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한 기계가 아이들의 '헤맬 권리'를 훔쳐갔다

실패 없는 매끄러운 교실이 길러내는 무기력한 세대

by 게으른 성실

​"선생님, 크롬북에서 클래스룸 과제가 안 열려요."
"선생님, 수학탐험대 또 튕겼어요! 로그인이 안 돼요."


​수업 종이 울리고 불과 10분. 교실은 순식간에 IT 고객센터로 변모한다. 나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교육자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오류를 잡아내고 매뉴얼을 안내하는 A/S 기사처럼 교실을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닌다. Wi-Fi 연결을 다시 잡아주고, 브라우저 캐시를 삭제하고, 재부팅을 지시하다 보면 어느새 진은 다 빠지고 정작 '수업'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에듀테크라는 화려한 혁신이 교실을 집어삼킨 후, 교사의 가장 잦은 업무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되어버렸다.


​멀티탭의 전원을 껐다 켜는 것 같은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기기들이 비로소 정상 작동을 시작하면 교실은 이내 잠잠해진다. 조용하다 못해 소름 끼치도록 고요하다. 서른 명의 아이들이 각자의 태블릿 스크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풍경. 질문도,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마찰이나 장난스러운 속삭임도 거세된 공간. 나는 이 적막한 교실을 볼 때마다 거대한 '블랙박스' 안에 갇힌 듯한 서늘함을 느낀다. 기기가 뿜어내는 푸른 불빛에 반사된 아이들의 얼굴은 고요하지만, 그 머릿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교사인 나는 직관할 수 없다. 우리는 연결된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에듀테크 기업과 교육 행정가들은 입을 모아 '개인화된 맞춤형 학습'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AI가 아이의 수준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최적의 문제를 제공하니 얼마나 효율적이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그들이 자랑하는 이 '기술적 맞춤화'는 현장에서 끔찍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기계가 아이의 모든 수준과 취향에 완벽하게 '맞춰주기' 시작하면서, 정작 아이들은 세상과 타인에게 스스로 '맞춰가는 법'을 잃어버렸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굳이 스스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친절한 AI가 먼저 약점을 분석해 떠먹여 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신의 인지 상태를 스스로 점검하고 판단하는 '메타인지' 능력은 급격히 퇴화하고 있다. 스스로 길을 잃어보고 방향을 가늠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아이들은 그저 알고리즘이 깔아둔 매끄러운 레일 위를 수동적으로 미끄러지듯 달릴 뿐이다.


​만약 이 시스템을 '혁신'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교실에 밀어 넣은 이들을 내 앞에 앉혀둘 수 있다면, 나는 멱살을 쥐는 심정으로 묻고 싶다. 교육이 그저 결손 없는 데이터를 아이들 머릿속에 효율적으로 구겨 넣는 작업이냐고.
​배움의 본질은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억센 힘에 있다. 정답이 없는 텅 빈 백지 앞에서, 지루하고 고독한 사고의 시간을 묵묵히 버텨내는 힘. 남들이 보기엔 한참 모자라고 거칠지라도, 끝끝내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자신만의 생각을 조립해 내는 그 둔탁한 과정이 바로 교육이다. 하지만 철학이 부재한 에듀테크는 아이들에게서 '건강하게 좌절할 권리'와 '고독하게 사유할 시간'을 빼앗아버렸다.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고 돌아보는 내면의 힘이 자라날 자리를 스크린이 대체해 버린 것이다.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홀로 설 수 있는 '참자기'로서의 인간성. 이것이 우리가 교실에서 끝까지 지켜내야 할 마지막 보루다. AI는 본질적으로 방대한 데이터의 '평균치'를 내는 기술이다. 이 평균의 기술에 교육을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 아이들 역시 뾰족한 개성을 잃고 AI의 답을 맹신하는 한없이 '평균적인 인간'으로 수렴하고 말 것이다.


​최첨단 디바이스로 무장한 고요하고 적막한 블랙박스 교실 안에서, 나는 뼈아프게 질문한다. 우리는 지금 거칠지만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AI의 지시에 순응하는 매끄러운 평균의 부품을 찍어내고 있는가.
​교실에 필요한 것은 더 빠르고 비싼 태블릿이 아니라, 잃어버린 교육의 철학을 되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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