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에무시네마. 클로즈 유어 아이즈.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두 인간의 두상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서로 딱 붙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에 더해 나이차까지 있어 보인다. 그 모습에서 벌써 같은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관점이 바뀌었다는 상상,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반목하고 있다는 상상 등 별별 상상이 떠오른다. 그러한 상상에 더해 각자가 생각하기에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어떤 영화인가 보다 상상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 중 누군가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관점의 무의미성을 다루는 영화라 생각하며 영화를 봤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했건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야기는 보통 관객이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야기일 것이고 그렇기에 아마 모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누군가는 슬프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누군가는 아름답지만 잔인한 이야기를.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려는 바, 혹자는 진실이라고 할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참 신비롭다. 영화는 마치 영화 촬영 중 홀연히 사라진 배우 '훌리오 아레나스(호세 코로나도 분)'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진실에 대해서 영화는 어떤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근데 그 전에 앞서 언급한 저 진실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한 진실인가? 다른 진실이 있나? 사실 진실이 있는지 모르겠다. 진실이 있다는 것도 어쩌면 관객의 상상일지도 모른다. 진실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그것이 착각인지 아닌지. 재밌는 것은 관객이 이렇게 진실에 대해서 혼자 씨름하는 동안 영화도 진실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이 감추고 있되 알고 있는 진실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사실 진실은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등. 그저 보여지는 대상인 영화가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진실에 대해서 고뇌하고 있다는 상상력.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상상력은 멈추지를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영화가 진실을 고뇌하고 있다는 이 상상이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텍스트-관객이라는 구도에서 이미 우리는 텍스트 자체를 하나의 주체적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텍스트라는 세계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결과이지만 독자에 의해 읽히는 순간에는 완결된 결과가 아니라 여전히 상상력에 의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텍스트 그러니까 우리가 작품이라고 하는 이 대상은 단순히 작가와 독자를 만나게 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작가와 관객에게 자신의 존재부터 시작해 의문을 던지는 또 다른 주체와 같다. 그렇다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진실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해서 상상하게 하는 영화라 할 것이다. 이때 영화는 진실에 대해서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대상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관객의 상상력을 두 팔 벌려 환영할 따름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인물들의 이름이다. 이에 앞서 잠시 존재와 이름의 관계를 살펴보자. 존재(存在)라는 말을 살펴보면 굉장히 어색하다. 한자어를 풀면 있다는 말의 반복이다. 정리해서 표현해도 그저 있다는 말일 뿐이다. 다르게 말하면 있다는 것 혹은 존재라는 것은 '지금 여기에' 혹은 '시공간에' 혹은 '말 그대로 있다'는, 즉, 언어로도 '있다'는 말의 반복 밖에 할 수 없는 무엇이자 상태이다. 보통 명사가 무엇이라면 상태가 동사 혹은 형용사인 것과 달리 존재는 무엇과 상태가 동일하기에 이론적으로든 실재적으로든 규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대상을 무엇이라고 말하다"라는 의미의 서술어 '이르다'의 명사형이기도 한 이름은 존재의 본래성과 반대로 존재를 어느 한 지점 혹은 구역에 규정한다. 개념적으로 간신히 표현할 수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한정하는 이름은 명확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본래성에 따라 존재는 계속해서 이름을 거부한다. 이처럼 존재와 이름 사이 불협화음은 존재에 대한 다양한 인식, 즉 기억을 만들어낸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이름이 있으나 없는 이로 시작한다. <작별의 눈빛>에서 의뢰인 레비는 자신이 이름을 4번 바꾸었다고 말하며 레비의 딸은 주디스이면서 차오수이기도 하다. 미겔의 이웃 부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이름을 가지고 남편은 에스메랄다 혹은 에스트랄라로 아내는 후아나로 짓고 싶어 한다. 그런 부부를 보며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며 결국 이름은 신께서 알아서 지어주실 거라 말하는 이웃은 세례명이 루피노요 마을에서 불리는 이름은 빅풋이다. 마을에 살던 미국인 이웃에게 미국식 이름인 마이크라 불리던 미겔을 이웃 부부는 마이크라 부른다. 여기에 관객이 진실을 조사해야 하는 훌리오는 애초에 직업이 배우이다. <작별의 눈빛>에서 프랑크라 불리는 훌리오는 딸인 '아나(아나 토렌트 분)'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회상하며 하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수많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다. 미제 사건의 진행자 '마르타(헬레나 미켈 분)'이 가지고 있던 자료 중에는 훌리오가 탱고 강사 '마리오 과르디오네'로 소개되는 전단지가 있다. 실종 후 양로원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을 때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탱고를 자주 부른다는 것에서 탱고 가수의 이름을 딴 '가르델'로 불린다.
