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죽여버린 세상
이런 인터넷을 이야기할 때 댓글문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댓후감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콘텐츠들에 대한 반응을 보기 좋아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반응 자체에 반응하기도, 이미 써져 있는 댓글을 보고 콘텐츠에 대한 판단을 끝내기도 합니다. 좋아요/싫어요라는 평가를 넘어 주관적인 의사표현인 댓글문화는 대부분 익명성 위에 서있기에 흥미롭기도 하면서 공격적이기도 합니다.
가끔은 건설적인 논쟁이 되기도 하지만, 가끔은 유치한 말다툼이 됩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전혀 모르지만, (가끔 보이는 키보드배틀을 보면) 댓글로 하루의 기분을 망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진심입니다.
물론 극단적인 커뮤니티의 콘텐츠와 댓글들이 물의를 많이 일으키니, 그런 곳만 피하면 되는 것 아니냐 싶지만, 사실 그곳들에서 시작된 많은 설화와 용어들이 일반 인터넷에 마저 퍼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래라면 "저런 단어를 왜 써?"하고 지나치던 말들이 우리의 삶에 스며들었고, 결국 사회전체가 알고 앓고 있습니다. 오늘은 출처불명의 이런 커뮤니티 용어가 대한민국에 가져온 결과에 대해 논해보겠습니다.
"꼰대 같다"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처음 '꼰대'라는 말은 세대차이를 인지 못 하고 본인 사고방식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으로 시작했습니다. 맨날 "나 때는", "나 같으면"하며 훈계 놓는 사람들을 비꼬는 용도였습니다. 실제로 단어가 유행을 타며, 실제 생활에서 꼰대를 지목하기도 하고, 내가 그런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반에는 선배세대는 후배와의 세대차이를 인지하고 조심하는 좋은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배로서의 정당한 교육이나, 훈육등도 모두 "꼰대의 특징"이 되었고, 전통과 관례를 얘기하는 사람들도 꼰대취급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했습니다.
"괜히 안 나서련다"
그러다 보니 누구도 나서서 정당한 선후배 간 간 교육을 하려 하지 않고, 문화나 예절마저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세대 간의 간극의 이해하라고 경각심을 주려던 말이, 애초에 꼰대가 되지 않으려 교류를 안 해버리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원래 배우는 것은 불편한 것입니다. 아무리 듣기 싫어도 선배의 경험과 연륜은 작게나마 의미가 있는 것일 텐데, 모든 게 사라지거나 최소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대 간의 지혜의 전승을 잃었습니다. 과했던 윗세대 때문에, 아랫세대가 욕하고, 결국 다시 윗세대가 기피하고, 아랫세대도 거절한 결과입니다.
한 SNS에 유명 작가가 자신의 시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미 그는 유명한 시인이었고, 그의 시는 늘 좋은 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SNS를 떠오르는 감정을 실시간으로 담는 창으로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사소하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SNS 댓글창은 일부 사람들에 의해 댓글창은 "오글거린다", "부끄럽다"는 반응으로 얼룩지게 되었고, 시의 진정성까지 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상처받은 작가는 이후 작품을 SNS로 공개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평범한 우리는 그의 감성을 무료로 접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오글거린다는 것은 단어자체만 보면 귀여운 표현입니다. 뭐가 민망한 것을 보았을 때, 손발을 비비 꼬며 본인이 부끄러워하는 장면이 상상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조금 과한 감정표현이나, 감정적인 글들을 보면 우리는 오글거리는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의 오글거림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슷한 상황에 "낯 뜨겁다", "과하다" 정도의 말을 했을지언정, 온몸을 비비꼬지는 않았습니다. 오글거린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 결국 몸을 꼬는 우스꽝스러움과 연관이 됨과 함께 우리는 감정의 문을 닫았습니다. 조금만 감정이 격해져도, 조금만 행동이 더해져도 오글거림의 대상이 되다 보니, 마음의 말을 닫았습니다.
좋은 명언도, 이쁜 시어도 어찌 보면 아름답고, 어찌 보면 오글거립니다. 각자의 감수성과 상황이 다를진대, 누군가 오글거려 한마디 달아놓으면 그 글 자체가 민망함으로 가득합니다.
오글거림의 탄생과 동시에 태어나는 시인과 작사가의 절반은 죽었을지 모릅니다.
자고로 '선비'는 우리나라 대대로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점잖고 지적이며, 청렴한 느낌의 사람을 위한 용어였습니다. 선비스럽다는 말은 아주 오랫동안 칭찬일 수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문의 숭상하고 따르던 우리나라 내에서는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선비스러움이 비하와 조롱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선비라는 말에 강한 부사 '씹'이라는 말까지 붙여서요. 물론 이는 누구에게나 쓰이는 용어는 아니고 지나치게 도덕적이거나 윤리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사람을 조롱하는 비속어입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가치관이나 본인의 높은 도덕성을 남들에게 강요하거나 보여줄 때 나오는 말인 것이죠.
