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포레스트>, KBS2, 2020.01.29.~, 연출: 오종록 / 극본: 이선영 / 제작사: iHQ-가지컨텐츠-스타포스
드라마를 많이 보는 시청자라면, 이미 한 번 이상 이런 생각을 해봤을 거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똑같네.'
패션에만 유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 캐릭터도 유행을 탄다. 츤데레 재벌-가난한 캔디가 유행하고,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유행하고, 구마사제가 유행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가 유행했다. 이밖에도 많은 유행 캐릭터가 있을 거다.
드라마는 대중예술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 그것이 드라마의 목표인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대중의 관심을 입증한 캐릭터는 그냥 지나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선택지다. 새로운 건 없는 세상에 유행에서 벗어난 캐릭터는 유행이 이미 지났거나, 너무 미래지향적이거나, 너무 특징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캐릭터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비슷한 캐릭터를 계속 보게 된다.
유행은 바뀔 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캐릭터를 가진 작품이 나오는 건 어쩌면 필연이 된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흔하디 흔한 캐릭터인데 어떤 캐릭터는 사랑받고, 어떤 캐릭터는 잊혀진다. 무엇이 캐릭터의 매력을 결정할까?
드라마의 1-2화는 인물을 소개하고, 시청자가 계속 보고 싶게끔 드라마의 시그니처라고도 할 수 있는 핵심 사건의 실마리를 던지는 회차다. 1-2화를 통해 시청자는 등장인물을 처음 만나 이들이 응원해도 좋은 인물인지, 정이 가는 인물들인지, 그래서 작품을 계속 볼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게 된다. 시청자에게 등장인물의 첫 인상을 남겨주는 아주 중요한 회차인 것이다. 따라서 1-2화에서는 캐릭터가 가진 특성을 섬세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포레스트>의 1-2화를 본 지금, 나는 이 작품이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기존의 캐릭터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포레스트>의 캐릭터 설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로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 설정은 유행이라고 하기도 부족하다.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자 바이블이다.
남자 주인공 강산혁은 능력 좋지만 차갑고 성격 나쁜 인물, 여자 주인공 정영재는 가난하지만 기죽지 않고 씩씩한 인물이다. 구태여 열거하지 않아도 드라마 좀 본다 하는 사람이라면 마음 속으로 최소 한 명씩은 떠올랐을 거다. 전작 속 비슷한 류의 캐릭터가.
공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캐릭터 설정이 싫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전적이지만 나름대로 매력을 불어넣기 위해 열심히 설정한 캐릭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레스트>의 두 주인공이 사랑받는 캐릭터가 되기보다 잊혀지는 캐릭터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강산혁(박해진 분)
국내 굴지의 투자회사인 RLI의 투자본부장
손대는 사업마다 엄청난 수익률을 올리는 기업 인수-합병의 스페셜리스트
M&A계의 스타
그림같은 외모와 강철 근육 => 비현실적인 로망남
24시간 언제 어디에서라도 투자자 앞에서 완벽한 '수트 강'
일을 위해선 서슴없이 친구를 고발할 만큼 차가운 심장을 가녔으며 전쟁에서 승자가 되는 게 좋은 이유는 패자를 땅에 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냉혈한
사업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발로 하는 것이라 여길 만큼 실사를 중시 => 위장 잠입의 달인
정영재(조보아 분)
대학병원 외과 레지던트
육두문자와 비속어를 사랑하는 거침없는 성격
입에 걸레 문 낭자 '입걸랑'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해 남의 일에 자주 휘말리는 사람
뻔뻔은 그녀의 힘
있다고 있는 척 쎄다고 쎈 척 하는 인간들은 반드시 밟아주고 싶은
입양아로 자랐고 넉넉하지 않은 집안
주인공이 독백을 하지 않는 이상, 시청자가 캐릭터를 파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말과 행동을 보는 거다. 먼저 '말'을 보려고 한다.
나는 <포레스트>의 인물 소개를 위한 여러 대사가 과하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느꼈다. 드라마는 캐릭터도, 대사도, 어떤 독특한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시청자를 홀리기 위해서!' 그런데 그렇다고 너무 독특하기만 하면 시청자의 입장에서 캐릭터에 몰입하기가 힘들다.
줄타기가 필요하다. 시청자를 홀릴 수 있게 독특하면서도 너무 과해 오히려 캐릭터의 매력을 반감시키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적정선을 지켜주는 것이 드라마 대사에서는 필수다.
<포레스트>의 경우, 특히 남자 주인공인 강산혁 캐릭터의 대사가 과하게 느껴졌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 아주 많이 반영된 결과다. 이 글을 쓰며 클립을 한 네 다섯 번 돌려봤더니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지금은 많이 사라지기도 했다. 많이 보면 적응되기도 하나보다.
하지만 이 캐릭터가 쏟아내는 대사를 처음 듣고, 나는 이 캐릭터가 궁금해지고 매력적이긴커녕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졌다. 안타깝게도.
커피를 달라고 해요, 내가요?
보는 눈을 통 갈고 닦지 않으시는 겁니까?
부티, 귀티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말이 되는 소릴 하심 좋겠군요.
사람 되긴 어려워도, 하수구 날벌레는 되지 맙시다. 커피 한 잔에.
상황파악이 잘 안 되나 보군요.
방금 매우 무례하게 차와는 무관한 내 카메라에 함부로 손을 댔고,
어처구니 없게 웃기까지 했으며
그로 인해 당신의 한 달치 월급이 날아가는 중입니다. 지금.
