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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드의숲 Apr 05. 2019

지하철에서 당신은 보셨나요?

그 할머니

                                                                                                                                                                                                                                                                                                                                                      스마트폰 홈버튼을 검지 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벌써 8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밀린 업무도 업무지만 천편일률적인 미팅과 회의들로 인해 퇴근이 늦어졌다.


저녁도 먹지 못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절실한 귀가본능이 느껴져 지하철역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개찰구를 지나 내려가는 계단에 첫 발을 딛자 열차 도착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학처럼 긴 다리 모양을 하고 두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기막힌 타이밍에 문이 열렸고 재빠르게 몸을 던졌다.


연말이라 다들 어디를 갔는지 평소 발 디딜 틈도 없던 지하철 안이 빈 깡통처럼 텅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넉넉하게 앉아서 책을 폈다.


철학서라 불리는 구본형 선생의 책을 펼쳤는데 어느새 열차는 환승구간에 다다라있었다. 


나는 3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을지로 3가에서 내려 터널 모양의 환승통로로 이동했다. 


환승통로 중간지점을 지났을까?


더덕 냄새가 순식간에 코 안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20미터 즈음 앞에 쭈그려앉은 한 할머니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열심히 더덕 껍질을 까고 계셨다. 


머리엔 빨간 모자를 쓰고 해진 팔뚝 위로 조각난 퀼트 무늬 천을 덧대어 꿰맨 점퍼를 입고 계셨다.


이 혹한에 아무리 지하라 해도 저렇게 앉아계시면 안될 텐데.


순간 통로 끝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지하철 단속요원들이었다.


할머니의 손은 까던 껍질을 멈추고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헉! 어쩌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노파에겐 일상다반사인 듯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워했던 건 나였다.


어쩌면 그 노파의 유일한 생계수단일지도 모를 더덕 판매행위가 위협받는 상황이라 느껴졌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비쳤다.


나는 노파에게 다가가 냉큼 더덕을 요청했다.


지갑에 든 현금 2만 원을 꺼내 노파에게 내밀며 외쳤다.


"할머니 더덕 냄새가 달큼하네요. 더덕 2만 원 한지 주세요!"


하지만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런데 안 추우세요 할머니?"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설마 말하는 방법이 나와 다를까 싶어 손에 들고 있던 책에 펜을 찍었다가 곧 장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알은체는 오지랖만 키울 뿐이다.


느닷없는 행동에 부끄러움이 솟아 얼굴을 빨갛게 익게했다.


어느새 단속원들은 우리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속원들도 불법인건 알지만 차마 그 앞에선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나 보다.


나는 노파가 건네 준 더덕을 받아들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단속요원들은 할머니의 짐을 함께 챙겨드리며 여기서 장사하시면 안 된다는 말 같은 걸 했던 것 같다.


이후 수십 번을 넘게 그 통로를 지나다녔지만 다시는 할머니를 볼 수 없었다.




지난 번 지하철 안에서 두 중년의 대화가 생각난다.


"요즘은 늙어서 박스 줍지 않으면 인생 성공한 거래!" 


우스갯소리처럼 들렸지만 결코 웃을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허기져 있던 배는 잊힌지 오래였다.


집으로 오는 내내 느릿느릿 밀려드는 쓸쓸함 만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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