다만 문제는 누군가 일련 맞는 소리를 함에도, 그 무리의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이 단어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누군가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할 수 있고, 남들보다 높은 기준을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인데, 이것들은 씹선비의 소리로 묵살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남들에게 본인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도, 교화하는 것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인터넷과 지금의 사회란 "각자 알아서 하겠지. 나만 잘하면 돼" 하는 감정만이 남았습니다.
가끔 인터넷을 하다 보면, 굳이 누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관련 정보와 사실들을 줄줄 나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나도는 글 중에 누가 이해 못 할 단서라도 있거나 내용이 부족하다 싶으면 나서서 설명을 해주는 거죠. 원래 저도 이러한 글을 보면 솔직히 두 가지 감정이 들긴 했습니다. '애쓴다'와 '대단하네' 말이죠.
애쓴다는 감정은 누가 알아준다고 본인의 시간을 써서 저렇게 까지 하나 하는 것이었고, 대단하다는 건 그래도 저만큼이나 쓴다는 건 어찌 됐든 이 방면의 전문가겠구나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양가감정은 제 안의 마음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그들을 '설명충'으로 지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정성스러운 글도 누가 설명충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상 쓸데없는 지식나열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제일 필요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람마냥 비꼬았습니다. 이런 비난은 지적허영심에서 나왔건, 정말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 건, 자존심에 상처를 받기에는 충분해 보였습니다.
이러자 점차 사람들은 자신들의 낙이었던 정보공유를 덜하기 시작했습니다. 설명해서 듣는 인정보다 비난이 더 커졌으니까요. 지금은 둘러보면 예전만큼 인터넷 댓글의 단단면에 설명이 길게 늘여진 것을 쉽게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긴 글을 읽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잘 된 일이지만, 전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지식이 공유가 덜해졌고, 상황의 이해가 얕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가끔 뉴스로 공무원들이 본인들 업무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일의 강도도 높고, 업무시간은 많은데 정작 연봉은 최저시급에 준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실제로 그들로선 중요한 문제입니다. 충분히 불만을 토로할 자격이 되지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뒤에서 볼멘소리로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누칼협"이라고요. 풀어말해서 누가 (공무원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는 거지요. 본인들이 이미 상황을 안 좋은 것을 알고 들어갔으면서, 왜 이제 와서 딴 말이냐고 비꼬는 말입니다.
물론 저런 말을 들으면 당장 할 말은 없어집니다. 실제로 누가 협박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 본인이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시작한 것은 맞는 말이니까요. 그럼에도 누칼협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선택 이후의 모든 책임을 당시의 개개인에게 지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면 무엇을 선택할 때의 상황이 처음과 달라지는 것도 부지기수이고. 또한 무엇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알아보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알아봤다고 한 들 부조리함은 개선을 요구하는 권리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 네가 고른 거 아니냐 따지는 것은 결국 개선의욕의 위축과 자포자기를 조장할 위험이 있습니다. 개선을 말할 때마다 듣는 말이 아래와 같으니까요
"모든 잘못은 처음부터 대부분의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꼼꼼히 다 알아보지 않았던 그 당시 너의 잘못이야!"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비판적인 도발적이고 비꼬는 말에 반응하는 것을 '긁혔다'라고 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냐?' '그래서 찔리냐?' 정도의 뜻인 것이지요. 반응을 안 하고 넘어가면 긁혔다고 표현할 일이 없겠지만, 세상에 모든 만사가 정확하거나 내 마음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응하거나, 다른 의견을 내면 요샌 긁혔냐고 듣고 맙니다.
찔리는 것과 정정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데, 그것을 내가 찔려서 변명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차라리 나의 일이라면 끝까지 대응할 용의가 있겠습니다만, 아쉬울 때는 남의 일일 때입니다. 예를 들어 불특정다수를 향해 모욕적인 글을 쓴 사람에게 신경 써서 대응을 하면 할수록, 긁혔냐는 소리를 듣게 되고, 굳이 변호하는 것 같아 주춤하게 됩니다. 결국 그러면서 사람들이 불의나 불정확한 정보에 대응하지 않게 되고, 방치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또 비난을 한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그 말을 듣고 화를 내는 사람이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도 이상하고요.
결론적으로, 인터넷 문화의 변화는 우리 사회의 여러 측면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언급된 용어들은 처음에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변질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들이 우리의 일상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든 생각인데, 오늘의 제 글이 설명충의 씹선비 같은 훈계가 아니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