강산혁 같은 자기애가 강한 캐릭터의 경우 능력과 재력, 외모에 관한 자기 칭찬은 거의 필수처럼 등장하는 대사다. 그리고 자화자찬형 대사가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떤 캐릭터의 자화자찬 대사는 귀엽고, 매력적이다.
눈부시지 않나, 나한테서 나오는 아우라!
식사 끝나면 이걸로 비행기나 한 대 사세요.
회사 지출 아니고 개인 지출이니까 문제 없겠죠.
이거, 한도 없습니다.
강산혁과 비슷한 캐릭터면서 화제성이 높았던 최근 드라마 두 편을 뽑아 1화에 등장한 주인공의 '자화자찬형' 발언을 가져와봤다. 강산혁의 발언 만큼이나 과하고 오글거린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볼 때 왜 나는 이 말을 내뱉는 캐릭터들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을까.
대사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대사뿐 아니라 상황도 문제였다.
1-2화에서 강산혁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잘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내 맘에 들지 않았던 부분은 특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때였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서 이영준(박서준 분)이 하는 "눈부시지 않나, 나한테서 나오는 아우라!'라는 대사는 매일 만나는 비서인 김미소(박민영 분)를 향한 것이었다. 친한 사람에게, 그것도 사적인 공간에서 내뱉은 말인 것이다. 미소에게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영준의 모습은 그래서 오글거리지만 귀엽다. 부하직원이지만 자신을 인정해주기 바라고 우쭈쭈해주길 바라는 아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뷰티 인사이드>에서 서도재(이민기 분)가 하는 "식사 끝나면 이걸로 비행기나 한 대 사세요. 회사 지출 아니고 개인 지출이니까 문제 없겠죠. 이거, 한도 없습니다."라는 대사는 자신을 깎아 내리려고만 하는 회사 동료를 향한 것이었다. 도재의 돈자랑은 상대쪽에서 먼저 취해온 도발에 대한 대응인 것이다. 그래서 도재의 발언이 시원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강산혁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장소인 병원에서,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인 영재에게, 그리고 산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최창에게 뜬금없이 자화자찬형 대사를 날린다. '보는 눈', '하수구 날벌레', '당신의 한 달치 월급' 등 상대를 비하하는 표현을 담은 것은 덤이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 꼭 남을 낮출 필요는 없다. 재력이나 능력이 그럴 권한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강산혁은 아주 당당하게 그 일을 한다. 그런 말을 할 상황도 아닌 때에, 그정도로 친분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리고 그래서 강산혁의 태도는 쿨하고 멋있기보다 짜증나고 불편하다.
강산혁 캐릭터가 아쉬워지는 것은 그가 이도 저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막말을 쏟아내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최우선인 캐릭터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처음부터 '나쁜 남자' 컨셉으로 캐릭터를 구축하고, 그래서 마지막에 관계와 갈등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 '나쁘다'는 것이 사실은 문제가 없다는 것을 극의 전개를 통해 보여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캐릭터를 이해 가능하게 풀어줄 수 있다. <시간>의 천수호(김정현 분),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 분), <하얀 거탑>의 장준혁(김명민 분) 등 우린 이미 '나쁘다'는 걸 컨셉으로 한 많은 캐릭터를 보았고, 충분히 그들에게 몰입했다.
하지만 강산혁은 '나쁜 남자'가 아니다. 영재에게 차를 태워주기도 하고, 잘못한 걸 알게 되면 사과도 한다. 나쁜 남자도 아니면서 오직 재미를 위해 이런 무리한 대사를 넣은 것이다.
강산혁 캐릭터가 이도 저도 아닌 것은 그의 완벽함에도 적용된다. 강산혁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항상 자신의 체면과 커리어가 중요한 사람이고. 그래서 자신의 병을 부정하고, 정신과 진료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유일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바로 이번에 처음 만난 영재 앞에서다. 그는 여주인공 영재 앞에서 놀랍도록 무장해제다.
앞서 '하수구 날벌레'라고 언급한 씬에서 강산혁은 원래 결벽증 설정도 아니고 그 이전이나 이후에 결벽증인 모습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갑자기 영재의 손가락이 들어간 커피에 과민반응을 보이며 "더럽게~!"하고 소리치며 뛴다. 완벽한 척 하길 좋아하는 그를 생각하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모습이다.
2화의 병원씬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재의 대사로 진정제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설명해주고는 있지만, 원래 모습을 되찾았던 강산혁은 금방 귀신 같은 형상을 보더니 영재에게 가지 말라고 매달리고, "엄만 왜 맨날 모르는 애를 등에 업고 다니냐"는 둥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런 강산혁의 모습은 강산혁 캐릭터의 입체적인 특성이나, 영재와의 운명적 관계를 위한 장치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모습이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캐릭터가 일관적이지 못하고 이질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래서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강산혁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들다. 이런 사람인지, 저런 사람인지.
캐릭터를 살리는 한 끗은 결국 '일관성'이다. 등장인물 소개에서 설명된 그 인물이, 드라마의 인물과 동일인물처럼 보일 수 있도록. 시청자가 등장인물을 잘 이해하고, 그 캐릭터의 몰입해서, 결국 그의 변화과정을 응원하고 쭉 지켜볼 수 있도록. 이렇게만 해도 캐릭터의 매력이 중간은 가는 것 같다. 개연성에 도움이 되는 건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