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복수인가

영화 <야연>, 희곡 <햄릿>

by 줄리이

야연

중국, 펑 샤오강, 2006




복수는 많은 드라마, 영화의 단골 소재다.

복수극에는 최소 세 사람이 필요하다. 복수를 하는 사람, 복수를 당하는 사람, 그리고 복수를 도와주는 조력자.

복수극 이야기에는 주로 피해를 입은 대상과 원한의 대상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누가 복수를 하느냐에 대해서 그 경우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상 이야기 구조를 분석해보면 의외로 다양한 인물이 복수를 하는 사람, 즉 주체로 설정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피해자, 피해자가 입은 피해로 인해 심적·물적 고통을 받을 피해자의 가족이나 지인, 피해자를 대리하여 법적인 싸움을 벌이거나 사적인 방법으로 대신 복수해주는 제3자 등 여러 인물 유형이 복수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해진 복수의 주체는 그 인물의 유형에 따라 다른 행동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행동방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극의 전개에 있어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야연>과 <햄릿>

<햄릿>은 숙부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햄릿이 미치광이 노릇을 하며 복수의 기회를 엿보다가 숙부를 죽이지만, 끝내 자신도 죽고 마는 복수극이자 비극이다. <야연>은 이런 <햄릿>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따왔는데, 다만 복수를 하는 주체가 달라진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아니라, 남편을 잃은 미망인 '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movie_image (2).jpg <야연> 네이버 영화

복수극이면서 사극인 영화에서 복수하는 사람을 여성으로 설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남성 중심의 극이 대부분이었던 시기에, 그것도 다분히 과격한 기질이 강한 복수극에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활용하는 것은 꽤나 리스크가 큰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성공만 한다면 이는 매우 효과적인 전환이다. 복수의 전형성에서는 살짝 벗어나지만 극에 색다름을 부여하고, 다른 매력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연>은 성공적 변용에 실패했다.


-완은 '왜' 복수하는가.

복수는 자신이 입은 피해와 고통을 그 가해자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서 기인한 행위다. 따라서 그 복수 행위에 대한 당위성은 등장인물이 복수의 대상으로부터 받은 고통이 클수록 증가한다. 복수극에서 당위성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관객이 주인공이 겪은 일을 '복수할 만한 일'로 여기고 지지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야연>에서 완은 죽은 왕의 부인이라는 점에서 피해자의 가족으로서 복수주체에 합당한 지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완과 죽은 왕의 사이를 일반적인 부부관계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완은 햄릿 역할인 우루안의 어머니가 아니다. 우루안의 정인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우루안의 아버지와 결혼하고, 숙부의 반정으로 또 다시 숙부의 부인이 된 여자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아픔을 묻어둔 채 살고 있는 여인인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사연이 있더라도 완은 복수의 주체가 되기에는 좀 약하다. 더 강한 원한을 가진 우루안이 있기 때문이다. 우루안은 아버지도, 자신의 차기 왕으로서의 지위도, 자신의 정인도 모두 잃었다. 하지만 완은 숙부가 아끼는 황후로서 자신의 자리도 보존하고 있었다. 완이 우루안을 다시 황위에 앉히기 위해서 복수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잃은 것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왜 복수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심지어 <야연>은 완이 복수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 우루안을 굉장히 무능력하고 바보같은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마음이 너무 약하고 계획적이지도 않고 무모하기까지 한 사람으로 설정한 것이다.

movie_image (1).jpg <야연> 네이버 영화


-숙부는 왜 스스로 죽는가.

<햄릿>에서 햄릿은 숙부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복수를 완성한다. 그리고 자신도 죽으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하지만 <야연>에서 완은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지 못한다. 숙부가 스스로 독주를 마시며 자살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복수극에서는 복수를 당하는 사람이 어떤 종말을 맞는지만큼 중요한 것이 누가 그렇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복수를 향해 달려오다가 갑자기 복수를 당하는 사람이 심지어 자신이 우위인 상황에서 자살을해버리는 것이다. 숙부는 황위를 위해 자신의 형을 죽인 사람이다. 자신의 황위를 위협하는 우루안까지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완이 자신을 죽인다고 하니 자살을 하한다. 이는 굉장히 모순적인 결론이다.

<햄릿>은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고 원하는 것을 이뤘지만 끝내 다시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구조다. 모든 것을 얻은 정점의 순간, 다시 모든 것을 잃으면서 비극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조를 <야연>도 따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마지막 상황에 완이 누군가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완은 복수의 실패로 얻은 것이 없다. 황후에서 황제가 되며 권력을 조금 더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 무엇을 가졌다가 잃었는지 모르니 그 비극성도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연기와 진실

<햄릿>에서 햄릿은 미치광이인 척을 해서 숙부의 눈을 속이고 자신의 목숨을 지킨다. <야연>에서 완도 마찬가지다. 완은 사랑하는 아내를 연기하며 숙부를 속인다. 이렇게 극중에서 다른 극중 인물을 속이기 위해 하는 연기는, 그 이면에 있는 인물의 진짜 심리와 생각이 함께 제시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외부인인 관객의 입장에서는 등장인물이 하는 행위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속임수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연>에서 완은 자신이 "얼굴 자체를 탈로 바꾸고 연기"를 하는 중이라면서도 그 연기 뒤에 어떤 진심이 있는지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완이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완이 왜 다 죽이는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복수를 하고 싶은 건지, 권력을 얻고 싶은 건지, 아니면 우루안의 복수를 도우려는 건지.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초반에는 우루안에게 "황태자라면 나라를 다스릴 힘과 용기를 길러야 한다"며 우루안의 복위를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나중에는 딱히 우루안을 돕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완의 태도는 결국 극의 주제와 전개방향마저 흐릿하게 만들고는 말았다. 햄릿처럼 복수극인지, 이루어지지 못하는 절절한 사랑을 그리고 싶은 것인지, 한 여자의 권력에 대한 야망을 그리고 싶은 것인지 이도저도 파악하지 못하게 말이다.




<햄릿>은 고전이다. 두고두고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하지만 <야연>은 아니었다. <햄릿>의 구도를 따라갔음에도, 그만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극은 극의 주제, 중심인물의 행동과 심리, 이야기 구조 등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인데 다른 것들은 입맛대로 바꾸어놓고 이야기 구조는 유지하려니 충돌하는 지점이 생긴 것이다.

한 편으로는 아쉬운 지점이 있다. 이야기를 잘만 풀어냈다면 멋진 영상미와 함께 또 한 편의 훌륭한 여성주체영화가 생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장쯔이의 연기와 미모는 아주 훌륭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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