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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노 Jul 14. 2023

알쓸싱잡-싱가포르 길 이름

골목길 이름으로 본 싱가포르 문화의 다양성

동료 직원으로부터 사는 곳이 어디냐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내 답변을 들은 동료는 갑자기 웃으며, "너는 오줌거리에 사는구나"라며 놀렸다. 외국에 사는 나로서 길 이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공과금 우편 수령지를 적는 영어 알파벳일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오줌 거리에 산다는 말은 적잖은 당황스러움과 길 이름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사는 곳은 절대 오줌 거리라는 뜻을 가지지 않았다. 단지 발음의 유사함이 있을 뿐.

싱가포르에 살게 된 지도 어느 덧 7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곳의 수많은 골목길을 때로는 맨정신으로, 또 때로는 술에 취해, 일에 찌들어 거닐 때도 있었다. 나에게 싱가포르 골목길이란 구글맵에 나오는 방향성의 역할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작은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길 이름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아가 역사와 유래라는 것이 있을지도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내가 소변 거리에 산다는 놀림을 받기 전까지는.




싱가포르의 길 이름은 1800년 대 초, 싱가포르의 건설자로 잘 알려진 스탬포드 래플스 경의 도시 계획에 따라 명명된 것이 그 유래로 볼 수 있다. 그는 싱가포르 지역을 거주 구역과 산업별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길 이름은 주로 식민지 지배인물, 사유지 소유자의 이름, 말레이 주도 및 인근 동남아의 장소 이름을 따서 지었다. 거주 지역 내 인종 구분을 명확하기 위해서 특정 인종(민족)과 관련되 이름을 따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Geylang Serai라는 길 이름은 레몬그라스(Serai)를 재배하는 농장이 있는 지역을 부르기 위해 지어졌으며, Dauby Ghat는 인도 노동자들이 세탁을 하던 지역을 부르기 위해 지어졌다. 이와 더불어, Ipoh Lane, Bencolen Street, Mandaly Road 등은 각각 식민지배 시절 이주해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독립 이후, 싱가포르는 식민지 지배 당시의 이름을 유지하면서 영국식 도로 이름 표기를 말레이어와 중국어로 조금씩 수정되었다. 지금의 싱가포르의 길 이름은 영어와 말레이어로 표기되어 있다. 동시에 중국어로도 발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길 이름은 명사와 형용사 형태로 되어 있으며,  단어들은 지금의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3개의 문화권인 말레이어, 중국어, 타밀어 등으로부터 파생되었다.


1966년까지만 하더라도 싱가포르의 길 이름은 약 1,600여개 였지만, 지금은 2배나 많은 약 3,200여개의 길 이름이 있다. 말레이 일상언어로 된 이름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주로 자연 랜드마크에 사용되었다. 영어로 된 이름은 전체의 25%, 중국어와 타밀어, 미얀마어 등이 그 다음을 이루고 있다. 특이하게도 아래 싱가포르 거리 이름 분포표에서 볼 수 있듯, 길 이름이 이곳 저곳 혼재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의 집단성을 가지고 그룹화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s://www.sg101.gov.sg/places/streets-of-singapore/our-streets-of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말레이어로 된 길 이름들이다. 말레이어로 된 거리 이름들은 주로 과일, 원석, 심지어 별자리 이름까지 테마별로 그룹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국분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 중 싱가포르 Beauty World 라는 동네에는 전 세계 존재하는 모든 바나나 종류의 이름으로 거리 이름이 지어졌다. 살짝 덜 익은 바나나부터 빨간 바나나까지, 동남아 여러 곳을 여행한 나로서도 이렇게 많은 바나나가 있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지도 처음 알게 되었다. 아직 이 '바나나 길'들을 실제로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길 자체가 바나나가 익는 순서로 발전된 모습은 아니겠지만, 한 번 쯤 산책을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출처: https://graphics.straitstimes.com/STI/STIMEDIA/Interactives/2019/06/singapore-street-names/index


이렇게 길 이름과 구글 맵을 찾아보던 중, 문득 예전 독일 여행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첫 여행지였던 독일, 그리고 첫 발디딤이었던 장소 하이델베르크. 첫 여행인지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나는 대학에서 공부하던 철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길이름을 보고 꽂혀 무작정 '철학자의 길'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려 싱가포르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는지 계속해서 구글맵을 확대하며 찾아보았다. 싱가포르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다. 심지어 시인의 길도 같이 있다.


이 길들은 중국의 유명한 시인 이백(Li Po Avenue)과 두보(Tu Fu Avenue) 등 그리고 이슬람 시인이자 철학자인 Iqbal(Iqbal Avenue)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처럼 사색을 하기 좋다거나, 산책하기 좋은 길은 아니다. 싱가포르에서 무엇이든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되는 습관을 익혔기에, 이 길들 역시 이름만 시인들의 이름을 차용했을 뿐, 그 어떠한 것도 시인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단지 여러 집들이 있는 곳일 뿐. 언젠가 그런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살게 된다면, 비오는 날 거리를 바라보며, 두보를 생각하며, 그의 시를 한 수 읽어보는 것이 그 거리를 즐기는 법이지 않을까.

독일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 (https://kr.trip.com/moments/detail/heidelberg-790-14514859/)







싱가포르 이백 거리 (출처: Google Map)














우리 나라 파주 헤이리에 '마음이 닿길'이라는 예쁜 길이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역시 도로명 주소로 개편하면서 여러 예쁜 길 이름들이 생겨났고, 이러한 길 이름들을 통해서 길들이 있는 곳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소소한 재미가 생기게 되었다. 7년 동안 모르고, 앞으로 모를 수도 있는 싱가포르의 길 이름들일 뿐일 수도 있다. 싱가포르라는 여러 문화가 공존하고 유지되는 나라에서 길 이름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소소한 재미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약간의 비약하자면, 점점 다문화 사회로 변해가는 한국에 더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언젠가 다문화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많은 거리 이름들도 이러한 여러 문화의 특성을 반영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싱가포르 길 이름의 역사와 유래가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함께 들게 되었다.   



참조 링크

https://graphics.straitstimes.com/STI/STIMEDIA/Interactives/2019/06/singapore-street-names/index.html

https://www.sg101.gov.sg/places/streets-of-singapore/our-streets-of

https://www.timeout.com/singapore/things-to-do/singapore-street-names-and-the-interesting-stories-behind-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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