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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오천 Oct 01. 2015

그리움마저 잊다 #5 (마지막 이야기)

쉬니엔은 기억 저편에서 빠져 나오는 듯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양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민 바람에 쉬니엔은 깜짝 놀라 실수로 클락션을 눌렀다.

하지만 길게 늘어선 차들은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없다.


“내 꿈 꾼 적 있어?”

양이가 씩 웃으며 묻는다.


“너랑 루왕이 공연하는 꿈은 꾼 적 있어. 서로 음정이 안 맞았지.”


“쳇, 그거 보면서 펑펑 울었다던 사람이 누군데 그래?”


쉬니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옛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금세 다시 표정이 어두워진다.


“졸업한지 벌써 4년이나 됐네. 눈 깜짝할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어.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러웠는데, 또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흘러간 것 같아.”


쉬니엔의 말을 양이가 이어 받는다.

“졸업할 때 많이 아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담담했던 것 같아. 나는 그게 제일 아쉬워. 하긴, 네가 곧 베이징에 온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쉬니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마침 그때 서있던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쪽 모퉁이만 돌면 도착이야.”


코끝이 찡해옴과 동시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떻게 하면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있을까.

알츠하이머를 앓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소중한 기억과 사랑하는 사람을 점차 잊어 가다가, 죽기 직전 눈 감는 마지막 몇 초가 태어나며 처음 눈 떴을 때의 몇 초와 완벽히 일치하여, 어떤 기억도 남기지 않고 또 어떤 기억도 갖고 가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막혔던 길이 조금씩 뚫리자 쉬니엔이 가속 페달을 밟는다. 차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양이가 소매를 걷어올리자 손목에 둘러져 있는 끈 팔찌가 보인다. 팔찌에 달린 진주에는 고3 때 미처 완성하지 못 했던 나머지 글자가 새겨있다.


영원한, 사랑.


더는 못 참고 쉬니엔의 눈에서 와락 눈물이 쏟아진다.


“왜 또 울어. 이제 안 울기로 했잖아.”


가까스로 핸들을 잡고 있는 쉬니엔의 어깨가 마구 떨린다.


“내가 옆에 있잖아!”

“널 사랑하는 내가!”

“쉬니엔, 영원히 나 잊으면 안 돼.”


양이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울던 쉬니엔은 마주 오는 차에 놀라 핸들을 틀었다. 정신없이 우느라 중앙차선을 넘어버린 것도 몰랐다.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앞에 봉황산이 보인다.


홀로 차에서 내린 쉬니엔은 몇 걸음 못 가 아까 산 국화를 차에 두고 내렸음을 깨달았다.

뒤돌아 차로 돌아갔지만, 조수석은 텅 빈 채로 꽃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쉬니엔은 숨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킨다.

어느새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온다.

또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지 가슴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양이가 봤다면 분명 좋아했을 검은색 코트를 입고, 하얀 국화를 손에 꼭 쥔 채, 회색 묘비 사이를 걸어간다. 루왕과 샹위안이 꼭대기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쉬니엔은 묘비 앞에 국화를 내려놓는다. 사진 속의 양이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활짝 웃고 있다. 그런 양이를 바라보는 쉬니엔의 머릿속에 양이와 함께 지내온 시간들이 하나 둘 재생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면은 바로 4년 전 그날이다.


4년 전 그날, 드디어 베이징에 올라온 쉬니엔은 잔뜩 신이 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 모든 것을 눈에 담으려는 듯 눈을 반짝였지만, 정작 바로 옆에 달려드는 차는 미처 보질 못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양이가 밀쳐냈다.  


***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책장 정리를 하는데, 잡동사니 속에서 어떤 멜로디가 계속 흘러나왔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상자를 뒤지고 또 뒤져서 카드 하나를 찾아냈다. 고1 때 양이가 준 크리스마스 카드다.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생일 축하 노래는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시 자기에게 고백하려고 이래저래 머리를 굴렸을 양이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무 오래 돼서일까. 카드 중간 접착 부분이 떨어져있는 게 보였다. 그땐 미처 발견하지 못 했는데, 접착 부분 뒤에 종이 한 장이 더 껴있다.

