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차

2022.12.02.

by 윤윤


오늘도 여섯 시에 눈을 떴는데, 무슨 일인지 아침에 실내점호를 했다. 우리들은 다들 기쁜 마음으로 생활관에서 애국가도 큰 목소리로 부르고 복무신조도 우렁찬 목소리로 제창하였는데, 이어지는 전달사항에서 불길한 내용이 있었다. 오늘 어떤 높으신 하늘의 별 같은 분이 훈련소에 오신단다. 어떤 단체든지 높으신 분이 오시면 분주해지기 마련인데, 훈련소라고 예외는 없었다.

일단 아침식사를 하고 와서 다시금 공지사항을 들었는데, 오늘 각개훈련은 예정과는 다르게 3교육대 전체를 두 조로 나누어, 본대 조는 예정되었던 곳보다 더 멀리 한 시간 반쯤 걸어가 빡센 각개훈련을 하는 곳으로 갈 것이며, 오늘 매우 힘들 예정이니 낙오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 자원하라고 하였고, 차등조는 어제 훈련했던 곳에서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훈련을 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전에는 부상이나 기타 이유 등으로 열외하거나 하는 인원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인원들도 열외 없이 모두 차등조에라도 참여하라고 하였다. 이게 바로 말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스타의 힘(?) 이구나.

나는 처음에는 용기 내어 본대에 지원해보려 했으나 훈련장까지만 한 시간 반동안 거의 산을 오르는 길을 가야 한다는 말에 차등조를 선택했다. 본대를 선택한 분대원들 중에서도 약간의 부상이나 불편함이 있는 친구들은 모두 빠꾸를 먹고 차등조에 편성되었다. 연병장에 각 조별로 모였는데, 본대랑 차등조의 인원이 비슷했다. 아무래도 보충역은 몸이 좋지 않아 온 사람이 많은데, 훈련 막바지쯤 되니 역시 어느 한 군데쯤 고장 난 사람이 많았다.


본대는 먼저 출발하고, 차등조는 어제 갔던 훈련장까지 느릿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부상병들이 많은 만큼 천천히 이동해야 부담을 덜 수 있기에 느린 걸음으로 이동했다. 차등조 중에는 처음에 연병장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부터 절뚝거리는 훈련병도 있었는데, 이 친구도 결국 훈련장까지 두 번 왔다 갔다 하고 코스도 두 번, 오늘의 모든 훈련을 수행했다. 군대가 하라면 하는 곳이고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일이지만, 안타까웠다. 수료하고 나서도 다리 때문에 한동안은 고생할 것 같은데.

어제 왔던 훈련장에 도착해서 배낭을 내려놓는데, 갑자기 모두 방독면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내놓고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게 무슨 일인고 하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내 뒤에 있던 우리 분대 훈련병 A가 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A는 방독면이 무게가 나가서 불편하니 그거를 빼고 신문지를 채워서 넣고 가져왔던 것이었다. 결국 분대장님의 검사에 걸려서 그 친구는 나중에 특별행동지원반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특수부대에 편성되어 남은 훈련기간 동안 불리면 가서 일하는 잡일담당이 되었다. 그렇게 한바탕 검사 소동이 지나가고 화장실 다녀올 겸 쉬는 시간에 A 옆의 다른 훈련병 B가 배가 찢어지게 웃었다. 알고 보니 B가 처음에 군장을 챙길 때 방독면이 무거우니까 빼야지 했는데 A가 그걸 보고 따라 했고, B는 짐을 다 챙기고 보니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다시 방독면을 챙겨 온 것이다. A는 B보고 배신자라고 욕했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군장검사를 왜 하게 되었을까? 알고 보니 다른 중대에서 어떤 용감한 분대가 전원 다 패기 있게 방독면가방 자체를 챙겨 오지 않은 것이다. 제일 앞에 선 몇 명이 다 방독면가방이 없으니, 내가 아무리 착한 간부여도 이런 상황에서는 화가 나서 전원 다 검사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시 보충역들인가.

오늘도 날이 추워서, 벌벌 떨며 어제처럼 오전에 코스를 후다다닥 타고 다시 모여서 생활관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날이 조금 풀린 오후에 다시 나와서 열심히 걷고 그 코스를 또 타고 다시 터벅터벅 걸어서 생활관으로 돌아왔더니 본대로 갔던 훈련병들이 생활관에 이미 돌아와 있었다. 우리보다 더 고생했을 친구들을 보니 전투복에 흙이 많이 묻어있었다. 고생 많이 했다고 토닥토닥해주며 뭘 했는지 물어보았다.

