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기억법>
<그 남자의 기억법>, MBC, 2020.03.18.~, 연출: 오현종, 이수현 / 극본: 김윤주, 윤지현 / 제작사: 초록뱀미디어
반대가 되는 특징을 가진 남녀 주인공은 로맨틱 코미디/멜로 장르에서 흔히 사용되는 코드다.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부딪치고 싸우면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언제 봐도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일까. 지금껏 많은 드라마는 반대되는 성격이나 반대되는 상황, 반대되는 직업 등 여러 가지 요소로 변주해가며 이 '반대 코드'를 사용해 왔다. 그리고 예전부터 아주 자주 사용된 반대 코드 중에는 이것도 있다. 많은 걸 할 수 있는 남자와 아무 능력이 없는 여자의 조합.
사실 이 조합은 내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조합이다. 이 조합이 신데렐라 스토리와 거의 세트처럼 붙어다니기도 했고, 여성 캐릭터가 항상 백치미에 민폐 담당인 건 이제 반드시 바뀌어야 할 관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런치에서도 여러 차례 이런 여자 주인공들을 비판했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들을.
그런데 이 작품은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조합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아주 똑똑하게 변주시켰다. 마치 마법과도 같이.
이 작품의 여자 주인공 '여하진'(문가영 분)은 아름다운 여배우지만, 많은 톱스타 여배우 캐릭터가 그랬듯 철없고, 엉뚱하고, 솔직하면서 멍청한 인간형이다. 하진의 이런 모습은 사실 외모 말고는 쉽게 좋아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여성 톱스타 분들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어떤 톱스타가 이렇게 대책없이 살면서도 그 인기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지. 현실적으로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드라마에서 여성 배우들이 이렇게 소비되는 것도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똑똑한 톱스타는 대체 왜 안 나오는 거야)
그런데 이 작품은 하진의 이런 볼썽사나운 면모를 핵심 소재로 훌륭하게 정당화했다. 그것도 직접 남자주인공의 입으로 지적해가며.
정훈이 말하는 것처럼 하진은 변덕스럽고 멍청하고, 백치미가 철철 넘치는 싫어할 만한 이유가 많은 여자지만, 그녀에게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기억.
작품에서 '기억'은 제목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중요한 소재다. 그리고 하진은 이 '기억'을 주기적으로 지워내는 여자다. 자주 잊으면서 솔직함과 밝음, 철없음을 무기 삼아 힘든 일상을 버텨내는 여자. 그래서 이 여자는 조금 멍청하고, 엉뚱하고, 지나치게 솔직해도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사랑스럽다.
"와, 머리 잘 썼다" 하며 내가 감탄한 지점은 이 지점이다. 여자 주인공이 멍청한 걸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걸 넘어서서, 이 멍청한 여자 주인공이 이대로 계속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하길 바라게 만드는 상황. 작품은 아이러니에 가까운 상황으로 하진의 매력을 만들어냈다.
작품에서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캐릭터는 남자 주인공인 정훈이다. 많은 능력자 캐릭터가 그렇듯, 정훈은 하진보다 많은 걸 알고 있고, 하진이 모르게 하진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시청자는 자연히 정훈의 마음에서 하진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 서연(이주빈 분)을 잃은 정훈이,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하진을 보는 마음으로. 자신처럼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괴롭게 살지 말고, 지금 그 순진하고 철없는 모습으로 잊은 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많은 드라마에서 단점으로 작용했던 백치미 여자 주인공은 '기억'이라는 핵심 포장재를 덮어쓰고 장점으로 거듭났다.
이 작품에서 또한 인상적이었던 것은 하진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앞서 말했듯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캐릭터는 정훈이지만, 정훈과 하진의 관계에서 둘 사이의 기류를 만들어내는 것은 하진이다. 두 사람이 가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도, 가짜 연애의 기간을 늘려가는 것도, 먼저 자기 마음을 확신하고 정훈에게 다가서는 것도 모두 하진이다.
작품에서 하진의 행동은 막무가내처럼 보이고, 정훈에게 못할 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정훈이라면 관심도 없는 여자가 가짜 연인 행세를 하자고 하고, 대외적인 이미지까지 망치는 꼴이 참 싫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든 하진의 행동은 하진이 '백치미' 캐릭터이기 때문에 넘어가 줄 수 있다. 백치미 캐릭터를 설정으로 포장하고, 또 이 잘 포장된 캐릭터를 이용해 멜로 드라마의 핵심인 감정선의 시작점까지 만들어내는 구성을 보여준 것이다.
보통 많은 민폐 캐릭터를 가진 드라마는 능력 있고 잘난 남자 주인공이 먼저 사랑을 깨닫고, 왜 내가 대체 그런 여자를 좋아하는지 혼란스러워 하는 자기 부정 단계를 거쳐,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 여자를 보며 안달하고, 결국 그 여자를 자기 손에 넣는 구조를 가지기 쉽상인데, 이 작품이 그런 행보를 보이지 않는 건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사실, 이런 장점은 작품을 보기 전까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인물 소개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어느 정도 있었고.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이 작품은 예상 외로 꽤 초반부 캐릭터 설정이 잘 빌딩된 작품이었다.
지금까지는 꽤 만족스러웠지만, 앞으로는 더욱 어려운 여정이 될 거다. 서연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스토커가 하진에게 붙은 것이 보인 상황에서 정훈은 스토커를 잡아 하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하진이 아무것도 모르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하진이, 다른 드라마의 백치미 민폐 여자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보호받아야만 하는 수동적 캐릭터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전형적이고 질리는 캐릭터를, 전형적이고 질리는 방법으로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이때까지 잘 만들어온 하진을 어떻게 또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이어나가며 작품을 전개할 수 있을지 기대반 걱정반이다.