조심스럽게, 양이가 썼을 편지를 펼쳤다.



사랑하는 쉬니엔,


네 공식 라이벌의 자격으로, 이 편지를 발견해낸 너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네가 잘 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는데, 요즘 이상하게 자꾸만 네가 궁금하다. 널 놀리고 난 뒤 너의 반응이 궁금하고, 날 이긴 뒤  의기양양해할 너의 모습도 기다려지고, 오늘은 어떤 길로 걸어갈지, 교복 안에 어떤 티셔츠를 입고 왔을지, 모두 궁금해. 어느 순간 보니 내가 매일 애들 사이에서 널 찾고 있더라. 그런데 있지, 요즘은 찾을 필요가 없더라고. 어딜 가나 네가 보여서. 너도 그럴 것 같은데… 아니라면, 너 눈 되게 나쁜 거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용기 내서 말하는 거야. 내 이름에 비록 불 화자가 네 개나 있지만, 한 번도 뭐에 불타오른 적은 없었어. 그런데 널 만난 뒤로 힘을 많이 얻었다. 그랬기에 오늘 이렇게 용기 내서 고백할 수 있는 건지도 몰라.


네가 참 좋다. 항상 너랑  함께하고 싶어. 늙을 때까지 티격태격하면서 그렇게… 주민등록등본에 너와 내 이름이 같이 올라갔으면 좋겠고, 너와 아이도 많이 낳고 싶고…


이 편지 본 뒤 날 피할 수도 있겠지. 그 정도는 각오하고 고백하는 거야. 그런 걸로 널 원망하지 않아.

그저 내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나 같은 남자가 대신 널 잘 보살펴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너의 가시 돋은 말도 잘 받아주고, 종종 욕도 먹어줘야 하는데…

유난히 위스키봉봉을 좋아하고 또 밤에 어두운 걸 무서워하는 널, 이해해줘야 하는데…

언니 같은 엄마와 엄청 쿨한 아빠가 계시지만 저 우주에 벌써 가계시기에, 그래서 그 작은 우주를 늘 가슴에 품고 사는 널, 따뜻하게 감싸줘야 하는데…

변덕스럽고, 가끔 인상도 잘 쓰고, 말싸움도 잘하고, 수학과 과학을 엄청 잘하고, 되게 씩씩한 너이지만, 그래도 혼자는 안 된다는 것을, 절대로 외롭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쉬니엔, 사랑한다!

비록 아직은 성공하지 못 했지만, 내 사랑이 네게 전해지도록 난 계속 노력할 거다.


2006년 12월 24일



누구에게나 학창 시절은 한 편의 영화 같을 것이다. 힘들었던 일, 가슴 아팠던 일, 그리고 운이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시간들… 그 과정에서 아쉬움이 남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아쉬움을 과연 한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쉬는 시간에 매점으로 달려가 사먹던 빵. 방과 후 학교 앞 분식집에서 나눠 먹던 떡볶이 한 접시. 그 추억들과 함께 그와 나, 혹은 그녀와 나의 관계도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결국은 모든 게 부질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다고 해서, 또한 서로를 위해 큰 용기를 냈었다고 해서 흐르는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며 두 사람 앞에 길고 긴 미래가 펼쳐지기도 하지만, 멀고 먼 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작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쉽게 잊게 되고, 가슴 아팠던 기억만 생생하게  가슴속에 자리 잡는다.


학창 시절 이후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또 다른 연애를 하지만, 그때처럼 함께 빵을 사먹고 함께 떡볶이를 먹으며 수줍은 첫 키스에 얼굴이 붉어지던 그런 연애를 하지는 못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함께 열광했던 그 드라마 속에서, 김탄은 차은상을 정말로 사랑했고, 윤윤제도 성시원을 정말로 사랑했다.


그도,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 마침 -


처음으로 국내 미출간 단편 소설을 브런치에 연재했습니다.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단편 소설도 브런치에 소개하겠습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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