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데이>>(갈무리, 2020) 서평
공유지(commons)의 역사가 라인보우의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의 책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감춰진 역사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 역사란 무엇인가?
그가 쓴 또 다른 책, 『마그나카르타 선언』에서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들어서) 아는 대헌장의 다른 역사를 알려 준다. 그것은 관습적으로 유지되던 공유지의 활동을 문서로 보장한 삼림 헌장의 역사다. 나무가 물질문화의 중심에 있던 중세의 숲 공유지는 땅 없는 이들이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공유지가 인클로저로 사라지는 역사적 전환기 동안 삼림 헌장 역시 잊히고 주로 정치적ㆍ사법적 권리만을 다루는 마그나카르타만 전해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노동력을 팔지 않고, 상품에 의존하지 않고 집합적으로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권리는 잊혔다. 요컨대 그가 들려주는 것은 잊혀진 공유지와 그 속의 활동을 보장했던 또 다른 헌장의 역사다.
이 책 『메이데이』에서도 그는 그 기념일에서 잊혀진 역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공유지의 측면에서 본 메이데이의 역사다. 그는 (1986년부터 2014년까지) 서로 다른 시기에 쓴 여러 글을 모은 이 책에서 메이데이의 두 가지 측면, 즉 붉은색과 녹색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들려준다. 그 두 가지 색은 무엇을 뜻하는가?
붉은색의 메이데이는 우리가 (아마도) 잘 알고 있는 메이데이다. 그날은 1886년 5월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한 위대한 투쟁”을 기억하는 날이다. 반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녹색의 메이데이는 “매우 오래되었고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간에) 거의 모든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날은 씨 뿌리기와 풍요로움 그리고 싹틈의 축제이다. 이날은 사회적 재생산의 공동체 의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로마 시대에도 중세에도 있었던, “세상에서 가장 좋은 두 가지인 자연의 사랑과 사람들 간의 사랑이 화합하는 날”이다.
대지와 그곳에서 자라는 것들과의 관계는 녹색이다. 타인과 그 사이에서 흩날리는 피와의 관계는 붉은색이다. 녹색은 욕망의 창조이며 붉은색은 계급투쟁이다. 메이데이는 이 모든 것을 말한다(30쪽).
요컨대 녹색은 공유지를 통한 구성과, 붉은색은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과 관련이 있다. 메이데이가 “이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메이데이를 기리는 우리에게, 그 두 가지가 언제나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같다. 실제로 공유지의 역사는 그 두 가지가 분리 불가능하게 뒤얽힌 역사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 숲 공유지 역시 공통인과 지주의 끝없는 계급투쟁에서 생겨난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녹색의 화합은 가능하”지만,
확언하건대 이러한 화합은 붉은 투쟁을 통해서만 이뤄낼 수 있다. 에어로빅 운동가가 만들어낸 말처럼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며 책임 없이는 꿈도 없으며 노동 없이는 생산도 없고 붉은색 없이는 녹색도 없다(59쪽).
간단히 말해서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공유지란 없다. 공유지는 아름다운 협력만이 아니라 붉은 갈등에서 생겨난다. 기존의 억압적인 질서를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사회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유지를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 소위 ‘혁신적인’ 기업가들은 붉은색은 제쳐두고 녹색만을 — 주로 기술의 측면에서 — 말하는 것 같다. 엥겔스는 현명하게도 1888년에 『공산당 선언』 영어판 서문을 쓰면서 이들에 대한 묘사를 미리 마련해 두었다. “자본과 이윤에 어떠한 위험도 주지 않고 사회적 폐해들을 제거하겠노라고 약속하는 잡다하기 그지없는 사회적 돌팔이 의사들.”
