다.

 정제수와 글리세린은 약국과 인터넷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두 개 다 사면 삼천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용량과 브랜드에 따라 좀 더 비싸기도 하고, 싸기도 하다. 석류는 꼭 석류가 아니어도 된다. 취향에 따라 녹차를 넣어도 되고 레몬을 넣어도 된다. 온전한 자유의 영역이니 효능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고 제 멋대로 넣어도 된다. 물론 책임이 따라온다는 것 역시 잊지 말자.


 우리가 석류를 사용한 건, 취향이나 효능 때문이 아니라 '있어서'다. 다시 말하자면 석류가 남은 김에 만든 셈이다. 그래도 무슨 효능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니, 인터넷 좀 뒤져본 결과 피부 노화를 방지하고, 트러블 예방에 효과적이며, 피부 미백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제껏 수많은 화장품을 쓰는 동안 효과를 본 게 있긴 했었나, 의문이 들지만 플라세보 효과라는 것도 있으니 그렇다니 그런 줄 알기로 하자.


 토너를 만드는 과정 역시 준비물만큼이나 간단했다.

 1. 석류알을 발라낸 후 믹서기에 간다.

 2. 간 석류를 체에 걸러 내거나 흰 천으로 짜 찌꺼기와 액을 분리한다.

 3. 석류액 1 글리세린 1 정제수 8의 비율로 섞어준다.

 4. 준비한 통에 담는다.

큰 맘먹고 도전한 것치고는 허무할 만큼 간단한 과정이다.


 

 완벽하게 안심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정제수와 글리세린 역시 이미 허가를 다 받은 제품 아닌가. 석류가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음식 좀 얼굴에 묻힌다고 큰일은 안 나겠지, 속으로 나를 달래고 또 달랬다. 초조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긴 했는데, 잘 숨겨졌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일단 만들었으니, 발라봐야 하지 않겠나. 조심스레 손등 위에 토너를 발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끈적함 없이 촉촉했다. 각종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덕분에 무향과 가벼운 느낌이 좋았다. 끈적함이 싫어서 핸드크림을 못 쓰는 사람들이 써도 좋을 듯했다.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었다. 그제야 만족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굉장한 것을 해낸 느낌이다. 화장품을 만들다니.

 이주일이 넘도록 써본 결과 트러블은 없었다(물론 개개인의 차이는 있을 테니, 각자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자). 천연 화장품의 특성상 유통기한이 짧으니, 손이고 발이고 팍팍 발랐다. 비용 부담 없이 마구 쓸 수 있다는 것도 (이것도 낭비려나) 좋았다. 경험하지 않으면 모를 일들이 너무 많다. 안 좋은 일들이야 계속 모르면 좋겠지만, 걱정 때문에 좋은 경험을 놓치진 말아야겠다. 물론 이 다짐 역시 천연 화장품 유통기한만큼이나 짧을지 모른다. 잊을 때마다 하나씩 새로이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천연 화장품을 만든다고 해서 쓰레기를 전혀 내놓지 않는 건 아니다.

 정제수와 글리세린 역시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있다. 한 통 씩 사두면 반년은 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양이다. 화장품 공병을 재사용할 수 있으며, 나아가 화장품 공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염에 보탬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제로 웨이스트'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쓰레기를 배출해야만 한다면, 어떤 쓰레기를 배출할지 정도는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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