이처럼 이름이 흩트러져 있는 훌리오는 흩트러진 이름만큼이나 제각각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누군가는 함께 했던 젊은 시절 어느 정도 거만하고 그만큼 문제도 있었지만 누구나 문제가 있는 만큼 어떤 면에서는 평범했다고 하는 반면 누군가는 훌리오를 과거 스페인에서 사랑받는 배우들 중 한 명으로 기억한다. 누군가는 생부임에도 학교를 데려다주거나 여행을 가는 등 삶을 공유한 바가 없어 아버지로 느끼지 못했으며 목소리로만 그저 아버지였던 누군가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잘생긴 외모로 연애사나 바람기에 있어서는 낙오자였으며 그만큼 노화를 막지 못해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카사노바 기질을 주체 못해 결국 건드려서는 안 될 높은 지위에 있는 이의 아내를 건드려 화를 자초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다시 재기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넘쳐 술을 끊고 의욕적으로 영화 촬영에 임하려 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담배 살 정도의 급여만 받으면서 불평 없이 양로원의 살림살이를 모두 챙기는,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이따금 탱고를 부르면서 바다를 접하고 있는 국가는 모두 가본, 불법체류자라 하지만 실제로는 스페인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관객은 미겔의 발걸음을 따라 규정되지 않은 훌리오라는 존재만큼이나 훌리오에 대한 다양한 기억을 보게 된다.
관객에게 훌리오는 흩트러진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기억만큼이나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는 존재 즉, 유령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미겔이 미제 사건에 출연해 훌리오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지인들을 만나 훌리오에 대한 기억을 듣는 마드리드 부분과 방송 이후 훌리오가 찍힌 사진을 보고 잘 알지 못하는 지역의 시골 마을 양로원에 가 훌리오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양로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관객에게 있어 마드리드 부분의 훌리오는 다양한 기억으로만 되살아날 뿐 규정할 수 없는 유령이다. 움직이되 실재하지 않는 필름, 움직이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사진, 육체는 없고 목소리만 남은 테이프 등. 영상으로만 존재해 눈을 감으면 목소리로 훌리오란 것을 알 수 있으나 실제로는 언어로 전달되는 상상처럼 훌리오는 각각의 매체에서 파편화된, 실체 없는 유령이다. 반면 양로원 부분의 훌리오는 실체만 있을 뿐 이름이 명확하지 않은 유령이다. 일사병에 의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다음 이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가르델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그 이름을 이곳 양로원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무엇이지 자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살아있는 것 같냐는 신경과 주치의의 질문의 의미 자체를 모르겠다고 답한 바 있다. 다른 모두가 훌리오라고 생각하지만 스스로는 훌리오라 규정하지 않는 유령인 것이다. 관객에게 훌리오는 실체가 있음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살아있는지조차 모르는, 주치의의 표현을 활용하면 영혼이 죽어있는 시체이다.
