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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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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이 Jun 26. 2019

사연 없는 남자는 섹시하다

<검법남녀 시즌2>

“나가! 스피커 꺼! 들어오지 마.”


<검법남녀>의 주인공 백범(정재영 분)이 자주 하는 대사다. 그의 대사는 보통 반말에 명령조인데, ‘까칠법의학자’라는 소개처럼 그의 반사회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반사회적 천재’ 캐릭터는 한국 드라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설정이다. 예를 들어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 분)나 <싸인>의 윤지훈(박신양 분) 같은 캐릭터는 지금껏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독선적이고 까칠해 늘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지만 사실 속마음은 따뜻하고, 어떤 사연이 계기가 되어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된 인물. 시즌 1에서의 백범이 그렇다. 하지만 시즌 1보다 시즌 2의 그는 더 매력적이다. 다른 한국 드라마와 달리, 시즌 1에서의 그와 달리, 무(無) 맥락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사연을 다 써버린 남자

흔히 사연 있는 남자 주인공은 여성 시청자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한다고 한다. 안타깝고 불행한 사연이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하게 만들고 지켜주고 싶게 하는 거다. 시즌 1의 백범도 그랬다. 그의 까칠함과 반사회적인 특성은, 사랑하는 연인과 친구를 잃은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외국 드라마만 찬양하는 드라마 사대주의자는 아니다. 그만큼 외국 드라마를 많이 보지도 못했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 드라마에서 늘 아쉬웠던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인물의 현재 모습을 설정할 때, 꼭 사연을 집어넣는다는 점. 거의 끼워 맞추듯 획일적인 시점에 등장하는 인물의 사연은 인물의 현재를 확실하게 설명해준다. (가난, 친구의 배신, 연인의 죽음 등이 단골 소재다) 그리고 동시에 인물의 특성을 강요한다.

살면서 나의 지금 모습이 과거의 어떤 일 때문에 형성된 것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내가 아는 나의 장점, 단점, 특징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언제부터 그랬는지 왜 그런 건지 제대로 모른다. 그리고 감히 확신하건대 그 이유가 하나는 아닐 거다. 하지만 드라마의 인물은 다들 하나의 엄청난 사건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다. 인생에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뻔하게.

시즌 2의 백범은 시즌 1의 그와 다르다. 그의 과거에 대한 해명은 시즌 1에서 모두 완결되었다. 따라서 시즌 2의 그는 자유롭다. 사연을 다 써버린, 사연 없는 캐릭터가 등장한 것이다.


사연 없는 영국 남자

내가 정말 사랑하는 또 다른 반사회적 천재 캐릭터 셜록(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을 가져와 보려고 한다. 영국 드라마 <셜록>의 셜록은 ‘고기능 소시오패스’로 백범처럼 오로지 사건 해결에만 관심이 있으며 그 외의 대인관계나 예의 등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매우 특징적으로 그가 왜 소시오패스인지에 대해 작품은 별 관심이 없다. 오직 셜록이 즐거워하는 사건 해결에 매진할 뿐이다.

한국 드라마였다면, 셜록이 왜 고기능 소시오패스가 되었는가에 대한 해명은 줄거리의 핵심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셜록>은 셜록의 개인사를 시즌 4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거의 생략해버리는 태도로 일관한다. 작품 안에서 셜록은 그냥 그런 사람이다.

<셜록>을 보는 동안 나는 셜록이 왜 고기능 소시오패스가 되었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다. 그의 놀라운 능력과 추리 과정만으로 나는 매료됐다. 셜록은 그저 셜록이었고, 그런 셜록이 나는 좋았다. 그와 함께하면서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왓슨(마틴 프리먼 분), 허드슨 부인(우나 스텁스 분), 몰리(루 브릴리 분)처럼.


사연 없는 남자는 섹시하다

물론 사연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주로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시청자가 긍정적으로 보게 만들어야 할 때이다. 시청자는 본능적으로 착한 인물에 끌리고, 나쁜 인물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따라서 나쁜 주인공은 대부분 원래 착했지만 어떤 계기로 나빠진 인물이며, 이런 경우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은 인물이 나빠진 이유를 설명하는 데 매우 좋은 수단이 된다. 사연이 일종의 면죄부인 셈이다.

어쩌면 시즌 1에서의 백범 또한 이런 이유로 사연을 갖게 되었을지 모른다. 반사회적인 특성이 남자 주인공으로서 시청자들에게 부적합하게 비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하지만, 시즌 2에서의 백범은 사연 없이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시즌 1의 백범은 사건을 겪고 나쁘게 변해버린, 그래서 상처를 이겨내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야 할 인물이다. 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 또한 대체로 부정적이었고, 사연에 대한 의심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충분히 매력적인 백범은 은솔(정유미 분)의 시각과 함께 이상한 사람, 과격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사연을 벗어던진 뒤 그는 그제야 백범 자체로 기능한다. 까칠한 건 성격일 뿐이고 원칙주의적인 것은 성향일 뿐이다.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은솔과, 그의 현재 모습을 좋아하는 샐리(강승현 분)와 함께 그는 시청자도 받아들일 만한 주인공이 된다.



한국의 작품들은 그동안 지독하게 과거의 사연에 집착해왔다. 이제는 내려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현재를 설명하는 것은 과거뿐만이 아니며, 무맥락은 때로 맥락 과잉보다 더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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