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도 힙하다
이른바 '꼰대' 담론이 한창 일기 시작한 시절, 가끔 꼰대들이 불쌍해 보인 때가 있었다. 부장 등 꼰대들은 고작 회사 막내였던 내게도 무슨 말이든 꺼내기 전마다 꼭 궁색한 밑밥을 깔았다.
"이런 말 하면 꼰대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뭐 이런 거였다.
그냥 편히 말하면 될 것을, 업계 20여 년차 상사가 입사 1년도 안 된 병아리에 이렇게까지 눈치를 보나…싶다가도, 세상이 원최 꼰대들을 '악의 축'인마냥 난리발광이었다 보니 한편으론 이해도 갔다.
암튼, 이렇게 저렇게 지내다 나도 어느덧 직장 10년 차가 됐다. 후배들한테는 가끔 '꼰대' 놀림을 받고, 선배들한텐 'MZ' 소리를 들을 때가 '매우 간혹' 있다. 정확히는 "너도 MZ인가? 하기야 1980년대생부터 2000년대까지 다 MZ라더라. 너도 MZ해라" 식인데, 이럼 어떻고 저럼 어떻냐.
다만 젠장. 꼰대는 예나 지금이나 욕먹지만, 요즘은 MZ마저 가끔 '무개념' 등으로 조롱당하는 현상이 맘에 좀 걸린다… 여기선 꼰대, 저기선 MZ라 일컫는 자체가 뭐랄까, 정체성 대혼란이다.
이 얘길 한 후배한테도 한 적이 있었는데, 얘는 "에이, 선배! 선배가 MZ는 아니죠 ㅋㅋㅋ" 사이다길래 이 자식한텐 괜히 말했다 싶었다.
결국…난 아무도 관심 없을 테지만, 혼자 속으로 'MZ와 꼰대, 둘 다 받아들이겠노라' 선언했다.
이 같은 다짐은 나의 내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요근래 몇 차례 '꼰대 전도사'가 되곤 했다. 내 또래 동기 혹은 얼마 차이 안 나는 선배들에 "꼰대가 되길 두려워 마십시오" 응원(?)과 격려(?)를 해줬다.
이유인 즉,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난 절대 꼰대가 되지 않겠다" "결코 되어선 안 된다" 등 지나친 강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 그들 또한 말 한마디를 속시원히 못한다. 세상을 힘들게 산다.
예컨대 한 선배는 어느 날 까마득한 회사 후배와 카페에서 같이 일을 했단다. 음료 계산하고 자리에 앉아보니 와이파이 비번을 확인해야 했던 상황, 마음 같아선 후배한테 '여기 와이파이 비번이 뭐니' 묻고 싶었지만, 그냥 자기가 알아왔단다. 후배한테 시키면 꼰대처럼 보일 수 있다나 뭐라나.
난 당최 뭔 X소리인가 싶어 "그깟 것까지 눈치를 보냐"며 "미움받을 용기를 갖고 삶을 대하시라" 당부했다. 그러자 그 선배는 내게 "너 꼰대냐" 되치기를 시전했지만, 타격감은 당연 없었다.
아니 세상에, 후배한테 와이파이 비번 하나 못 물어보다니 해도 너무하지 않냔 말이다. "와이파이 비번 때문에 후배가 선배를 욕한다면 걔도 제정신이 아니고, 이를 눈치보는 당신도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니냐" 이 말이다. 나는 "그러다 화병 걸려서 요절한다. 그냥 꼰대임을 인정하고 속 편히 살라"고도 충고했다.
그러다 나도 최근 후배 여럿과 술자리를 갖게 됐다. 나랑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애들이었다. 지들 밑으로도 후배가 꽤 있는데, 여쩌다 꼰대 얘기가 또 나왔다. 역시나 "어디서 꼰대 소리 들을까 겁난다" 따위 말들이 주를 이뤘다.
난 어김없이 "뭐 그런 걸로 눈치 보냐"고 일장연설을 했다.
그러자 후배들은 마치 물 만난 고기마냥, 이때다 싶었는지 나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선배! ㅋㅋㅋㅋ 그러다 진짜로 후배들한테 꼰대 소리 들으면 어쩌려 그래요!"
난 "아무렴 어떻냐"며 '필살기' 발언을 이어갔다. 이건 사실 '와이파이 사건'으로 대화를 나눈 선배를 비롯, 내가 '꼰대 전도사'로서 곳곳에 웅변하는 논리인데…내용은 이렇다.
꼰대가 힙하다
스우파1 우승자이자, 스우파2 '역대급' 메가크루 미션 주역인 댄서 허니제이도 스스로를 꼰대로 정의했다! 난 이 장면이 몹시 멋져 보였다. "그래 이거다" 싶었다. 주변에 이 기쁜 소식을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아 잘 들어라. 여기 기쁜 소식이 하나 있다. 이제는 꼰대도 힙(HIP)하다. 아니다. 꼰대가 힙하다. 천하의 허니제이도 본인이 꼰대라고 직접 밝혔다. 여기서 허니제이보다 힙한 자 과연 있느냐. 너희는 너희를 사랑해야 한다. 허니제이가 꼰대라 인정하면 자신감이고, 우리가 꼰대임을 고백하면 걍 꼰대 그 잡채란 말이냐. 스스로를 낮추지 말라. 더는 그러한 자신 없는 태도를 내비치지 말라.
더 있다.
배우 이다희는 SNL코리아에 출연해 '꼰대가 아닌 척, 쿨한 척은 젊꼰(젊은 꼰대)이나 하는 짓, 나는 그런 짓 안 한다'고 밝혔다. 난 연설을 이어갔다.
나는 어디선 꼰대, 저기선 MZ로 불리는, 이도저도 아닌 '낀 세대'다. 그러므로 너희들에 이 같이 말한다. 또한 진정한 해방을 권고한다. 꼰대가 낫다. 그러니 너희들은 쿨한 척, 깨어 있는 척, 꼰대 아닌 척 하지 마라. 너희들은 후배들에 '아닌 건 아닌 거다'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다. 매번 '그래, 그럴 수 있지' 말한다. 그건 거짓말이다. 가서 거울을 봐라. 진실을 증언하지 못한 탓에, 어느 한 구석 미세하게 일그러진 그대들의 표정을 관찰해라. 거짓말쟁이들아, 너희들이 마치 후배들을 세상 모든 위계와 질서에서 해방시켜 주는 선배인 척하며, 늘상 '그럴 수 있지' 가식된 말을 던진다는 것.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젊은 꼰대'나 하는 짓이다. 이는 '힙하디 힙한' SNL코리아의 깨어 있는 작가들을 거쳐, 배우 이다희의 입을 통해 나온 진리다. 너희 가운데 SNL보다, 이다희보다 힙한 자 있느냐. 다시 한 번 말한다. 꼰대도 힙하다. 아니다. 꼰대가 힙하다.
이 말을 들은 후배들은 대체로 "오, 이런 역대급 개소리는 처음"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다른 반응도 있었다. 일각에선 "대단히 훌륭한 역발상"이라며 '유레카!'도 나왔다. 뭐, 받아들이는 건 저들 몫이고, 술은 재밌게 잘 마셨다.
'꼰대 전도사'의 깃발은 앞으로도 활기차게 춤을 춘다. 단, '꼰밍아웃'을 하더라도 주의해야 할 게 있다. 이는 바로…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