이렇듯 존재와 이름이 불협화음을 보이는 훌리오와 관련해서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의 내부로 관객의 상상력이 수렴하도록 한다. 극 중 극처럼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실종된 배우 훌리오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인 <작별의 눈빛>으로 시작해 <작별의 눈빛>으로 끝낸다. 흥미로운 것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작별의 눈빛>은 처음과 마지막 딱 두 씬 밖에 촬영을 하지 못하고 끝난 미완의 영화라는 것이다. 즉,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첫 신은 <작별의 눈빛>의 첫번째 씬이자 시퀀스이며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마지막 신은 <작별의 눈빛>의 마지막 씬이자 시퀀스이다. 이에 따라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기승전결 중 기와 결 밖에 없는 영화 <작별의 눈빛>으로 기와 결을 구성하면서 승과 전을 훌리오 아레나스를 알아가는 '미겔 가라이(마놀로 솔로 분)'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기묘한 구조를 띄게 된다. 이러한 구조가 더욱 기묘한 이유는 <작별의 눈빛>이 유대인 레비의 의뢰로 중국 상하이에 있는 딸을 찾아야 하는 프랑크-훌리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딸을 찾아야 하는 프랑크-훌리오에서 훌리오의 실종에 대한 진실을 탐색하는 프로그램 '미제 사건'을 계기로 훌리오에 대해 알아보는 미겔을 따라가게 된다. 관객에게 훌리오의 진실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는 미션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관객이 미션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게 도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관객이 보게 되는 이미지들은 진실보다는 종말에 가깝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인물들을 보면 모두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 미겔, 훌리오와 함께 <작별의 눈빛>을 촬영한 제작진들 대다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나마 살아있는 편집자 '막스(마리오 파르도 분)'도 미겔과 마찬가지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다. 훌리오의 딸 아나는 프라도 미술관의 명작, 걸작 곁에서 일하는 것이 익숙해져 이제는 더이상 작품에서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일상처럼 박물관 큐레이터 일을 하고 있다. 훌리오가 발견된 양로원 역시 나이든 수녀들의 관리 하에 찾아오는 가족이나 지인은 거의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노인들로 가득하다. 관객이 따라가야 하는 미겔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단순히 나이가 많은 것만이 아니다. 한때는 꽤 명성이 있는 소설가이자 영화 감독이었던 미겔은 이제 가끔 짧은 에세이를 쓸 뿐 소설은 쓰지 않으며 영화 관련 서적 번역을 주 업무로 하며 살아간다. 보통 때는 글도 안 쓰고 그저 빅풋의 어업을 도와줄 뿐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인물들은 삶에서 생명력이 사라지고 있는 이들인 것이다.
인물만이 아니라 영화의 다양한 문화 요소들도 모두 생명력을 잃고 있다. 양로원을 관리하는 '콘수엘로 수녀(페트라 마르티네스 분)'는 요즘 사람들은 탱고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말한다. 한 때는 '마리오 과르디오네'라는 이름의 탱고 강사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탱고를 흥얼거리는 것을 이유로 훌리오는 가르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영화임에도 역설적으로 영화가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말한다는 것이다. 90% 이상이 광화학 필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영사기가 없어 볼 수 없고 이제 서서히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막스의 필름으로 처음 내적으로 영화를 저물어가는 산업의 산물이라 규정하면서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의 종언을 예고한다. 영화 내적으로 존재의 종언을 예고하는 것에 맞물려 얄궂게도 영화 외적으로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영화는 그 자체의 의미도, 영화관이라는 고유의 장소의 의미도 잃어버리고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쉽게 향유할 수 있는 오락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오락거리가 된 것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영화가 지닌, 어쩌면 영화를 통해 상상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그런 낭만이 사라지는 것이 슬프게만 느껴진다. 