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커먼즈에 접근”한다는 표현이 줄 수 있는 오해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접근”이라는 표현이 커먼즈(commons)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커먼즈는 어딘가에 묻혀 있는 자원이 아니며, 경제학 책에서 정의하듯 배제성이 낮고 차감성이 높은 — 즉 그것의 속성으로 정의되는 — 재화로 환원될 수도 없다.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가 말하듯 커먼즈는 사회적 관계이면서 사물이고, 따라서 하나의 사회적 체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 역시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커먼즈를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적 체계 — 자본주의 — 에 대한 대안으로서 이야기하려면, 그것은 단순히 공동으로 자원을 관리하는 체계 정도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회 체계와는 다른 무언가여야 한다. 그러므로 커먼즈는 간단히 말해 다른 삶의 양식이다.
이러한 정의에서 커먼즈는 흔히 화려한 조감도를 자랑하는 도시기본계획에 따라 어딘가에 지정된 장소도, 혹은 광물처럼 어딘가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님은 분명하다. 커먼즈는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발명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르게 물어야 한다. 커먼즈를 어떻게 발명할 것인가?
이 질문에 정형화된 답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람들과 만나고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루어라 등등. 그러나 이러한 답은 정리해서 쓰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다. 우리는 공중(公衆)과 관련된 문제를 공통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공적인 권위에 기대거나 사적인 소비로 해결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만나는 해로운 공통적인 것들1), 즉 소음, 대기오염, 쓰레기 등에 우리가 대처하는 방식은 관련 행정부처에 신고하거나 소송을 걸거나 아니면 값비싼 상품을 해결책으로 구매하는 것이다. 그 문제들에 대한 공통적인 접근, 그러니까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규칙을 정하고 등등의 일은 바쁜 현대인에게는 불가능한 과제로 여겨진다. 우리가 커먼즈를 만들기 어려운 이유다. 무언가 다른 방법은 없을까?
여기서 커먼즈의 대척점으로 우회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것은 인클로저(enclosure)다. 인클로저는 말 그대로 울타리를 치는 행위를 가리킨다. 공통의 토지(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사유지로 전환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맑스에 따르면 이 전환의 핵심은 생산자의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에 있다(그리고 그 분리의 역사는 “피와 불의 문자로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2)). 그에 따라 일할 수 있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계급이 탄생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레타리아”3)의 창출은 자본주의가 출현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었다. 이렇게 인클로저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른바 ‘이행’하던 시기, 즉 자본주의의 ‘시초’에 일어난 — 주로 토지와 관련하여 — ‘축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1990년 미드나잇 노츠의 “새로운 인클로저”4), 데이비드 하비의 “강탈에 의한 축적”5), 최근에는 낸시 프레이저의 “식인 자본주의”6)로 이어지는 많은 문헌에서 인클로저는 “진정한 축적”을 위한 역사적인 전제 조건, 즉 이미 지나가버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본주의 축적 과정에서 영속적으로 출현하는 과정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일 때 역설적으로 커먼즈에 대해 새로운 힌트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인클로저가 커먼즈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과정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면, 커먼즈가 현대에도 계속 남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울타리를 칠 대상이 없으면 울타리를 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러면 그 대상은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우리는 앞에서 커먼즈가 재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체계, 삶의 양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커먼즈가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면, 그것은 어떤 형태든 자본주의와는 다른 삶의 양식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 ‘다름’을 말하기 위해 우선 자본주의적인 삶의 양식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인클로저가 자본주의의 전제조건이고 그것은 무엇보다 생산자의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이며, 그 과정의 효과가 일할 수 있는 능력을 판매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탄생이라고 할 때 자본주의란 무엇보다 노동을 강제하는 사회다. 그러므로 조금 단순하게 대립해보면 커먼즈란 노동을 하지 않거나 혹은 (좀 더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삶형태다. 그러면 임금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회에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노동에서 배제된 이들의 삶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날 커먼즈의 (특히 도시에서의) 작동을 엿볼 수 있는 길은 아닐까?
나는 이렇게 임금노동을 하지 않지만 어쨌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이 바쁜 도시인으로 살아가기에도 힘겨운 우리가 도시에서 커먼즈와 만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임금노동에서 벗어난 삶을 그냥 살피는 것을 넘어서 그것과 연결되는 것, 심지어 빠져버리기 위해선 어떤 용기가 필요하다.7)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삶은 한편으로는 자유로울지도 모르지만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불안한 삶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유와 불안은 한 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글의 제목에서 던진 ‘미래 세대’라는 문제설정으로 넘어간다. 커먼즈와 관련하여 미래 세대라는 문제설정이 가지는 유효함이 있을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비임금 상태로 혹은 임금만으로는 살아가기 쉽지 않은 저임금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논의한 바를 떠올리면, 이러한 경향은 미래 세대가 어떤 의미에서 커먼즈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그들의 삶 자체가 이미 임금노동에서 배제된 혹은 배제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향은 커먼즈를 위한 하나의 물질적 조건일 뿐 커먼즈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 세대의 커먼즈를 이야기할 때 고려할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1)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공통체』, 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2014, 356-357쪽.
2) 칼 마르크스, 『자본론 I(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1, 982쪽.
3) 같은 책, 983쪽.
4) Midnight Notes, The New Enclosures, Midnight Notes 10, 1990, http://www.midnightnotes.org/newenclos.html.
5) 데이비드 하비, 『신제국주의』, 최병두 옮김, 한울, 2016.
6) 낸시 프레이저, 『좌파의 길』, 장석준 옮김, 서해문집, 2023.
7) 나는 “용기”를 개인적인 결단이 아니라 집합적으로 어떤 ‘기운’을 주고받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생태적지혜 미디어에 실린 글.
https://ecosophialab.com/미래-세대는-어떻게-커먼즈에-접근할-수-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