그러니까 공유지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라인보우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유지는 우리가 자본과 … 시장의 두 얼굴에 맞서 유리한 위치에서 저항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니까 녹색의 공유지는 붉은 투쟁의 생산물이면서 그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렇게 녹색과 붉은색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얽혀있다. 이것은 우리가 메이데이를, 어떤 운동을 생각하고 행할 때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새로운 사회의 창조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라인보우가 본문에서 버섯을 좋아하는 — 포자는 아직 사유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 인물로 소개한 맛시모 데 안젤리스가 자신의 책, 『역사의 시작』에서 말한 것처럼 “‘혁명’은 공통장(commons)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공통장을 통한 투쟁”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렇게 옮길 수 있다. 붉은색은 녹색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녹색을 통한 투쟁이라고. 따라서 우리는 붉은색과 녹색이 분리 불가능하게 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새로운 사회는 우리가 기존의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동시에 다른 사회를 살아가는 만큼 가능한 것이다.
라인보우는 그렇게 붉은색과 녹색이 결합하는 순간을 다채롭고 흥미롭게 들려준다. 그중 하나는 1980년 메이데이에 전직 자동차 공장 노동자였던 “두꺼비씨”가 야유회 탁자에 앉아 쓴 글이다.
여덟 시간 노동일로는 충분하지 않다./우리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여기에 우리의 바람과 우리의 계획이 있다./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쟁취할 것이다.(하략)
“그 이상의 무언가”는 무엇일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단초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인보우는 19세기 후반 미국의 <노동 기사단>(The Knights of Labor)이 부른 ‘8시간의 노래’(Eight-Hour Song)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알려준다.
우리는 햇빛을 느끼고 싶다./우리는 꽃향기를 맡고 싶다./(중략)/여덟 시간의 노동과 여덟 시간의 휴식/남은 여덟 시간은 우리 자신을 위해
공장에, 학교에, 사무실에 갇혀 있지 않고 햇빛을 느끼는 것, 5월의 꽃향기를 맡는 것. 라인보우와 함께 <미드나잇 노츠 컬렉티브>(Midnight Notes Collective)의 구성원이었던 페데리치는 그러한 욕망, 다시 말해서 “태양과 바람과 하늘에 대한 우리의 필요”, “무언가와 접촉하고 냄새를 맡고 잠을 자고 사랑하고, 닫힌 벽에 둘러싸이는 것이 아니라 열린 대기 속에 있는 것에 대한 필요”가 착취에 대한 우리의 저항의 주요 원천 중 하나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장 초기 단계부터 우리의 신체와 전쟁을 벌여야 했던 이유다.” 우리의 신체로부터 시작되는 그러한 욕망들은 그 욕망을 억압하는 질서와 노동을 강제하는 사회를 만나 저항하지 않는 한 우리가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신체는 저항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로 향한다.
요컨대 메이데이는 노동일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실현하는 날이다. 국가가 약속할 수 있는 최선이 ‘일자리 창출’인 사회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는 우리가 함께 이루어야 한다. 라인보우가 이 책에서 — 그리고 다른 책에서도 — 보여주는 것은 그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향해가는 여정이다. 예전부터 라인보우의 책을 읽을 때 받는 인상 중 하나는 여러 인물들이 정신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정말로 아래로부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맑스의 『자본』을 인용하면서 이런 각주를 단다. “나는 한때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독일 철도 노동자들이 최초로 이 엄청난 장(“노동일”을 다룬 『자본』 1권 10장)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증거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역사에 관심을 쏟는 사람이, 아니 그 이야기를 ‘역사’로 주목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이처럼 그가 기록하는 역사는 어떤 분위기, 즉 풀뿌리들의 일상적인 풍경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역사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어떤 것이지만 라인보우가 전하는 역사는 “인디언”, “불평분자”, “동성애자”, “탈주 노예”, “굴뚝 청소부와 낙농가의 여성 노동자” 등을 비롯한 “나라의 모든 인간쓰레기”라고 불린 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왕과 그 현대적 변형태들이 피를 수직적으로 이어받으며 정체성을 이어간다면 싸우는 자들은 수평적으로 서로 전염된다. 라인보우의 말처럼 “우리의 인간성은 단순한 유전적 계보를 넘어서는 유래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전염의 과정에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0년 7월호에 실린 글.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