각설하고 다르게 말하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다른 모든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혹은 지금의 모든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영화(映畵)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더 이상 비추기 위한 기기도, 비춰지는 막도, 그 두 개를 모두 갖춘 장소도, 영(影)을 떠올리는 상상까지도 모두 서서히 사라지는 시대의 유령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내부로 돌아가 조금 더 극단적이고 끔찍하게 표현하면 영화만이 아니라 훌리오, 미겔, 막스, 양로원의 노인들 등 관객이 훌리오의 진실과 조사하면서 보게 되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이미지는 노년, 즉 죽음의 이미지이다. 수많은 명작과 걸작들 사이에서 일하는 것조차 이제는 평범하다 느끼는 아나처럼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오래 연속되어 온 평범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산송장의 이미지가 만연한 것이다. 관객이 미겔을 따라 훌리오의 진실을 파헤치며 보게 되는 것은 너무나 오래되어 익숙하고 이제는 사라지는 것만을 기다리는 평범한 그 무엇들이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미지들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며 축적되는 시간과 확장되는 공간만큼이나 대상에는 기억이 쌓이고 그 기억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마드리드의 길거리 서점에서 미겔이 자신과 훌리오 둘 모두와 연인이었던 '롤라(솔레다드 비야밀)'에게 준 책을 생각해보자. 결혼을 위해 미국으로 가기 전 집에 두고 간 책이 모친의 죽음으로 집이 팔려 이곳 저곳을 떠돌다 어느 날 마드리드의 길거리 서점에서 미겔에게 발견되어 다시 롤라에게 돌아간다. 언제 어디로 흘러가 어떤 주인을 만나 어떤 일을 겪었는가? 롤라의 책만큼이나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관객에게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훌리오가 있다. 비가 오던 밤 촬영지 근처 바닷가 절벽에 흔적을 남긴 채 사라진 훌리오에 대한 미겔의 상상은 훌리오가 어떤 사람인지 만이 아니라 어떤 심정으로 비를 맞았는지, 무슨 생각으로 사라지려고 했는지 등을 상상하게 한다. 훌리오의 밀회에 대한 정보로 더해지는 상대에 대한 상상, 비를 맞으며 세상에 엿을 먹이겠다는 훌리오의 감정에 대한 상상 등 스크린에 펼쳐지는 미겔의 상상에 대해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반박과 동조를 더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저 잊히는 것으로 끝났을지 모를 어떤 유령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너무나도 지루하고 익숙한 평범의 늪으로 침잠하는 유령은 맥동하는 상상력을 타고 늪을 박차고 나올 듯하며 끝나지 않는다.
잠시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제목으로도 돌아가보자. 훌리오의 진실을 파악해야 하는 관객에게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의 제목치고는 어색하다. 영화를 봐야 하는 관객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는 것인데 스크린의 영샹을 봐야 하는 관객에게 눈을 감으라는 것은 정반대의 행동을 하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상상이라는 행위를 생각해보면 눈을 감는 행위는 지금 현재 눈앞의 광경을 모두 지우고 온전히 이전의 정보 다르게 말하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형상 기억을 통해 가능하다. 즉, 상상하는 행위는 유령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행위이다. 가르델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눈을 뜬 채 자신을 소개하다 벽을 등진 채 자신의 이름을 되뇌이며 눈을 감는 아나를 떠올려보자. 아나는 가르델이 자신의 아버지인 훌리오가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즉 배우인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본 인물이 아버지라는 것을 떠올린 자신의 기억으로 아버지를 되살리기 위해 눈을 감는다. 이러한 상상의 행위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 영화의 구조에도 깔려 있다. 마치 눈을 감듯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페이드 아웃은 영화의 제목과 공명해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본 샷이나 시퀀스를 반복적으로 되돌리게 한다. 다르게 말하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통해 관객은 2번 유령을 보는 것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나 스크린을 통해 눈에 비치는 영상으로 존재하는 유령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나 자신의 형상 기억을 통해 재생되는 스크린의 유령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상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상상을 통해 되살아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훌리오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지, 훌리오는 살아있는지, 가르델은 훌리오가 맞는지 등. 