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 못된 아들
나는 평생 '보통'이나 '원래'라는 말을 견디지 못했다
머리가 커지는 순간부터 기억이 난다. 한국에 태어났다고 왜 계속 한국에 살아야 하냐 묻기도 하고, 집안이 대대로 믿는 부처님을 왜 믿어야 하냐고 며칠을 물었다. 고등학교 3년을 학교가 아닌 내가 따로 채우는 것이 낫지 않을지 몰래 끙끙대기도 했다.
이런 반골기질은 당연히 학교에 가서도 그대로였다.
'왜 이렇게 공부하지?'
늦은 밤 독서실에서 암기 대신 고민을 쌓던 날들을 모아, 내 모의고사 성적이 가장 높게 나온 날(가장 내 목소리가 큰 날), 나는 유학을 얘기했다.
"남들과 비슷한 대학 가서, 비슷한 시기에 군대 가고, 그렇게 취업하는 게 싫어요."
부모님은 당황하셨지만, 나는 설득했다.
아니, 밀어붙였다. 그들은 내게 용기 있다고 말씀 주셨다.
그렇게 따낸 유학을 가서도 난 가만있지 못했다. 며칠간의 시뮬레이션 끝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호떡을 팔고 싶다고 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외국에서 호떡 사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유학까지 가서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호떡이냐고 하셨지만, 나는 당차게 말했다.
(그때의 멘트는 지금 내가 생각해도 아직도 기가 안 찬다.)
"저를 성공시키러 결심하신 게 유학이라면, 제가 어떤 성공의 기회를 봤을 때 지원해 주세요."
부모님이 지원 예정이실 학비를 담보로 사업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물론 결국에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학교를 졸업하는 결말을 맞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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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특별할 것 없이 갔다. 국방의 의무는 전국의 모든 튀는 돌을 다듬어 냈고, 그렇게 다친 곳 없이 제대한 좋은 아들이 될 뻔했다. 하지만 그게 나이겠는가?
제대하자마자 또 사업을 하겠다며, 군 시절 내내 준비한 보따리를 풀어 재꼈다. 나는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을 무기로 부모님을 밀어붙였다. 사업 자금은 일부 부모님께 받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정부지원까지 끌어 모았다. 내 생각이 나쁘지 않음을 밖으로도 증명받고 싶었다. 특허에, 국가창업지원 합격에, 심지어 인터뷰 온 언론에서는 나를 천재라고도 표현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 확신이 아닌, 자식이 겪을 '실패의 가능성'과 싸워야 하셨다. 내가 '자부심'이라는 과실을 가끔 안겨드리는 동안, 부모님은 '불안감'이라는 이자를 매일같이 감당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좋은 일이 생기는 것과 사업의 성공은 별개의 문제였다. 허나 그 당시 내겐 큰 성공만이 목표였다. 그 덕분에 부모님은 나만큼 발이 아프셨다. 나만큼 제품을 여기저기 알리고 판매하고 홍보하시느라고생하셨다. 부모님이 부자가 되고 싶어서 그러셨을까? 아니다. 그냥 아들에게 성취감이라는 경험을 쥐어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26살 풋내기의 사업이 그리 잘될 리 없었다. 그렇게 사업은 막을 내렸다. 그래도 돈은 약간…. 정말 약간이나마 벌어서 부모님이 손해 보는 일만은 없었는데, 적어도 그것 때문에 부모님이 내 일탈을 무조건 막을 수도, 내가 일탈을 쉽게 강행할 수도 없는 중립지대가 형성되었다.
사업을 하며 나는 깨달았다. 혼자 사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일을 배우겠다며 마음먹고 직장에 후다닥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커리어 전환. 그럼에도 부모님은 안도하셨을 거다. '아들이 드디어 안정적으로 회사에 다니며 사회의 일원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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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한 직장생활로 약 10년을 보냈다. 번듯한 회사원이 된 나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보다 큰 일을 하고 있음에 취하지 않으려 내내 노력했다. 그리고 그 사이 나는 몇 번 직장을 옮겼다. 평범한 이직 코스프레였다. 정작 내가 사업 감각을 키우기 위해 이곳저곳 경험을 쌓는다는 걸 나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괜히 걱정만 끼칠 것 같아서. 그리고 나는 다시 회사를 그만뒀다. 특별한 결심이 서서가 아니라, 그냥 다시 내 길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남들이 시키는 일대로, 남들이 정해놓은 일을 하러 태어난 게 아니다. 남들이 옳다고 말하는 길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걷고 싶었다. 그리고 이 결심에는 독립선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은 무난한 가족여행 날이었다. 호텔 방에서 편의점 와인을 따라 마시며,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 다시 사업해요."
부모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가 만족할 만한 삶을 살기 위한 거예요. 무리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실 일은 없으실 거예요."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부모님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럴 줄 알았다."
어머니가 지은게 미소인지 씁쓸함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아들, 평범하게 살 애가 아니지..."
그렇게 나는 내가 준비한 안정적인 삶에 대한 반박을 제대로 읊지도 못하고 부모님의 동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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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아들을 둔 부모님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아들을 두고, 부모님은 늘 내려놓거나 놀라거나를 반복할 것이다. 재밌으면서도, 신기하면서도 걱정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내 평생의 모습은 내가 자식을 낳는 것에 자신이 없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누구보다 본인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누구보다 본인 같은 삶을 질러버리는 자식이 태어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 무도한 변칙의 음악은 내 대(代)에서 끊어야 하지 않나.
'비혼'이라는 가슴 철렁하는 선언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미 부모님께 수많은 놀람을 안기며, 좋은 아들은 못 되며 살아왔다. 끝내 모범생 아들 소리는 못 들을 것이다.
하지만 꼭 언젠가 이것만큼은 듣고싶다.
"너는 정말 원하는 만큼 살아봤구나."
그 말을. 부모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