본대는 미리 예고된 대로 산길을 한 시간 반 걸어갔는데, 중간에부터 포장이 끊여서 흙길을 올라갔단다. 중간에 분대장님께 물어보니, 자기도 여기서 각개훈련 받아본적은 없다고 하셨다더라...... 훈련장에 도착해서 보니, 코스가 어제보다 훨씬 길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는 길이었다. 그리고 총성 비슷한 것이 들리는 스피커가 중간중간에 설치되어 있어서 현장감이 넘쳤다고 한다. 철조망을 기어서 가야 하는 곳도 있고, 진흙바닥도 있었는데 오늘은 그것을 피하지 못해서 전투복에 흙이 가득 묻었다고 했다. 그리고 중간에 연막탄 비슷한 것을 뿌려놓고 화생방 구역이라고 해서 방독면을 착용한 이후 지나가야 하는 곳이 있었는데, 우리 분대 훈련병 C는 방독면을 정신없이 쓰고 그 구간을 지난 이후 다시 넣으려고 봤더니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다음에 하필이면 철조망 코스가 또 있어서, C는 이 방독면을 손에 들고 어떻게 하지 하다가 철조망 위로 던지고 열심히 기어가서 철조망 끝에 걸린 방독면을 회수한 다음 열심히 또 달렸다고 한다. 그 코스를 다녀온 분대원들은 다들 마치 출발 드림팀 같아서 코스 탈 때만 재미있었다고 했다. 훈련장까지 오가는 길은 힘들기만 하고 끔찍했다고 한다. 아마 그 하늘 높으신 분은 어딘가에서 흐뭇하게 산을 타는 본대원들을 보고 계셨을 것이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각개훈련 2일 차가 끝났다. 나에게 남은 것은 훈련 자체보다 오가느라 고생한 내 다리, 그리고 사라진 가방 대신 다른 놈의 가방(그래도 핫팩이 하나 들어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훈련이 다음 주 행군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 기분은 좋았다. 저녁에는 후식으로 짜요짜요 2개를 줬는데, 미지근했지만 그래도 사회의 맛이라 좋았다. 생활관으로 돌아와서 누우니 다리는 아프고 피곤해서 누웠더니 잠깐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다.

잠시 후 옆자리 훈련병이 샤워하러 가야 한다고 깨워서 일어났는데, 그 사이에 우리 분대장이 인식표를 받아서 나눠주어서 내 것 두 개가 관물대에 올려져 있었다. 군번줄은 이전에 받았는데, 받은 인식표를 끼워보니 오 이게 드라마에서 보던 그것이구나 싶었다. 인식표에는 내 이름, 군번, 그리고 혈액형이 쓰여 있었다. 병무청 피검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을 텐데, 아마 그 기록이겠지 싶었다. 우리 분대의 훈련병 D는 이날부터 퇴소하기 전날까지 샤워할 때마다 군번줄을 끼고 샤워하고, 샤워가 끝나면 다시 벗어서 관물대에다가 올려놓았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이래야 군인 같은 느낌이 난다고 했다. 역시 우린 가짜군인임을 잘 인식하고 실천하는 친구였다.

오늘은 취침 전 총기점호를 실시했다. 이틀 동안 같이 땅바닥을 구른 총은 역시 흙투성이였다. 총을 분해하니 어떻게 이런 곳까지 할 정도로 구석에도 흙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다시금 총기손질은 끝이 없다라는 명언을 떠올리며 닦고 기름칠을 했다. 이제 총을 딱히 쓸 일이 없지만, 그동안 무거운 정이 들었으니 작별인사 라 생각하며 열심히 손질해 주었다. 이걸 다음에 받는 훈련병들은 다시금 여기서 총알이 나간다고? 하고 의문을 품겠지.

점호가 끝나고 자리에 누웠는데, 누가 오늘 밤에 한국과 포르투갈의 월드컵 경기가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이미 1무1패를 했는데, 과연 포르투갈을 이겨서 진출할 수 있을까? 축구를 좋아하던 친구들도 다들 큰 기대 없이 차라리 우리처럼 강제로 못 보는 게 낫다고 서로를 위로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일 결과를 알고 괜히 월드컵 기간에 왔다며 후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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