어떤 것의 진실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른바 미스터리라 할 요소들이 영화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미스터리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미스터리의 이면에 있는 것들, 그러니까 어쩌면 지루하고 익숙한 평범의 늪으로 사라지는 존재들, 그러니까 우리가 삶의 무게에 의해 잊고 지낸 그 모든 것들을 상상하게 한다. 삶을 버티며 이제 노년을 거쳐 죽음에 다가가는 우리가 미스터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그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면서 잊힌 존재들을 다시 지금에 현시하도록 하는 과정. 화면에 영사되는 모든 것들을 빠르게 넘길 뿐만 아니라 현재를 빠르게 벗어나길 원하면서 매일 새롭기를 바라며 현재마저 죽이고 또 죽이는 우리에게 상상은 되돌리기를 반복하고 반복을 곱씹도록 하는 비효율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효율적인 과정에서 상상은 두 존재를 되살린다. 삶의 무게에 의해 잊고 지낸 모든 존재들과 상상을 하며 자신의 과거를 현재의 자신과 연결하는 상상의 주체를 되살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훌리오의 존재를 되살린다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훌리오와 함께 제작했으나 실종으로 완성되지 못한 <작별의 눈빛>을 문을 닫은지 두 달이 된 영화관에서 함께 보는 장면을 떠올리자. 영화를 상영하기 전 미겔은 마치 공연이 시작될 것을 알리는 듯 먼저 무대 앞에 서서 상영회에 온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한다. 그런 다음 그가 하는 행동은 영화관에 온 관객들의 자리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재배치하는 과정을 보면 미겔은 뒷줄에 몰려 앉은 관객들을 좌우로 고루 퍼뜨린다. 마치 불이 꺼진 상영관에 사람들이 가득찬 것처럼 느끼게 하려는 듯. 세계적으로 영화관 산업이 어떤지 모르겠으나 한국의 멀티플렉스 현황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미겔의 행동은 어떤 상상을 자극한다. 과거 영화가 매진되고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사람들이 붙어 앉아 영화를 보는 모습 말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긴장되는 장면일 <작별의 눈빛>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모두가 가르델을 바라보는 가운데 가르델 혹은 훌리오가 눈을 감는 장면을 보자. 극중 영화가 끝나듯 막을 내리게 되는 영화에서 과연 가르델 아니 훌리오는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까? 수많은 존재로 스스로를 바꾸는 배우였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그 과거를 지금의 자신과 연결하고 있을까? 아니면 스크린에 떠오른 배우를 보며 잊었지만 떠오른 과거의 편린을 상상하고 있을까? 그는 영혼이 죽어있는 시체에서 벗어났을까? 훌리오의 상상은 관객마다 다를 것이고 그 상상은 관객이 되살리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즉 존재일 것이다.
어쩌면 영화는 범람하는 수많은 영상 콘텐츠의 분류 기준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의미없이 스쳐가는 오락거리 중 하나로, 이른바 킬링 타임용으로 전락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가까운 미래에는 막스의 말처럼 산업고고학에서나 의미를 찾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고고학조차도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해 지루하게 느껴지는 평범한 무엇으로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영화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관객이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상, 우리가 살아 숨쉬며 어느 한 순간 상상하는 존재인 이상 다 쓰러져가는 산업으로 치부하고 끝날지도 모를 영화는 계속해서 상상을 통해 각자마다 아름다운 의미로 규정될 것이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평범이라는 종말의 늪에 빠져 사는 우리도 과거로 밀리며 사라지는 것들을 잊을 것이고 지금의 빛나는 순간조차도 지루하다는 감정의 단편으로 치부한 채 모든 순간을 규정하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삶도 영화의 씬과 시퀀스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으나 되감기와 재생을 반복하는 상상을 통해서 각자만의 아름다운 의미로 규정되듯 평범의 늪에서 상상을 디딤돌로 우리의 순간은 아름다운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언제고 의미 자체가 무의미의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우리가 눈을 감고 상상하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내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